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3화 방사능과 원기 (3)
범한이 건물 문을 향해 걸어가는 데도 어떤 이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공중에 둥실둥실 떠 있는 노인은 그냥 가만히 범한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손잡이를 잡은 범한이 고개를 돌려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섭경미의 아들이다. 그리고 여기 있던 사자들은 오죽 아저씨가 전부 죽였으니까 원래 설명하던 역할이나 잘하라고, 무슨 위대한 신선인 척하지 말고.”
잠시 뒤 범한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화를 자꾸 건들면 네 태양광 패널을 뜯어서 담주의 바닷물에 담가 버릴 거야. 그리고 네 본체를 뜯은 뒤 CPU를 가져다가 내 아들 장난감으로 만들어 버릴 거야. 그런 뒤에도 네가 과연 나를 계속 협박할 수 있을까?”
대문이 열리자 눈과 얼음뿐인 세상이 다시 나타났다. 건물에서 나온 범한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탐욕스럽게 이 세상의 진짜 풍경을 바라봤다. 방금 전 건물 안에서 봤던 두렵고 슬픈 장면들은 전부 머릿속에서 떨쳐 버린 그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큰 함성을 질렀다. 함성이 설산 골짜기에서 메아리쳤다.
그는 신묘를 구성하는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고, 모험할 생각도 없었다. 섭경미처럼 뛰어난 인물도 신묘 안에서 가장 강한 오죽 아저씨를 데려오는 데 성공했을 뿐 신묘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분명 그 당시에 그녀 스스로 내린 판단이 있었을 거였다. 더구나 범한은 섭경미를 대신해서 신묘에게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만 년 동안 이 땅에 벌어진 변화를 알게 되자 마음이 심란하고 머릿속에 복잡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범한은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신묘 어딘가에 있는 오죽 아저씨를 찾지 않는 이상 떠날 수는 없었다. 신묘는 낡고 허물어져 있었지만, 분명 어딘가 두려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을 두려워하면서도 범한이 나오기 전에 제멋대로 욕을 하고 침을 뱉은 건 신묘는 감정이 없어 자신이 한 말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의 행동에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아마도 신묘의 눈에는 범한이 그저 자신의 마음속 괴로움을 털어놓은 모습으로 보였을 거였다.
설산에서 메아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아주 빠른 속도로 건물 앞 돌계단을 스쳐 범한 앞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이 긴장과 걱정이 가득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해당와 왕 십삼랑을 본 범한이 힘겹게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이 건물 안에서 알게 된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외로운 고통과 무기력함은 자기 혼자만 누리면 그만이었다.
“찾았는가?”
범한이 왕 십삼랑을 바라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이 비로소 그의 등 뒤에 매고 있는 아주 큰 검은색 상자를 바라보았다. 순간 심장이 오그라들고 동공이 수축한 그는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깨닫고는 재빨리 소리쳤다.
“신묘 문에서 떨어져!”
* * *
“목표1을 제거한다.”
신묘의 목소리가 갑자기 온 사방에서 울려 퍼졌지만, 노인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더는 에너지를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데 낭비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더 없이 침착한 목소리가 광활한 공간에 울려 퍼지자 왕 십삼랑은 순간 자신이 등에 메고 있는 검은색 상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철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상자가 순식간에 해체되더니 검은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검은색 쇠막대기가 세상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속도로 움직이더니 그대로 정확하게 범한의 몸을 찔렀다.
범한이 몸 안을 파고드는 쇠막대기를 꽉 잡았다. 순간 입안에서 비릿한 단맛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에 난 상처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앞에 있는 누구보다 익숙한 얼굴이자 영원히 늙지 않을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눈을 가린 검은 천이 이상할 만큼 차갑게 느껴졌다.
범한은 비로소 자신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묘의 사자는 전부 다 죽어서 신묘는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범한이 잊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가 혈육처럼 가깝게 생각하는 오죽 아저씨가 과거에는 신묘에서서 가장 강한 사자였다는 사실 말이다.
오죽은 과거 신묘의 사자였고, 전설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신묘의 전설이었다.
범한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오죽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지금 일어난 일을 말하면, 제 어머니는 아마 믿지 않으실 거예요.”
* * *
왼손으로 가슴을 파고드는 쇠막대기를 꽉 움켜쥔 범한은 금속에서 전해지는 차가운 감촉을 느껴졌다. 이윽고 피가 뿜어져 나오자 그의 코와 입에서 비릿한 단맛이 느껴졌고, 몸도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바로 앞에 있는 검은색 천에는 먼지 한 톨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차분한 얼굴은 이전처럼 주름 하나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그동안의 세월이 무상하게 앳되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아주 긴 수만 년의 역사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범한이 멍하니 누구보다도 친근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는 그 얼굴에서 익숙한 분위기를 찾을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얼굴은 그가 수도 없이 많이 봐온 얼굴임이 틀림없었지만, 그는 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찾던 오죽 아저씨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앞에 있는 사람은 오죽 아저씨가 아니었다.
분명히 이 사람은 그가 찾던 사람이었지만, 진짜 그 사람은 아니었다. 20년 동안 가족처럼 함께 지낸 사람이 갑자기 완전히 낯선 사람이 되어버리는 건 정말이지 슬프고 암담한 일이었다.
* * *
범한이 왕 십삼랑이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상자를 보자마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오죽 아저씨를 찾지 말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상자를 보고 나서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을 떠올렸다. 과거 오죽 아저씨는 신묘의 가장 강력하고 가장 경험이 많은 사자였지만, 나중에 신묘에게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힌 배반자가 되었다. 오죽 아저씨는 범한이 친어머니인 섭경미를 지키기 위해서 신묘가 보낸 사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오죽 아저씨가 신묘를 다시 찾아갔을 때 신묘는 비로소 오죽 아저씨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어렵게 다시 사자가 된 오죽 아저씨를, 신묘가 왕 십삼랑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장소에 뒀을 리 없었다.
신묘는 자신이 오죽 아저씨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왕 십삼랑이 발견할 수 있는 곳에 두고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거였다. 상자를 보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범한이 왕 십삼랑에게 상자를 가지고 신묘 문에서 떨어지라고 말한 거였다. 그는 상자를 신묘에서 멀리 떨어뜨릴 수만 있다면, 신묘가 더는 오죽 아저씨를 통제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게 너무 늦은 뒤였다.
공중에 검은빛이 번쩍이면서 상자가 열리자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오죽이 왕 십삼랑에 메고 있던 상자에서 순식간에 뛰어나와 범한을 공격했다. 상자 안에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었던 오죽은 범한을 보고도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과거 섭경미과 범한을 보호했던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였다.
검은빛을 본 순간 범한은 자연스럽게 소은 죽기 전에 설명해줬던 장면을 떠올렸다. 소은은 신묘의 대문이 열리자 4살 꼬마 선녀 섭경미가 신묘 안에서 뛰쳐나왔고, 검은빛이 번쩍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고하가 그 빛과 싸웠지만, 너무 강해 상대되지 않았다고도 했었다.
범한이 오죽의 얼굴에 드리운 검은 천을 바라보며 가슴에서 전해지는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신묘가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 오죽 아저씨의 머릿속에 있던 기억을······ 전부 지워버렸을 거라고 짐작했다.
범한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뿜어져 나왔고, 안색은 순식간에 핏기없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결연했다. 그가 힘들지만, 빠르게 오른손을 들어 오죽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해당과 왕 십삼랑을 저지했다.
그는 해당과 왕 십삼랑의 실력으로는 오죽 아저씨를 상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이 상황에서 가세한다면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게다가 범한은 지금의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자신에게만 있다고 생각했다.
* * *
범한의 가슴에 박힌 쇠막대기를 따라 시뻘건 피가 연신 뿜어져 나왔다. 하얀 눈을 붉게 적히는 모습이 정말이지 참혹하고 잔인해 보였다. 하지만 범한은 당장 죽지는 않았다. 심지어 오른손을 재빨리 들어서 오죽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해당과 왕 십삼랑을 저지한 걸 보면 오죽의 공격에도 치명적인 상처는 입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죽은 단 한 번의 일격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오죽에게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도 살아 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대종사를 제외하고 오죽이 일격을 맞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범한은 지금 중상을 입은 뒤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신묘 역시도 오죽의 공격을 받고도 범한이 살아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거였다.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더니 숨이 막힐 정도로 조용해졌다. 마치 신묘를 포함한 모두가 오죽이 범한의 생사를 판단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천하 사람 중 오죽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범한이라면 할 수 있었다.
잡화점에서 오죽이 손에 들고 있던 식칼을 범한에게 준 뒤로 두 사람은 매일 훈련했다. 범한은 담주 절벽 위에서 습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매일 오죽에게 방망이로 맞으며 무술을 배웠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오죽의 방망이에 쉴 새 없이 맞은 범한은 마침내 민첩하면서 맷집이 강하게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
수천 번 수만 번 이어진 훈련을 받으면서 범한의 몸에는 푸른 멍이 지워질 날이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된 훈련 덕분이 그는 비로소 이 세계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범한은 순간적인 민첩함과 몸을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오죽의 공격 속도와 방향을 가장 잘 이해하게 되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과거 수천 번 수만 번 이어진 훈련에서는 오죽이 나무 막대기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끝이 날카로운 쇠막대기를 사용했다는 거였다. 그래서 범한은 오죽의 일격을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했지만, 치명상을 입은 건 피했다. 검은빛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찰나의 순간에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피한 덕분에 쇠막대기가 심장과 폐를 찌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갈비뼈 아래 명치에 깊숙이 들어가면서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렀다.
오죽이 머리를 살짝 숙이자 검은 천이 차가운 바람에 펄럭였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 절세강자가 사람 중에서 자신의 일격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의아함을 느끼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옆에서 보면 그는 계속해서 범한의 몸에 쇠막대기를 쑤셔 넣으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지금 일어난 일을 말하면, 제 어머니는 아마 믿지 않으실 거예요.”
이것이 일격을 맞은 뒤 범한이 피를 토하며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오죽이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무심하게 물었다.
“당신 어머니의 성이 뭔가?”
순간 한 줄기 빛이 범한의 머리에 번쩍였다. 자신이 지금 상황에서 벗어날 조그만 가능성을 본 범한이 검은 천을 빤히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제 어머니의 성은 섭씨예요.”
오죽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저씨는 제 어머니를 아가씨라고 불렀어요.”
범한은 아무 감정 없는 오죽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쓰라리고 슬퍼진 데다가 상처 부위에서는 갈수록 통증이 심해져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오죽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제 어머니의 이름은 섭경미에요. 그리고 제 이름은 범한이고, 아저씨의 이름은 오죽이에요.”
입에서 피를 흘리는 범한이 오죽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러자 가슴에 상처에서 격렬한 통증이 느껴지면서 눈앞에 깜깜해졌다.
하지만 오죽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리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죽은 과거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름들은 이미 잊어버린 상태였다. 머릿속에 기억이 지워져 버렸으니 범한이 아무리 설명해 준들 오죽은 영원히 과거의 소중했던 추억들을 기억해내지 못할 거였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오죽의 얼굴과 두 눈을 가린 검은 천을 바라보던 범한은 마치 눈앞에서 더없이 친숙했던 영혼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