1087화 정오 (1)
어서방 집필 태감 홍죽은 아직도 황제 폐하가 누워 있는 의자 옆에 엎드려 있었다. 딱딱한 바닥에 오래 엎드려 있다 보니 무릎이 아파져 왔고, 식은땀은 연신 등을 타고 흘렀다. 그가 소식을 전한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황제 폐하는 아무 말 없이 낮은 평상에 누워만 있었다. 아들을 얻었음에도 기뻐하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일어나 매비의 침궁에 가려는 기색도 없었다.
상황을 모르는 홍죽이 동그랗게 뜬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는 황제 폐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바닥에 잔뜩 몸을 숙이고 엎드려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범한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경도로 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마른침을 꿀떡 삼키며 폐하께서 아무 대답이 없으시니,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리며 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 황제 폐하가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일어나지 않은 채 옆에 있는 요 태감에게 말했다.
“짐이…… 그 애가 장성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놀란 요 태감이 몸을 잔뜩 낮추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황제 폐하는 아직 젊은 나이이시니 천년만년 살 수 있을 거라는 등의 말로 아부를 했다.
황제의 야윈 뺨에 피곤한 기색이 드리우더니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 웃었다. 하지만 이 비웃는 듯한 미소가 천하 사람들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진평평이 아직 살아 있다면, 그는 이 말이 뭐라 대답을 했을까? 아마도 요 태감의 대답보다는 더 재미있는 대답을 했겠지. 다만 그 늙은 개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서…….’
변함없는 황궁 야경을 바라보던 황제의 머릿속에 몇 년 전 2 황자게 남긴 편지와 황태자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아바마마께서도 앞으로는 너그럽고 인자하게 행동하셨으면 합니다.’
이승건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리며 황제의 마음을 옥죄었다.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탄식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가 짐에게 이보다 더 너그럽고 인자하게 행동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 * *
다음 날 화려한 축하 말을 준비한 대신들은 놀란 소식을 듣고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매비 마마가 황자를 출산하면서 피를 많이 흘렸고, 어의가 밤새 살리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황궁에서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다행히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어린 황자는 건강하다고 했다. 이에 황제 폐하는 매비의 죽음에 슬퍼하며, 수방궁에서 있는 의 귀빈에게 아이를 돌보라고 지시했다.
수방궁 의 귀빈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앞으로 의 귀빈이 어린 황자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새로 태어난 황자를 미래 경국 용상에 앉을 황태자로 만들려 했던 대신들은 너무 놀라서 눈만 휘둥그렇게 뜬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번 조치는 황제 폐하가 어린 황자가 용상에 오를 가능성을 완전히 끓어버린 것이었다.
매비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황궁에는 어린 황자를 보호해줄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매씨 집안은 세력이 너무나도 약해서 어린 황자를 도울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 의 귀빈 손에서 자랄 어린 황자가 두각을 드러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했다.
정오의 태양이 휘황찬란한 황궁 성벽 위를 비추는 포근한 가을날이었지만, 황궁 안은 햇살을 받아도 전혀 따뜻하지 못했다. 더욱이 무거운 분위기가 가득한 매비의 침궁에는 서늘한 기운마저 돌았다. 새로 태어난 어린 황자는 이미 유모의 안겨서 떠났고, 궁녀들도 수방궁으로 이동해서, 여기에는 어렴풋하게 들리는 울음소리 외에 기뻐하는 분위기는 조금도 없었다.
매비의 시신은 이미 수습돼서 큰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범한과도 만난 인연이 있는 맑고 수려한 외모를 가진 젊은 여인 매비는 황궁의 불운을 피하지 못했다. 피를 많이 흘려서 눈처럼 창백한 그녀의 얼굴이 정오 햇살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다.
범한은 이전에 진심으로 매비가 공주를 낳기를 기원해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매비는 황자를 낳는 데 성공했다. 범한이 매비가 공주를 낳기를 원했던 건 훗날 어린 황자가 장성해서 황궁에 다시 한번 피바람을 불러올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범한 역시도 매비가 황제를 낳는 대신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바쳐야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황궁 처마 위에서 찬연하게 빛나는 가을 햇살도 매비의 창백한 얼굴에 드리운 차가운 기운을 걷어 주지는 못했다.
* * *
범씨 집안 서재.
범숙녕과 범량은 지금 사사와 함께 낮잠을 자고 있었다. 범씨 집안 정원에 심어진 꽃과 나무를 비추는 가을 햇살이 서재 안 창문에 복잡하고 화려한 문양을 만들어 냈다.
진지한 얼굴로 서재 책상 옆에 앉아 있던 임완아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마침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매비도 참 박복한 사람이네요. 하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요. 새로 태어난 황자를 의 귀빈 마마가 키우면 향후 피바람이 부는 건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지금 서재 안에는 임완아와 범약약 두 사람만 있었다. 지난 반년 동안 두 사람은 자주 입궁해서 갈수록 노쇠해지는 황제 폐하를 보필했기에 황궁 안에서 벌어지는 일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더욱이 눈 속에서 피어난 매화꽃처럼 청순하고 아름다우면서 거만한 기색을 풍기던 매비와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다만 두 사람도 매비가 어젯밤에 출산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죽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범약약은 원래부터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형수의 말에도 한참 동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한참 생각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고 임완아의 두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매비가 박복하게 살게 된 이유는 그녀의 부모 때문이에요. 그녀를 의지할 곳 없는 곳으로 보냈잖아요.”
이 말은 《석두기》에서 가원춘(賈元春)이 한 말이었다. 임완아도 범한이 쓴 《석두기》를 읽어 봤기에 이 말을 알고 있었다. 이에 총명하고 머리 회전이 빠른 그녀는 곧장 범약약의 말에 뜻을 알아채고는 미간을 잔뜩 구기며 말했다.
“황제 폐하의 핏줄이 적으니 수녀를 들일 수밖에요. 게다가 황궁 안에 일을 줄곧 의 귀빈 마마께서 주관해 오셨는데, 우리 두 사람 모두 마마의 성정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뒤에 이어질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범약약이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의 귀빈 마마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시죠. 하지만…… 제가 입궁했을 때 몇 번 매비를 진맥하고 태음을 들은 적이 있었어요. 초이렛날 오라버니를 만난 뒤로 매비는 모든 걸 조심하며 보양에 신경을 썼기 때문에 입궁을 했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 있었어요. 첫 출산이기는 했지만, 몸에 큰 문제가 없었기에 분명 순산할 줄 알았는데.”
“출산할 때는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기 쉬워요.”
임완아가 자신이 범량을 출산했을 당시의 힘들었던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범약약이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을 생각하다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분명 순산했다고 들었거든요. 이번 일은 왠지 납득이 되지 않아요.”
서재 안이 조용해졌다. 한참 동안 머리를 굴리던 임완아가 범약약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에요.”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경국 황궁 안에서 추잡한 일이 일어난 적은 많았지만, 이처럼 무서운 일은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황제 폐하가 연로하신 와중에 매비가 용종을 임신한 것이라서 모든 일은 요 태감이 직접 처리했고, 수방궁은 의심을 피하려고 최대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매비를 해칠 수 있겠는가?
범약약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매비 마마의 출산일이 애초 계산했던 것보다 늦었어요.”
임완가가 인상을 쓰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범약약의 두 눈을 바라봤다.
“누가 그런 큰일을 할 수 있겠어요?”
범약약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궁 안에 갇혀 있는 동안 황제 폐하께서 매일 그녀의 거처에 가서 주무셨어요. 자연히 누구도 황실의 위엄을 건들 엄두를 내지 못했겠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나이가 어리고 멍청한 매비 마마가 황제 폐하의 총애를 얻으려고 거짓을 고했지만, 다행히 이후에 일이 잘 풀려 큰 소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아요.”
임완아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나이가 어려서 철이 없는 것 역시 그녀의 부모와 가족을 탓할 수밖에요.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그녀를 황궁에 판 거니까요. 아마도 이 일은 그녀의 집안에서 생각해 낸 것일 거예요.”
범약약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집안은 변변치 않은 작은 가문인데다가 황궁 안에서 여러 해 동안 수녀를 선발하지 않았으니, 아마 피해야 할 일들이 뭔지 몰랐을 거고,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러니 매비의 죽음과 그들이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어요.”
그 말에 임완아는 비로소 범약약이 말뜻과 추측을 이해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군주를 기만하는 죄를 지었다고 하지만, 막 황자를 출산했고, 무슨 대역무도한 짓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아무 이유 없는 죽을 수 있단 말이에요?”
“황제 폐하께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시는지 누가 알 수 있겠어요.”
범약약이 걱정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다만 태어나자마자 어미를 잃은 아이가 불쌍할 뿐이죠.”
경국에서 아주 오래전에도 태어나자마자 친모를 잃은 아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친모가 남겨 놓은 것들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정오 가을 햇살을 받고 있는 매비는 섭경미처럼 저승에서 자신의 아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지켜줄 수 없었다.
매비의 죽음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본인조차도 말이다. 물론 그것은 섭경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잘 자랄 수 있도록 지켜주었다.
이것이 범한이 이전에 황제 폐하에게 말했던, 매비는 의 귀빈만 못하다는 말을 황제 폐하도 어느 정도 뒷받침하는 부분이었다.
* * *
며칠 동안 경국에는 기쁜 분위기로 가득했다. 황궁 안에서 새로 황자가 태어났으니 온 나라가 즐거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도 매비가 죽은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들 황궁 안에서 매비의 출산을 도운 산파가 매비와 함께 순장된 일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지금 경국 조정은 북쪽에서 진행되는 전쟁으로 긴박한 상황이었다. 천하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시기에 어느 누가 눈치 없이 금기시하는 일을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번뜩이며 감시하는 궁정 태감과 고행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멋대로 입을 놀릴 수 있겠는가?
며칠이 지나자 매비와 관련된 일도 조용해졌다. 그리고 경도 안은 다시 깊은 가을날 청명한 하늘만큼이나 평화로웠다.
북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쟁 상황은 좀처럼 진행되지를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쪽 전장에 이미 겨울 눈이 내리고 있음에도 경국의 공세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물밀 듯이 북쪽으로 밀고 올라오는 경국 군대는 어느덧 북제 사람들이 20여 년 동안 지켜왔던 남경 방어선에 바짝 접근하고 있었다. 이런 경국 군대의 발걸음을 느리게 만들 수 있는 건 상삼호 뿐이었다. 송나라 주성에서 꼼짝하지 않던 상삼호는 북제 황제의 맹목적인 심임을 얻은 뒤에도 이상할 정도로 침착하게 병력을 통솔했고, 행진하는 경국 군대의 허리 부분을 공격해 경국을 두렵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