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6화 시듦 (2)
섭완은 황제 폐하의 말에 너무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서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생각과 판단 능력에는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황제 폐하의 말에 담긴 뜻을 곧바로 이해했다. 지금 황실의 맥은 많이 약해져 있었다.
1 황자는 반역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동이성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조정과 맞서고 있었고, 2 황자와 황태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범한은 반역을 저지른 뒤에 행적이 모호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비록 황궁 안에 있는 매비의 출산이 임박해지기는 했지만, 조정 대신들이 마음속으로 미래 경국을 이끌 황태자는 3 황자 이승평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연초에 부상을 당한 뒤 줄곧 몸이 나아지지 않은 상태였다. 비록 일반 사람보다는 회복 속도가 빠르기는 했지만, 쉽게 피곤을 느껴서 이전처럼 나랏일을 많이 돌보지 못했다. 다행히 호 대학사와 반령 대학사가 문하중서를 책임지고 있었기에 나라 운영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3개월 전부터 황제 폐하는 갑자기 무려 반년 동안 황실에 연금되어 있었던 3 황자에게 어서방에서 나랏일을 들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한 달 전부터는 황제 폐하가 자신을 대신해 3 황자에에게 상주문을 검토하라 지시했다. 이에 상황을 지켜보던 경국 조정 관리들은 비로소 황제 폐하의 뜻을 눈치챘다.
황제 폐하가 섭완을 무예 태부를 임명하고 오늘 암암리에 밀지와 공법 비결이 담긴 문서를 건네주면서 3 황자와 친해지라고 명령한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에 감격한 섭완은 바닥이 바짝 엎드려서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가거라. 짐이 오늘 한 말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황제 폐하가 멍한 눈으로 어둠이 드리운 황궁 처마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특히 그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짐의 아들 중에서 안지가 가장 매정하고 잔인한 아이이다. 그러니 살고 싶다면 그 애를 만났을 때 반드시 먼저 세 발자국 뒤로 물러서야 한다.”
그 말에 왠지 모르게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솟은 섭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황제 폐하가 범한을 만났을 때 세 발자국 뒤로 물러서라고 말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범한이란 사람이 너무나도 대역무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섭완이 봤을 때 범한은 관리로써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불충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었고, 아들로서는 불효막심한 짓을 저지른 배은망덕한 놈이었다.
속으로는 화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섭완은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다시 한번 절을 올린 그가 긴 복도를 따라 황궁 밖으로 나왔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섭완의 양어깨는 무거워졌고, 마음은 심란해졌다. 황제 폐하가 자신에게 준 책임이 너무나도 막중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황제 폐하가 오늘 한 말속에서 아주 노쇠한 노인의 냄새를 맡고 불길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섭완의 마음이 다시 떨렸다. 참기 힘든 슬픔이 황궁 복도를 걷고 있는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황제 폐하가 없었다면, 지금의 섭완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 미래 섭씨 집안을 책임질 섭완의 이씨 황족에 대한 충성심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 황제 폐하의 말이 마치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식을 부탁하는 사람의 말처럼 들렸다.
‘어째서일까? 황제 폐하께서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신 것일까?’
비록 노쇠했고, 지쳐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군왕인 황제 폐하가 어째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왜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일까? 만약 황제 폐하가 정말 세상을 떠나고 3 황자가 용상에 앉는다면, 수방궁과 범씨 집안의 관계를 생각할 때 앞으로 경국은 범한 일파의 세상이 될 게 뻔하지 않은가?
차가운 한기가 등을 따라 머리를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섭완은 소름이 끼쳐서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생각을 멈춘 그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차분히 황궁을 걸어 나갔다.
* * *
태극전은 아직 등불이 밝혀지지 않아 무척이나 어두웠다. 이에 황제 폐하는 약간 의기소침해 보이는 섭완의 뒷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냉담한 눈빛으로 어둠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자신의 불빛을 찾는 것 같았다.
한참 침묵하던 황제 폐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짐은 지금껏 살면서 여러 아들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안지 때문에 이렇게 낭패를 볼 줄은 몰랐다.”
덤덤히 말하던 황제 폐하가 갑자기 말투를 바꾸며 말했다.
“그리고, 그 애가 정말 신묘에서 살아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
황제 폐하의 눈빛이 차갑게 번쩍이더니,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짐이 아비이지 않은가. 이 세상에 어느 아들이 아비를 이기려 한단 말인가?”
뒤에 서 있는 요 태감은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리는 황제 폐하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황제 폐하가 처량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에 어두운 밤에 높이 솟아 있는 황성 벽이 보였고, 금군이 성벽 위에서 켜둔 등불이 어렴풋하게 빛나는 모습도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황성 벽을 바라보던 황제 폐하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지난번 황궁 안에서 암살 사건이 일어난 뒤로 황제 폐하는 더는 궁을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대신들은 황제 폐하가 원래 궁을 좀처럼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황제 폐하의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황궁 안에서 치료에 전념하느라 그렇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황제 폐하가 출궁를 하지 않는 이유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는…… 궁 밖을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황성에서 천둥이 울린 그 날, 줄곧 황제 폐하의 손아귀 밖에서 떠돌던 검은 상자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인간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왕인 그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날렸다. 다행히 이 공격으로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군왕으로서 자존심은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황제 폐하는 자신을 손쉽게 죽일 수 있는 사물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가 평생 동안 두려워했던 그 상자는 지금도 황성 밖 어딘가에 있었다. 비록 범한의 손에 있지는 않았지만, 적의 손에 있는 건 분명한 만큼 그는 궁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황제 폐하는 상자가 언제 또 다시 등장해 천둥과 같은 소리를 낼지 알지 못했지만, 범한이 살아 돌아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범한이 돌아왔다면, 오 선생도 돌아온 것인가?’
황제 폐하가 눈꺼풀을 살짝 내려뜨렸다. 황궁 안에만 있어도 교지를 내려 나라를 통치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왠지 모르게 높게 세워진 황성 벽이 자신을 보호하는 보호막이 아니라 자신을 황궁 안에 가둬두는 장벽처럼 느껴졌다.
“안지가 죽지 않으면, 짐은 안심할 수 없다.”
황제 폐하가 야윈 얼굴에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엄숙한 표정을 지어도 주름져서 노쇠해 보이는 얼굴이 가려지는 건 아니었다. 마른 고목 나무의 나무껍질처럼 이곳저곳 깊이 팬 주름이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황제 폐하와 범한 사이에는 아주 복잡한 옛일들과 원한이 얽혀 있는 데다가 서로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음에도 경제는 여전히 자신의 아들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갖춘 범한을 대견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이 마음에 들수록 더욱 화가 났다. 그는 지금껏 살면서 오늘 밤처럼 한 사람의 죽음을 간절히 원한 적이 없었다.
진평평이 자신을 배반했다는 걸 알았을 때, 심지어 암암리에 오랜 세월 배반을 계획해 왔다는 걸 알았을 때도 황제 폐하는 오늘처럼 화가 났었다.
마음속에 왕도를 품고 있는 경제는 좀처럼 기뻐하거나 화를 내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 감정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나 느끼는 거였다. 복잡한 눈빛으로 밤이 드리운 황궁을 바라보는 그는 속으로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상자를 생각했고, 지금 어느 길을 따라 경도로 오고 있을 범한과 오죽을 떠올렸다. 그러자 화가 가라앉으면서 다시 호수처럼 고요한 침착함을 회복했다.
바로 그때 의자 뒤 복도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요 태감이 화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보니 다시 어서방에서 황제 폐하의 시중을 들고 있는 홍죽 태감이 보였다. 손에 등롱을 든 채 헐레벌떡 달려오는 홍죽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어두워서 그런지 홍죽의 얼굴에 여드름 자국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황제 폐하 옆에 바짝 엎드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경하드립니다.”
* * *
매비는 가족도 없이 출산했다. 경도를 넘어 경국 전체에 있는 3 황자 이승평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바람과는 무색하게 경력 20년 가을에 그녀는 아들을 낳는 데 성공했다. 북쪽 전쟁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황실의 핏줄이 하나 더 생겼으니, 반가운 소식이자 좋은 징조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매비의 출신이 그다지 높지 못하다는 거였다. 그녀의 가문이 보잘것없지만 않았다면, 새로운 황자의 탄생에 경도 전체가 더욱 떠들썩하고 시끄러웠을 거였다.
해마다 점점 성장한 3 황자 이승평은 이미 진중하고 학식과 교양이 갖춘 황자로 자랐다. 게다가 지금은 어서방에서 나라의 일도 듣고 호 대학사에게 직접 교육도 받고 있었으니 엄연히 따지면 황태자나 다름 없었다. 그러니 매비가 출산한 황자가 앞으로 황궁에 아주 큰 변화를 불러올 수는 없을 거였다.
하지만 모든 신하들이 과거 포월루 사건을 잊은 건 아니었다. 겉으로는 범한와 2 황자의 싸움으로 되어 있었지만, 사실은 범씨 집안 둘째와 3 황자가 관련된 사건이었다. 이후 범씨 집안 둘째는 북제로 가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3 황자가 그 사건에서 한 일들을 황궁에서 전부 기록을 지웠지만, 모두가 잊고 있는 건 아니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3 황자와 범한의 사이가 아주 가깝다는 천하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조정 관리들을 무참히 살해한 난폭하고 잔혹한 범한이 훗날 다시 세력을 떨치고 일어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경국 조정에 있는 관리들 중에는 총명한 사람들이 많았다. 비록 황제 폐하는 지금껏 후계가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뜻을 밝히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러 일이 있었음에도 더는 수녀를 선발해 궁에 들이지 않는 걸 통해서 몇몇 영리한 사람들은 이미 황제 폐하의 뜻이 뭔지를 추측해 두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황실에 핏줄이 하나 더 추가된 건 불확실한 가능성이 조금 더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황궁에서 곧바로 이 기쁜 소식을 알리지 않았음에도, 곳곳에 깔려 있는 입을 통해서 황궁 밖으로 소식이 전해졌다. 하룻밤 만에 모든 조정 대신들이 황궁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다. 이에 일부 대신들은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며 근심에 빠졌고, 또 일부 대신들은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좋아했으며, 일부 대신들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연달아 한숨을 내쉬며 었다. 하지만 대신들 중 거의 대부분은 벌어질 상황을 추측하며 잔뜩 긴장했다.
대신들이 저택 안에서 내일 조회 때 말할 아름답고 화려한 축하 문구를 골몰하고 있을 때 노년에 늦둥이 아들을 얻은 황제 폐하는 외부 신하들처럼 감동하거나 놀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