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4화 홀로 남은 사람
이런 현실은 범한을 더없이 슬프고 두렵게 만들었다. 그의 머릿속에 더는 이전의 오죽 아저씨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강렬한 슬픔에 휩싸인 그는 자신의 가슴에 쇠막대기가 박혀 있다는 사실도 잊었고, 자신이 지금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도 잊었으며, 이대로라면 자신이 곧 죽게 될 거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수만 년 동안 이 땅 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게 된 범한은 이제 더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죽을 때 자신과 더없이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더 두려웠다. 그가 절망감 가득한 눈빛으로 오죽 아저씨를 바라보다가 시뻘건 피를 토했다. 그리고는 힘없이 설원에 무릎을 꿇었다.
오죽이 천천히 범한의 가슴에 박혀 있는 쇠막대기를 뽑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범한을 본체만체하며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 오죽이 입고 있는 얇은 무명옷이 살짝 찢어졌다. 왕 십삼랑이 더는 참지 못하고 뒤에서 기습 공격을 한 거였다. 하지만 오죽은 왕 십삼랑의 공격을 너무나도 쉽게 막아버렸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맹인 오죽이 얼음이 덮인 신묘 돌계단을 올랐다. 마치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거리를 계산하는 듯 침착하고 규칙적인 발걸음이었다. 그가 신묘 안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 앞으로 걸어가 앉았다.
영혼이 없이 육체만 남은 오죽은 다시 오랜 세월을 간직한 설산 안에 감춰진 보물을 지키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저렇게 지키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수천 년이 될 수도 있었고, 수만 년이 될 수도 있었다.
무릎을 꿇고 있던 범한이 결국 눈 위에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 나온 붉은 피가 하얀 눈을 적셨다. 급히 달려온 해당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지혈을 하려고 애를 썼다. 해당은 마음속에서 치솟아 오르는 슬픔과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침착하게 행동했지만,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까지 막을 수 없었다.
오죽은 해당과 왕 십삼랑은 공격하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신묘가 보기에 범한의 동료인 두 사람은 인류 전체 이익에 손해를 끼치지 못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거였다. 게다가 신묘는 이 신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필요했다. 신묘가 두 사람을 공격하지 않은 건 바로 이러한 간단한 논리적 판단 때문이었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해당과 왕 십삼랑은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 세상에서 손꼽히는 강자였음에도 건물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맹인 대사의 모습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더욱이 해당의 경우 맹인 대사가 범한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맹인 대사가 어째서 신묘 문 앞을 지키고 앉아 있느냐였다. 하지만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그녀도 맹인 대사가 앞으로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 동안 신묘 앞을 지킬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범한이 가장 가깝게 생각했던 아저씨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대종사인 오죽은 앞으로 계속 신묘를 지킬 예정이었다. 얼마나 오래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말이다.
오죽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범한이 죽기 직전의 상태에 있는데도 아무 없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신묘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실의에 빠진 듯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해당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신묘 주변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조금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온화하면서 침착하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다시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눈이 덮힌 주변 설산은 햇볕을 받아 신비롭고 영롱한 빛을 뿜어냈다.
오죽은 멍하니 문 앞에 앉아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홀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 * *
한번 내리기 시작한 눈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고, 찬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도 적막하고 쓸쓸해졌다. 범한이 일부러 젖혀 놓은 장막 틈 사이를 통해 흩날리는 눈과 설산을 바라보며 신묘 앞을 무표정하게 지키고 있을 맹인을 떠올렸다.
그날 해당과 왕 십삼랑은 힘들게 그를 업고 대설산을 내려와 야영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심한 상처를 입은 범한은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처럼 보였지만, 두 사람의 걱정과 달리 바퀴벌레처럼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깨어난 뒤 범한은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눈이 내리는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해당과 왕 십삼랑은 범한의 심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의식을 잃은 뒤 있었던 상황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실 해당과 왕 십삼랑은 지금까지도 신묘가 범한은 죽이려 했으면서 자신들은 살려 준 이유가 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범한의 몸은 아주 허약해진 상태였다. 천지 사이의 원기가 강하게 모여 있는 지역에서 며칠 동안 명상을 한 덕분에 나아지기는 했지만, 죽기 직전까지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기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조금도 실망스럽거나 슬프지 않았다. 며칠 동안 그저 가만히 장막 밖에 휘날리는 눈보라를 보면서 자신의 몸을 조심스럽게 추슬렀다.
원래의 계획에 따르면 그들은 신묘를 떠난 뒤 아주 빠른 속도로 남하를 해야 했다. 그래야만 여름이 지난 뒤 다가올 거센 눈보라를 피할 수 있었고, 가장 두려운 백야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이 이동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은 데다가 나아진 뒤에는 계속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대설산 뒤쪽에 있는 야영지에서 조금도 남쪽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시간이 지날수록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의 미간에 드리운 근심도 점점 짙어져 갔다. 비록 신묘에서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지만, 살아서 신묘가 들어갔다가 살아서 나왔으니 이미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이룬 셈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더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물론 두 사람은 범한이 대설산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저 산 위에 있는 신묘에 범한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신비로운 위력을 가진 신묘를 상대로 자신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 뭘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해당과 왕 십삼랑은 범한이 아니었기에 신묘의 진짜 모습이 뭔지 꿰뚫어 보지 못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오죽이 소중하게 지켜온 범한을 공격한 이유가 신묘가 가진 힘이 너무나도 신성하고 강력해서 절세강자인 오죽도 거역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두 사람은 계속 이렇게 설산에 머무른들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 * *
하지만 범한은 두 사람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오죽 아저씨가 의지할 데 없이 홀로 설산에 남아 신묘 앞을 천년만년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물론 범한은 이미 오죽 아저씨의 진짜 정체를 어렴풋하게나마 추측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의 눈에 오죽 아저씨는 여전히 피붙이 하나 없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그에게 오죽 아저씨는 신묘의 사자가 아니라 누구보다 친근한 가족이었다.
범한이 기억하는 오죽 아저씨는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오죽 아저씨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마음을 가진 매정한 존재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었다. 범한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담주 잡화점의 어두운 밀실 안에서 오죽 아저씨가 꽃보다 더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걸 본 적 있었기 때문이었고, 대동산에서 상처를 치료한 뒤 오죽 아저씨가 더욱더 말이 많아지고 사람과 비슷하게 변한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죽 아저씨에게 언제부터 변화가 일어났는지 범한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수십만 년 전에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신묘의 사자가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인류 부족들을 찾아다니면서부터 변화가 시작된 건지도 몰랐다.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변화가 일어난 걸까? 오죽 아저씨는 원래 신묘 안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사자였지만, 수십만 년에 걸친 세상의 변화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서서히 신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어쩌면 오죽 아저씨의 진정으로 변하게 만든 건 수십 년 전에 세상에 출현한 꼬마 선녀였을 거였다. 정령처럼 갑자기 이 세상에 등장한 꼬마 선녀가 신묘에 나타났고, 꼬마 선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오죽 아저씨에게 급작스러운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이 점을 조사해 알고 싶지도 않았고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처음 눈을 뜨고 본 장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오죽 아저씨의 등에 업혀 있었다. 그가 눈을 뜨고 처음 본 사람은 오죽 아저씨였다.
오죽 아저씨의 등은 따뜻했다. 범한은 그의 두 눈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범한은 신묘가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 오죽 아저씨를 다시 통제했는지 알지 못했다.
‘세뇌를 한 걸까? 아니면 재부팅을 하거나 포맷을 한 것일까?’
이제 오죽 아저씨에게는 이전에 볼 수 있었던 지혜와 감정을 가진 생명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 사실에 범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비통하고 화가 났다. 그는 이런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신묘를 지키고 있는 강력한 존재는 오죽 아저씨의 육체만 가지고 있을 뿐 오죽 아저씨의 영혼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오죽 아저씨가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20여 년 전에 신묘와 황제 아버지가 서로 손을 잡고 숙청을 단행했을 때 오죽은 신묘에서 온 사자들을 모두 죽였고, 자신도 중상을 입었었다. 진평평과 오죽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때 입은 부상 탓에 그는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게 되었다.
아마도 오죽이 기억을 잃은 건 신묘가 무슨 방법을 썼기 때문일 거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죽은 몇 년 전 일은 대부분 잊어버렸어도 가장 최근 일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도 섭경미와 범한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설산에 있는 오죽은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눈꺼풀을 살짝 내린 범한의 눈동자가 순간 번쩍하고 빛났다. 그는 몸은 상당히 약해져 있는 반면 자신감과 확신을 상당히 강해져 있었다. 그는 이대로는 절대 설산을 떠날 수 없었다. 반드시 다시 신묘로 가서 오죽 아저씨를 데리고 와야 했다.
범한이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죽이 일격으로 자신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를 통해서 범한은 신묘가 오죽 아저씨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오죽 아저씨와 신묘는 완전히 각각의 개체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최소한 몇몇 이름들은 오죽 아저씨의 생명 안에 깊이 박혀 있을 거였다. 범한은 오죽 아저씨가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약간의 감정이 남아 있기어 자신을 단번에 죽이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오죽이 가진 실력을 생각하면 단숨에 범한을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죽은 범한이 살 수 있도록 놓아주었다. 이것은 바로 범한이 믿는 부분이었다. 그는 오죽 아저씨가 분명 다시 깨어날 거라고 믿었다.
* * *
아주 아주 오래전에 섭경미는 고하와 소은의 도움을 받아 신묘를 떠났다. 당시 4살이었던 그녀는 신묘에서 도망쳐 나온 뒤 장막 입구 틈 사이로 북쪽을 바라보다가 불쑥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도 너무 불쌍해.”
그리고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중상을 입은 범한은 해당과 왕 십삼랑의 도움을 받아 신묘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았고, 한숨을 쉬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히 설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불쌍한 맹인을 버려둔 채 번화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섭경미는 나중에 용기를 내어 다시 신묘에 돌아갔고, 오죽을 데리고 나왔을 뿐만 아니라 신묘 안에 있던 상자까지 훔쳐 달아났다. 범한도 반드시 다시 돌아갈 것이었다. 수십 년 전 그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그 역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마치 반복되는 시간의 굴레에 빠진 기분이었다. 다만 이런 굴레가 조금도 답답하거나 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옅은 온기가 느껴졌다.
* * *
범한이 스스로 걸어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설산 주변에 눈보라는 이미 거세질 대로 거세져 있었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다시 설산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의 어머니 섭경미가 다시 신묘로 돌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두 모자는 절대 그 사람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곳에 있는…… 그 사람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