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2화 전원이 황폐한 데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으리 (3)
북쪽 설원을 지나 대설산 깊숙한 곳에 있는 신묘를 찾아갔던 세 명의 젊은 강자들은 랑야군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왕 십삼랑은 최대한 빨리 동이성으로 돌아가서 외롭게 그곳을 지키고 있는 1 황자와 검려 사람들에게 범한이 살아 있다는 소식과 계획을 전해야 했다. 그리고 범한이 예상했듯이 해당 역시 떠나려 했다.
천하의 판세가 바뀔 수 있는 큰 전쟁이 일어난 상황에서 북제는 경국의 힘에 맞서 모든 국력을 집중하고 있기는 했지만,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북제 성녀인 해당은 이런 상황에서 손을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빨리 상경성으로 돌아가서 북제 황제 곁을 지키고 싶었다. 푸른 산에 있는 천일도 문파를 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나라를 침략하려 하는 외부 세력에 맞서 싸워야 했다.
이별할 때 피곤이 가득한 해당의 두 눈동자를 본 범한은 마음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슬펐다. 그는 경국 황제의 천하통일을 향한 강력한 의지 앞에서 북제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두 나라의 국력을 생각하면, 북제가 오랜 시간을 버티지는 못할 거였다. 그리고 만약 경국 군대가 상경성을 포위하는 날이 온다면, 아름다운 북제 황궁이 전부 불타 잿더미로 변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불꽃은 해당와 사리리, 그리고 자신의 여황제에게까지 번지게 될 것이었다.
역사를 바라보는 개인적인 관점이나 여러 상황을 바라보는 범한의 태도,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볼 때 그는 전쟁을 좋게 보지 않았다. 지금 천하를 뒤흔드는 전쟁의 불길을 바라보는 범한의 태도는 아주 단호했다. 그는 반드시 무슨 방법을 써서든 전쟁을 저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해당타타에게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고, 자신이 지금 상황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문 채 오죽 아저씨를 데리고 홀로 남쪽으로 향할 뿐이었다.
범한은 가을이 얼마나 깊었는지 관심 가지지 않았고, 나뭇잎이 누런색인지 붉은색인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탁 트인 하늘 아래서 범한과 오죽은 아무 말 없이 남쪽으로 내려갔다. 신묘를 떠난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오죽은 여전히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 사실이 범한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는 경도로 돌아간 뒤에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지만, 황제 폐하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소식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왕계년 다음으로 가장 유능한 보조이자 만담꾼이었던 소문무가 죽었다. 그해 가을에는 절름발이 노인이 세상을 떠났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섭경미가 세상을 떠났다.
신묘에서 수천, 수만 년에 걸친 인류의 흥망성쇠를 보고 난 뒤 범한은 삶과 죽음을 더욱 초연한 자세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묘를 떠나 인간 세상에 발을 들여놓으니 저절로 세속적인 생각들이 많아지고, 다시 삶과 죽음에 집착하게 되었다. 아무리 초연한 마음을 가졌어도 아끼던 부하의 죽음을 그냥 웃어넘길 수는 없었다.
검은색 마차 안에 앉은 범한이 마부 옆자리에 앉은 오죽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오죽 아저씨는 놀랍게도 여전히 소년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검은 천은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20년 전 담주에서 보았던 모습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오죽 아저씨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절대 강자처럼 보였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 세상을 낯설게 느끼는 건지 아니면 익숙하게 느끼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마음을 은은하게 채우는 슬픔에 범한이 마차 창문 발을 내리고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이전의 오죽 아저씨는 그냥 맹인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못 볼 뿐만 아니라 말도 하지 않는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때 무슨 방법을 사용하셨던 걸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마차는 남릉군(南陵郡)에 도착하자 더 나아가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부가 더 가고 싶지 않아 했다. 비록 북제 조정이 민심이 불안해지지 않도록 남쪽에서 일어난 전쟁 상황을 은폐하고 있었지만, 전쟁은 황실 추문처럼 쉽게 가려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북제 사람들 모두가 대륙 중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에 백성들은 차분하면서도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주변을 살피며, 상황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마부가 더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으려는 것도 전쟁터로 마차를 몰고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에 방법이 없어진 범한은 은전으로 마차를 서서 직접 마부가 되어 오죽 아저씨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빙원을 지나오는 동안 진하게 농축된 윈기를 많이 흡수한 덕분에 범한의 상처는 이미 회복된 상태였다. 그는 인류와 하늘 사이에 가로로 걸쳐 있는 경계에 접근할 수 있었다. 이에 이 세계에서 황제 아버지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십여 일을 쉬지 않고 남쪽으로 이동하자 길가에 세워진 허름한 나무 움막과 무표정한 얼굴로 힘없이 걷고 있는 난민 무리와 만나게 되었다. 모든 게 황량하고 쓸쓸해서 마차 위에 있는 두 사람은 다시 척박한 북쪽 설원을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자 사람들과 마주치는 횟수도 줄었다. 가끔 바람에 나부끼는 작은 눈송이도 관도 양쪽의 숨이 막히도록 조용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깨뜨리지는 못했다. 도로 주변에 드문드문 부패한 시신 몇 구를 볼 수 있었고, 고개를 멀리 산골짜기로 돌리면 어렴풋하게 불타 폐하가 된 촌락을 볼 수 있었다.
원래 이곳은 토지가 비옥한 곳이었다. 북해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래도 많은 백성들이 이곳의 비옥한 토지에 기대 살아갔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모든 게 버려진 황무지로 변해버렸고, 살던 백성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북쪽으로 피난을 상태였다. 그리고 미처 전쟁의 불길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천하통일을 이루기 위한 희생물이 되었다.
범한은 불타 폐허가 된 촌락과 길가에 나뒹구는 시체들이 경국 군대의 침략 때문인지 아니면 북제 패잔병들의 흔적인지 깊이 파고들어 알고 싶지 않았다. 전쟁은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른 죄였다. 세상에 좋은 전쟁이나 나쁜 전쟁이 나뉠 수는 없는 거였다.
관도에 풍기는 죽음의 기운과 건조에 공기에 가득한 피비린내가 검은색 마차 주변을 감쌌다. 범한은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불안해하는 말을 다그칠 뿐 고개를 돌려 오죽 아저씨의 얼굴을 살피지 않았다.
그는 지금 양국의 군대가 서남 방향에 있는 연경성 북충 평원(北沖平原)에 집결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승리를 거머쥔 경국 정북 진영은 병력을 좀처럼 움직이지 않은 상삼호가 두려워 진영으로 돌아가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양쪽이 모두 신중하게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전쟁이 불길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이곳은 오히려 다른 곳보다 비교적 안전한 편이었다. 다만 길가에 보이는 대규모 전투의 흔적을 직접 눈으로 보자 범한은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경국 기병들이 상삼호가 주둔해 있는 송나라 주성을 돌파한 뒤 전력을 다해 북진한다면 얼마나 참혹한 광경이 펼쳐질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세상 전체에 마차가 굴러가는 소리 말고는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 채찍을 휘둘러 강 건너편에서 순찰을 하는 경국 기병대를 피해 숨었다. 마침내 경국 국경에 진입한 거였다.
바로 그때 신묘에서 나온 뒤로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오죽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신묘 밖의 세상도 별로 좋지는 않군.”
“그러게요. 공교롭게도 신묘 밖의 상황이 좋지 않네요. 하지만 노력하면 훨씬 좋게 변할 수 있을 거예요.”
범한이 입가에 복잡한 심경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채찍을 다시 가볍게 휘둘렀다.
* * *
고즈넉한 정취가 가득한 상경성 성벽 위에 첫눈이 떨어졌다. 하지만 검은색과 청색의 조화가 아름다운 북제 황궁 뒤로 보이는 하얀 눈발에 감동하는 사람은 없었고, 광장에 양털 담요처럼 뽀얗게 쌓인 하얀 눈이 더러워지는 걸 보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없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질수록 많은 관리들이 무정하게 하얀 눈을 밝으며 바삐 어디론가 걸어갔고, 하얀 눈은 어느새 진흙으로 변해버렸다.
사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바삐 걸어가는 북제 관리들은 바닥에 깔린 하얀 눈 따위를 보고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남쪽 전선에서 보내온 전보가 쉴 새 없이 상경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에 북제 관리들은 황궁 옆에 위치한 중서대(中書臺)에 속속 모여들었다. 이때 중서대 안은 걱정과 두려움에 숨 막힐 정도로 분위기가 긴장되어 있었지만, 다행히도 허둥지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가장 어두워지는 시간에도 중서대 안에 있는 북제 대신들이 무언가를 가지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논쟁 속에서 아주 낮고 침울한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들 말을 멈췄다. 그 목소리는 북제 조정 관리들의 입을 다물게 했고, 또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빨리 결정을 내리도록 재촉했다.
북제 조정은 이미 여러 해 동안 이번 전쟁을 준비해 왔기에 경국 군대가 제멋대로 공격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전쟁을 대비한 통제 수단 및 대응 방식은 아주 빠른 속도로 황궁에서부터 중서대를 통해 전쟁터에 있는 병사들에게까지 두루 전해졌다. 이미 천년의 역사를 지닌 영토를 지키기 위해 북제는 한 달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 만에 일사천리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밝은 황색 어가가 중서대를 떠나는 데도 북제 관리들은 나와서 배웅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처럼 쌓인 복잡하고 시급한 군사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했다. 북제 관리들이 황제를 배웅하지 않은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지금 나라의 존폐가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아첨하는 데 힘을 쏟았다가는 황제 폐하의 화를 건드려 머리가 날아갈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어가가 황궁 정전 앞에 도착하자 얼굴이 어두운 북제 황제 폐하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마차 안에서 나왔다. 북제 황제가 부축도 받지 않고 곧장 마차 아래로 뛰어내리자 옆에 있는 태감과 궁녀들이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마음이 심란한 북제 황제는 자신의 용체(龍體)가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정전 앞 돌계단에 오른 북제 황제가 몸을 돌려 어가 옆에 서 있는 금의위 지휘사 위화 및 세 명의 중요 대신들을 향해 질책했다.
“경국의 내란 덕분에 자네들은 준비 기간은 1년 더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이처럼 허둥지둥한단 말인가! 자네들이 이리 쓸모가 없는데, 어찌 믿고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북제 황제 폐하의 호통에 마음속이 서늘해진 몇몇 대신들이 남몰래 몸서리를 쳤다. 그들은 오늘 황제 폐하의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가 어젯밤에 천 리를 달려 도착한 전보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전보에 따르면 연경성에 있는 경국 군대가 이미 출동을 하기 시작했고, 북제 남경에 주둔해 있는 군대들은 계속 패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권을 가진 대원수 상삼호는 남경성 안이 아니라 송나라 작은 주성 안에 숨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북제 대신들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황제 폐하가 이렇게까지 격노하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조금 전에 중서대에서 대신들이 언쟁하며 갈팡질팡했던 모습 보였기 때문인 건가? 아니면 폐하께서는 수십만에 달하는 경국 군대를 막을 수 없을까 봐 두려워하시는 건가? 아니면 상삼호 장군이 송나라 주성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이유를 의심하시기 때문인가?’
위화는 허리를 굽혀 몸을 잔뜩 낮춘 채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지금 북제 조정은 황제 폐하가 완전히 틀어쥐고 있었기에 어느 세력도 황실은 존엄 앞에서 함부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설사 4년 전 세상을 떠난 고하 대사가 다시 등장한다고 해도 황제 폐하의 위엄을 무시할 수 없을 거였다. 더구나 지금처럼 경국이라는 거대한 적을 마주한 상황에서 북제 관리들은 황제 폐하의 권위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