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9화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사람의 이름 (5)
범한의 몸은 이미 얼대로 얼어 있었다. 그래서 달려드는 자세를 취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빳빳한 몸이 오죽이 있는 곳을 향해 넘어지는 꼴이었다. 범한의 목은 곧 쇠막대기와 충돌할 상황이었다.
바로 이 긴급한 상황에 막대기의 끝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범한의 몸은 계속 쓰러지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자신을 향해 몸을 던지는 범한의 행동에 오죽의 손에 든 쇠막대기를 있는 순식간에 거둬들였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을 때까지 쇠막대기를 물린 오죽이 결국 손을 놓고는 고드름처럼 몸이 딱딱하게 얼어버린 범한이 자신의 앞에 쓰러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범한이 한쪽 손을 뻗어서 오죽의 무명옷 한 자락을 꽉 움켜쥐자 쌓여 있던 눈이 부스스 떨어졌다. 그가 오죽을 노려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독기와 자신감이 가득한 범한의 눈빛은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당신을 나를 절대 못 죽여!’
‘당신은 나를 죽이고 싶어 하지도 않고, 나를 죽일 수도 없어.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본능과 살아 있는 마음이 나를 죽여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저와 함께 가요!”
아무 말 없이 오죽을 노려보던 범한의 눈동자가 번뜩이며 빛났다. 그가 쇠막대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있는 오죽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범한은 죽을 각오를 하고 오죽을 향해 달려들었고, 결국에는 자신과 오죽 사이에 있던 쇠막대기를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두 세계의 거리가 더는 가까워질 수 없을 정도까지 가까워졌을 때 비로소 범한은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오죽이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모를 때에는 항상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야 하는 법이에요.”
“마음이 뭐지?”
“마음은 감정이에요.”
“감정은 인류가 자신을 속이거나 진실을 왜곡하려 할 때 사용하는 수단이지. 하지만 결국에는 한순간만 속일 수 있을 뿐이다.”
“인생은 잠깐의 순간이 쌓여서 이뤄지는 거예요. 한순간에 다른 한순간에 더해져 이뤄지는 거죠……. 그러니까 한순간을 속일 수 있다면 한 시대를 속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만약 한 시대를 속일 수 있다면, 그걸 속인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아저씨는 제가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저를 따라오세요. 저는 아저씨가 궁금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호기심이란 감정은 인간만 가질 수 있는 거니까 아저씨는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살아 있는 사람만이 산의 꼭대기에 뭐가 있는지, 바다 안에는 뭐가 있는지 별에는 뭐가 있는지 태양에는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요.”
“산꼭대기에는 뭐가 있지?”
“아저씨가 직접 가서 보세요. 신묘 밖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다면 저를 따라오시면 돼요.”
“이런 대화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데…… 이유를 모르겠어.”
“멍하니 있으면서 번갯불이 번쩍하고 떨어져 알려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에요! 모르겠으면 자기 마음이 가는 데로 따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새도 똥을 누지 않는 이 거지 같은 곳은 떠나자고요.”
“하지만 신묘는…….”
사실 이 대화는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다. 설원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오죽과 그의 앞에 쓰러진 범한은 입으로 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범한이 작은 목소리로 오죽에게 자기와 함께 가자고 말한 뒤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 서를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오죽이 어렵게 몸을 구부려 범한을 안더니 자신의 등에 업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맹인 청년이 갓난아기를 업었을 때처럼 말이다.
* * *
오죽의 등이 차가웠음에도 범한은 업히면서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범한은 마침내 오죽과 함께 갈 수 있게 되었음에도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마음속에서 격렬하게 일렁이는 감정을 도저히 어떤 표정으로도 표현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펑펑 울고 싶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미친 듯이 웃고 싶었다. 그는 피나는 노력을 했어도 오죽 아저씨가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오죽 아저씨가 자신과 함께 이 무너진 사원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았다.
오죽 아저씨와 함께 떠난다는 생각에 범한은 기뻐서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또 오죽 아저씨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엉엉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저 추위에 잔뜩 움츠러들어서는 피를 토하고 기침만 할 뿐이었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해당과 왕 십삼랑을 바라보았다. 인간 세상에서 손꼽히는 강자인 두 사람의 얼굴을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동자는 심상치 않은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인간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일을 겪은 사람처럼 잔뜩 겁을 먹은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천하의 해당과 왕 십삼랑이 이렇게 겁에 질린 걸까?
상황을 지켜보았기에 왕 십삼랑은 범한이 마침내 뜻을 이뤘다는 걸 알았지만,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두려움과 후회가 섞인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은 왕 십삼랑이 온몸을 덜덜 떨면서 범한을 향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신묘를 부쉈습니다.”
신묘를 부쉈다는 게 무슨 말일까?
오죽에 등에 업힌 범한은 왕 십삼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하는 말을 듣고는 몸서리를 쳤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두 동료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신묘를 부쉈다는 왕 십삼랑이 말이 진짜인 걸 알았다. 왜냐하면, 해당과 왕 십삼랑의 안색이 더없이 창백하고, 눈빛이 복잡한 게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는 두 사람이 겁에 질린 메추라기처럼 잔뜩 움츠러들 정도로 두려워할 일은 많지 않았다.
범한은 기침이 너무 심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두피가 얼얼해지고, 머리카락 한올 하늘이 바늘처럼 머리를 찌르는 것만 같았다. 몸이 잔뜩 얼어 바늘로 온몸이 찔리는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서리를 칠 뿐이었다.
범한은 신묘를 부쉈다고 해서 불빛이 응축된 노인이 살상 무기를 동원해 자신들을 죽일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미 허물어진 유적이 완전히 망가진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뭐가 있겠는가? 범한이 걱정하는 건 신묘 안에 있는 노인이 아니라 자신을 업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죽이 신묘가 완전히 부서졌다는 소식을 듣고 신묘를 보호해야 한다는 본래 임무를 다시 상기하며 태도를 바꿀까 봐 걱정되었다.
범한이 신묘가 부서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죽 아저씨도 함께 신묘 내부 상황을 눈치를 챘음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오죽 아저씨는 왜 움직이지 않은 걸까? 자신이 지켜야 하는 신묘가 부서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왜 태도를 바꾸지 않은 걸까?
범한이 이뤄지기 힘든 기대를 품었다. 사실 그는 지금 육체와 정신 모두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어 더는 과감한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꼬박 하루 낮과 밤 동안 오죽 아저씨를 깨우려 노력하다가 결국 더는 버티기 힘들어지자 목숨을 걸고 몸을 날려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범한은 가까스로 힘들게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오죽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설득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다시 예기치 않은 일로 말미암아 모든 게 물거품이 될까 봐 죽을 만큼 두려웠다.
범한은 당연히 해당과 왕 십삼랑의 행동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두 동료가 자신이 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이런 대담한 행동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신묘를 부쉈다고 해서 오죽 아저씨를 옮아 매고 있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사라졌고, 이로써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던 오죽이 태도를 바꾼 거라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던 범한은 해당과 왕 십삼랑의 마음에 감격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범한과 달라서 이전 세상에 대한 지식과 식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신묘를 신성시 했고, 특히 해당은 항상 신묘를 공경하고 숭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범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평생 신성시한 신묘를 부순 거였다.
여러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범한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긴장한 눈으로 오죽 아저씨의 살짝 야위었지만, 단단한 어깨를 바라보았다.
오죽 아저씨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 * *
범한이 피를 토하면서도 오죽을 깨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을 때 해당과 왕 십삼랑은 신묘의 열린 문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범한이 죽을 각오를 하고 오죽 앞으로 몸을 날리느라 다른 곳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고, 오죽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주변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해당과 왕 십삼랑은 그 틈에 신묘로 들어가 보이는 모든 걸 부쉈다. 최대한 빨리 모든 걸 망가뜨린 뒤 도망치듯이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얼굴은 핏기없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몸은 쉴 새 없이 떨었다. 마치 한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고 모든 가족을 숙청하는 일에 동원된 졸개들처럼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평생 신성시 해온 신묘 안에 쳐들어가서 안에 있는 모든 걸 망가뜨리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신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더없이 숭고하고 신비스러운 곳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며칠 전 직접 두 눈으로 신묘의 모습을 확인했을 때 감격을 금치 못했고,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선인을 보았을 보고 겁에 질렸다. 두 사람은 선인 앞에서 범한처럼 당당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인류의 상상을 초월한 숭고한 존재 앞에서 불경한 짓을 저지를 용기도 없었고, 더우나 자신들이 선인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신묘 안으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죽을 각오를 했다. 두 사람은 그저 잠깐만이라도 신묘 안에 있는 선인을 방해해서 범한이 맹인 대사를 구할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두 사람의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손쉽게 신묘를 부술 수 있었다.
선인이 공중에 응결되어 나타났을 때 겁에 질린 해당과 왕 십삼랑은 선인을 볼 용기가 없었기에 속으로 자신은 맹인이라고 되뇌면서 보지 않았다. 그리고 선인의 목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울렸을 때 두 사람은 들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속으로 자신은 귀머거리라 되뇌면서 듣지 않았다. 잔뜩 겁에 질린 채 죽을 각오를 하고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채 앞에 있는 모든 걸 부쉈고, 결국에는…… 선인도 사라져 버렸다.
두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이보다 더 기묘하고 불가사의한 일은 없었다.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신묘 밖으로 나온 해당과 왕 십삼랑은 방금 전 신묘 안에서 자신들이 한 일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죽이 소식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한 범한이 살짝 안심하면서 흐리멍덩한 눈으로 겁에 잔뜩 질려 있는 두 동료를 바라보았다. 순간 범한은 세상일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뒤 침을 삼켜 목을 축인 범한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지자 쉰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두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