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5화 시듦 (1)
황제 폐하의 말을 들은 섭완의 얼굴에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번뜩이는 걸 숨기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갑작스럽게 경국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 청년 고위 장군인 섭완은 소년 시절부터 친아버지인 섭중과 사이가 틀어져 정주에서 멀리 떨어진 남소로 내려갔다. 만약 경도 황궁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 폐하가 남몰레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자신에게 기회가 올 때까지 답답한 세월을 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섭완은 인고의 시간을 참지 못하고 맹렬하게 폭발해 버렸을 거였다.
이러한 경험으로 섭완은 자신을 아주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먼저 황제 폐하가 그에게 상삼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지적했을 때 섭완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던 것도 사실은 일부러 의도해서 드러낸 것이었다.
상삼호는 한 시대를 호령한 명장인 만큼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평가는 받아들이기 힘든 혹평은 아니었다. 하지만 섭완은 어쨌든 앞으로 경국의 군대를 책임질 인재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런 그가 지나치게 덤덤한 반응을 보인다면, 자칫 청년 시기에는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패기나 승부욕이 없는 사람처럼 비칠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이라는 이름을 듣자 섭완은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변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급히 고개를 숙여 눈빛을 감췄다. 황제 폐하는 그가 서호 초원에서 위대한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범한이 암암리에 약간의 도움을 줬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섭완이 진짜 놀란 이유는 황제 폐하가 범한의 생사를 황제 폐하 자신의 생사와 동급으로 놓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범한이 어떤 사람인지 천하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섭완은 오랜 시간 남소 전선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경도에서 일어나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섭씨 집안과 범씨 집안의 관계가 아주 복잡한 데다가 자기 누이의 성격을 완전히 바꾼 사람인 만큼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범한은 한때 경국에서 가장 잘나갔던 젊은 권신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고 뛰어난 재능으로 하늘을 환히 비추는 불꽃처럼 경국을 빛낸 대인물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섭완은 오랜 시간 인내하고 참아오면서 천하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지켜보았다. 마음속에 강인한 자신감과 기개를 갖춘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천하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들의 능력이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 폐하가 자신을 외지에 두고 무대에 설 기회를 주지 않아 능력을 드러낼 수 없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무대 위에 설 수 있게 되자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쏟아부었다. 긴 인내 끝에 마침내 무대에 올라선 그는 청주 대첩과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추격전으로 자신의 이름을 천하에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번 범한이라는 이름을 떠올린 때면 약간 기괴한 감정이 들었다.
질투나 부러움 같은 게 아니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싸늘함이었다. 섭완은 경도에서 일어난 일들을 지켜보면서 범한이란 사람은 간파해 내기가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범한은 때로는 감탄스러운 사람이었다가 때로는 두려운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때로는 동정심이 들거나 한심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뭐라 딱 집어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섭완은 범한이 천하를 뒤흔들 만한 대단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섭완 자신을 포함해서 조정의 관리나 백성들은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그런 위치에 오르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사대 종사 중 경국 황제 폐하를 뺀 모든 종사가 이곳에 없으니 북제와 경국의 황제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와 비슷한 위치에 설 수 없었다.
* * *
“너는 짐이 그놈을 너무 높이 평가한다고 생각하느냐?”
황제 폐하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품에 안긴 하얀 고양이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젊은 신하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이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때로는 자신이 누구보다는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는 용기도 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으로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지적을 받자 갈수록 어두워지는 황궁 노을 안에서 섭완이 정중하게 황제 폐하를 향해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가 두 눈을 가늘게 뜨자 눈가에 주름이 지면서 세월의 풍파를 겪은 노쇠함이 드러났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세상에서 짐의 통제에서 벗어나 반기를 수 있는 사람은 여럿 있지만,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짐에게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너희는 안지가 어떤 사람인지 짐만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황제 폐하는 확실한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지만, 말속에는 약간 모호한 뜻도 담겨 있었다. 연초 겨울에 경도 상황이 급변하자 범한은 경도 안에서 제멋대로 날뛰며 살육을 벌였다. 이건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대항한다는 말과는 맞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는 하루 동안 하종위 쪽에 속해 있는 관리들을 모두 죽여서 조정을 경악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칼을 들고 황궁에 침입해 반역까지 저질렀다…….
게다가 이후 벌어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경국 대신들을 어느 때보다 당혹스러워했고, 경도 찻집에서 새어 나오는 소문들도 방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경국 조정이 엄청난 노력을 쏟아 범한과 황궁에 침입한 자객들을 잡으려 했지만,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범한의 세력을 조금도 건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경도 안에서 하종위 일파 관리들을 살해하는 데 참여한 것이 분명한 감찰원 관리들 중에 대부분이 파면되었지만, 심문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강남 일대에 있는 범씨 집안 세력들에 대해서도 황궁은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그동안 항상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황제 폐하는 이상하게도 범한과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온화하고 너그럽게 처리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태도가 온화함과 너그러움을 넘어 애매모호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황제 폐하의 행동을 대놓고 비난하지는 못했지만, 뒤에서 남몰래 그 이유를 궁금해했다. 경도에서 이성을 잃고 제멋대로 날뛴 역당 범한의 무리들을 황제 폐하가 너그럽게 대하시는 이유가 뭘까? 혹시 이 일에 아무도 모르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초원에서 힘들게 추격전을 마친 뒤 경도 동란의 후속 조치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게 된 섭완도 무척이나 놀랐고,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의심하는 이유는 경국 중신들 중 눈 내리는 밤에 황제 폐하와 범한이 황궁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는 범한의 세력을 숙청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범한과 두 사람의 전쟁을 하기로 승낙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거였다. 그러니 만일 경국 조정이 범한의 세력을 숙청한다면 경국은 개국 이래로 가장 큰 혼란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황제 폐하는 이 일에 대해서는 이전과는 다르게 냉혹하고 잔인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유부단하고 너그럽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범한만이 황제 폐하가 오랜 세월 품어온 뜻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경국의 명맥을 움켜쥐고 황제 폐하에게 어떤 태도를 강요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 경제에게 손에 쥔 숙청의 칼을 내려놓으라고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은 범한뿐이었다.
“범한이 죽지 않으면 짐은 안심할 수 없다.”
흰 고양이의 털을 쓰다듬던 황제 폐하의 손가락이 갑자기 살짝 경직되더니 그가 두 눈을 천천히 감으며 옆에 있는 섭완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섭완은 마음이 너무 떨려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류운산수를 연마한 지 얼마나 됐느냐?”
황제가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아직도 마음이 떨리고 있는 섭완은 황제 폐하가 갑자기 화제를 바꾼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잠시 뒤 대답했다.
“이게 겨우 요령을 터득했습니다.”
“네 아비는 20년 전에 대벽관을 완벽한 단계까지 수련했지만, 이후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일반인과 다른 자질을 가진 범한도 네 누이에게 대벽관을 배운 뒤로 더 진전되지 못했다. 류운 아저씨의 절예가 전수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요령을 터득했다고 하니 짐은 무척 안심이 되는구나.”
황제 폐하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너는 범한의 적수가 되지 못하니 만약 훗날 마주치게 된다면 먼저 세 걸음 뒤로 물러서도록 해라.”
그 말에 섭완은 다시 마음이 떨렸다. 비록 그는 황제 폐하가 자신을 범한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평가한 게 못마땅했다. 하지만 방금 전 범한이 살아 있으면 안심할 수 없다는 황제 폐하의 말을 통해서 섭완은 이미 많은 내용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처럼 강인한 황제 폐하가 국사와 전쟁을 대가로 유인해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과는 비교되지 않는 인물임이 분명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기질이 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섭완은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마음속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경국 군대 안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명장인 그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범한과 정면 대결하는 날이 오기를 갈망했다.
해가 서쪽으로 점점 사라지자 하늘이 어두워졌다. 어느덧 칠흙 같이 어두운 밤이 깊은 황궁을 포위했고, 태극전 앞에 있는 황제와 신하를 감쌌다. 황제 폐하가 천천히 두 눈을 뜨자 눈동자에 번쩍이는 빛이 비치며 순간 황궁 안을 밝게 비추는 것만 같았다.
그때 요 태감이 황제 폐하가 누워 있는 의자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황색 비단이 깔린 나무 쟁반이 들려 있었는데, 쟁반 위에는 편지로 보이는 사물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섭완이 의아한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황제 폐하를 바라보았다.
“첫 번째 문서는 짐이 수행한 공법의 비법이 적힌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짐이 너에게 주는 밀지이다.”
황제 폐하가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1년 안에 짐이 만약 죽으면 밀지를 열어보아라. 그리고 만약 짐이 죽지 않으면 밀지를 태워 없애야 한다. 그리고 공법의 비법을 연마한다면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짐이 너희 섭씨 집안에 주는 보상이라 생각해라.”
섭완은 어째서 황제 폐하가 섭씨 집안에 보상을 내리는 건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공법의 비법이 담겨 있다는 말은 귓가를 울렸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초원에서 피도 눈물도 없이 잔혹하게 사람을 죽인 섭완이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체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한 그가 곧장 황제 폐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섭완은 거짓으로라도 사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종사의 경지에 오른 황제 폐하가 수행 과정을 적은 문서는 그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이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는 이 일을 통해서 섭씨 집안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황실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게 하려했다. 황제의 더 없는 신임을 받은 섭완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짐이 며칠 전에 너를 승평이의 무예 태부로 임명하였다. 그러니 앞으로는 수방궁에 자주 찾아가도록 해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패도 공결의 비법을 전해주는 걸 보면 황제 폐하는 황실에 대한 섭완의 충성심이 변할 수 있다는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