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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72화 (1,072/1,108)

1072화 방사능과 원기 (2)

범한은 마음이 점점 차분해졌다. 그는 인공지능과 비슷한 존재인 신묘가 사람이 느끼는 분노나 슬픔 같은 감정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하던 그가 담담히 말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인간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규칙과 당신의 행동에는 모순이 있어 보이네요.”

“신묘는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인류 문명의 발전을 강제로 막은 적도 없다. 우리는 그저 과정을 수정하려고 시도할 뿐이다. 하지만 만약 외부에서 온 힘이 강제로 이 과정을 가속하려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저지할 것이다.”

신묘의 침착한 목소리가 조용한 건물 안에 울렸다.

그 말을 들은 범한은 처음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곧이어 웃기 시작했다. 몸이 좋지 않아 목이 잔뜩 쉬어 있는 탓에 웃음소리도 굉장히 메말라 괴상하게 들렀다. 게다가 범한은 갈수록 격렬하게 웃더니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광활한 건물 안에 그의 거친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눈가에 눈물이 고일 때까지 웃은 범한이 배를 감싸 쥔 채 뒤로 벌렁 넘어졌다.

매끈한 거울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하고 안정적이었다. 신묘는 수상하고 괴이한 여행객이 장엄한 장소에서 제멋대로 뒹굴면서 웃는 데도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상대가 말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범한이 마침내 웃음을 멈췄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는 그는 방금까지 미친 듯이 웃었던 것과는 다르게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건물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은 자신을 습관적으로 신묘라고 말하는군요. 아무래도 몇십 만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정말 자신을 신이라 생각하게 됐나 봐요.”

신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공중에 떠 있는 거울이 범한의 머리 위로 날아가서는 다시 이전 세상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 참혹했던 광경을 보여주었다. 다만 하늘과 땅의 변화를 보여주고 생물들의 죽을 보여줬던 이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돌이킬 수 없는 재난 앞에서 괴로워하며 발버둥을 치다가 죽어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장면을 본 범한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신묘가 이러한 화면을 통해서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고 두렵게 만드는 소리 없는 화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은 그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만둬요. 무슨 진짜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면서.”

공중에 떠 있던 거울의 화면이 점점 멈추더니 광택이 사라졌다. 평평한 족자처럼 양쪽 끝에서부터 조금씩 말리더니 불에 탄 시체들을 보여주던 화면이 사라지고, 다시 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반복한다. 나는 수호자이지 신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신이 아니라면, 어째서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겁니까?”

범한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오랜 시간 대화를 한 데다가 과거에 일어난 참혹한 장면을 통해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을 알게 되면서 심리적으로도 상당히 힘든 상태였다. 그가 양손을 깍지껴서 머리에 베고 침착하게 자신의 위에 떠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인류의 문명을 창조해냈고 지금까지 인류의 발전을 통제해 왔습니다. 이런 행동은 도대체 뭘 근거로 한 있는 겁니까?”

“신묘는 네 가지 규칙을 정했다.”

범한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은 습관적으로 자신을 신묘라고 칭하고 있어요. 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을 신묘라고 부르는 건 건 납득이 되지 않는데요.”

신묘의 선인이 범한의 말은 무시한 채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첫 번째 규칙, 신묘는 인류를 해쳐서는 안 된다. 또 인류가 다치는 걸 그냥 보고 있어서도 안 된다. 두 번째 규칙, 신묘는 인류의 모든 명령에 복종한다. 하지만, 첫 번째 규칙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 규칙, 신묘는 자신의 안전을 도모해야 하지만 첫 번째, 두 번째 규칙을 위반해서는 안 된······.”

신묘의 목소리를 듣던 범한이 다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신묘의 세 가지 규칙이 왠지 귀에 익숙하게 들렸지만, 그가 기억하는 어떤 규칙과는 약간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았다.

“제0규칙, 신묘는 반드시 인류의 모든 이익이 손상을 입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다른 세 가지 규칙은 모두 이것을 전제로 성립된다.”

범한은 한참 동안 생각한 끝에 신묘의 규칙이 귀에 익숙한 이유를 알았다. 신묘가 말한 규칙은 이전 세상에서 보았던 소설이나 영화에서 로봇들이 지키는 법칙으로 무수히 많이 출현했던 내용이었다. 이 순간 그는 갑자기 오랫동안 떠올리지 않았던 일이 기억났다. 예를 들면 그 검은 수염이 멋지던 남자나 그 남자보다 더 멋있었던 로봇 말이다.

아무래도 범한은 죽은 뒤 오랜 이후의 세상에 다시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인류에게 영향을 끼쳐온 신묘는 어느 정도까지 발전해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세 가지 규칙을 실제 현실에 적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자신이 과거 소설에서 봤던 장면이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모습을 보면서도 신기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서늘해지면서 약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그건 신묘가 마지막으로 말한 제0규칙 때문이었다.

‘인류의 모든 이익이 손상을 입지 않도록 보호한다고? 신묘는 규칙 중에서 제0규칙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가?’

언뜻 듣기에는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규칙처럼 들렸지만, 범한은 이 규칙에 상당히 심각한 위험이 있음을 알아챘다.

가장 우선시되는 제0규칙 덕분에 신묘는 은밀하게 인류 문명의 발전을 통제할 수 있었고, 세상일에 관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묘에서 도망친 섭경미를 계속 감시했고, 심지어는 제1규칙과 제2규칙을 위반하면서까지 황제 아버지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 섭경미를 세상에서 없애 버렸다.

제0규칙에서 가장 핵심적이면서 가장 두려운 부분은 인류의 모든 이익이라는 부분이었다. 문제는 인류 전체의 이익이 뭔지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는 거였다. 인류 전체의 이익이 원지 누가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세상의 환경이나 어떤 사회의 조직이 인류 전체 이익과 부합하다고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다만 신묘 입장에서는 지금의 세상이 만일 이전의 길을 따라서 조금씩 발전을 거듭한다면, 언젠가는 문명 발전의 정점에 이르게 될 거였고 화약 무기보다 더 강력하고 치명적인 무기가 출현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다시 이전처럼 자멸하게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묘가 말하는 인류의 전체 이익과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발전된 기술은 하루 종일 힘겹게 농사를 지어도 겨우 입에 풀칠하는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한 백성들이나 살기 위해서 자식까지 팔아야 하는 비참한 유랑민들의 생활을 더 좋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신묘는 기술이 발전된 세계가 출현하는 걸 영원히 막겠다는 것인가? 범한은 기술만이 인류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전 세상에서 21세기에 발전된 기술을 가졌던 사람들의 삶이 17, 18세기에 낙후된 기술을 가졌던 사람들의 삶보다 훨씬 풍족했고 행복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인류의 모든 이익? 이 얼마나 모호하고 황당무계한 기준이란 말인가? 설마 모든 걸 감정 없이 계산만 하는 살아 있지 않은 존재가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모든 걸 판단하겠다는 말인가?’

범한의 안색이 점점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해갔다. 그가 한참 동안 자신의 머리 위를 둥실둥실 떠다니는 노인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인류 전체의 이익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노인도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대답을 했다.

“신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신묘는 인류가 가서는 안 되는 길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지난번에 남쪽에서 등장한 신묘의 사자가 이동하면서 무고한 백성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세 가지 규칙이 제대로 지켜진다면, 이런 상황이 발생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범한이 노인을 바라보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인류 전체의 이익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위해서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거지요? 당신은 이게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르는 겁니까?”

“신묘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단을 가지고 있다. 이건 일종의 통계 수치에 따른 판단이다.”

“인류 전체의 이익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위해서 당신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거지요? 당신은 이게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르는 겁니까?”

노인이 조금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신묘는 인류가 이전 길을 답습하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 없다.”

“제가 당신에게 고마워해야 할까요? 아니면 욕을 해야 할까요?”

두 손을 짚어 차가운 바닥에서 일어나 앉은 범한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

“그 개 같은 제0규칙을 누가 세운 겁니까?”

“제0규칙은 개가 아니다.”

신묘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범한의 비꼬는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신묘가 깨어났을 때 이 규칙은 이미 존재해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제0규칙 때문에 그녀를 죽인 거군요.”

안색이 창백해진 범한이 마르고 갈라진 입술을 살짝 벌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터무니 없는 규칙 때문에 당신들은 그녀를 죽였어. 당신들이 그녀를 죽였다고······.”

“당신들이 그녀를 죽였어!”

범한의 눈동자에서 아주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그가 멍하니 공중에 떠 있는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슬픔에 사무친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노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하고 담담했다.

“신묘는 반드시 인류의 모든 이익이 손상을 입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신묘는 범한에게 섭경미에게 일어난 일들을 설명해 주기 위해 규칙을 반복해서 말하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노인은 이어서 범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희 세 명의 여행객을 신묘의 신도이자 신묘의 사자로 받아들이려 한다. 하늘의 뜻을 받아 드넓은 세계로 나가 대륙의 유민을 보호하라.”

이 말을 하는 신묘의 말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무래도 신묘의 프로그램이 스스로 신선과 같은 웅장한 말투를 고안해 낸 것 같았다. 하지만 범한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음에도 신묘의 반응은 여전히 융통성이 없이 틀에 박혀 있었다.

노인은 선포를 하고 나서야 앞에 앉아 있는 청년이 일반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떠올린 듯 추가로 말을 덧붙었다.

“신계의 동행자야, 제0규칙을 기억하거라.”

이어서 노인은 침묵에 빠졌다. 불빛이 응결된 화면의 빛깔이 계속 변하는 게 마지막 판단과 사고를 진행하는 것 같았다. 잠시 뒤 노인이 말했다.

“제0규칙을 지키기 위해서 너는 신묘를 떠나서는 안 된다.”

* * *

이 세 가지 말은 신묘의 사고 과정이 세 단계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범한을 신묘의 사자로 임명을 하더니 다음에는 범한에게 제0규칙을 따르라고 경고를 했고, 마지막에는 범한을 신묘에 가두겠다고 선포했다.

세 말을 모두 들은 범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하는 모습이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늙어 죽을 때까지 눈과 얼음만 있는 신묘 안에서 갇혀 살 수는 없었다. 그건 절대 좋은 삶이라 할 수 없었다. 물론 신묘에는 식물과 같은 걸 길러서 먹을 방법은 있을 거였다. 비록 신묘의 에너지가 약해진 흔적이 곳곳에서 보이기는 했지만, 생존은 가능해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섭경미가 이곳에서 몇 년 동안 갇힌 채 살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섭경미는 고작 4살의 나이에 고하와 소은의 도움을 받아 신묘에서 도망쳐 대설산을 떠날 수 있었다. 하물며 범한은 지금 두 명의 동료가 조용히 밖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더욱 쉽게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덤덤한 눈빛으로 공중에 떠 있는 노인을 바라보는 범한은 눈빛은 이전과 어딘가가 달라져 있었다.

범한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대를 모욕하거나 협박하는 건 정정당당한 싸움 방식이라고 할 수 없지. 게다가 당신 같은 생명이 없는 사물이니 화낼 줄도 모를 것 같군.”

범한이 잔뜩 쉰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당신의 위협은 나한테 아무런 소용도 없어. 하지만 왜인지는 당신에게 욕을 퍼붓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군.”

범한이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거지 같은 놈.”

범한이 침을 노인에게 뱉자 그의 옷깃을 통과해 땅에 떨어졌다.

이어서 그가 엉덩이를 털고는 몸을 돌려 대문으로 걸어가면서 노인을 향해 말했다.

“당신은 반딧불이 신세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당신과 몇 마디 해서 체면을 세웠으니 내가 뭘 하려 하든 상관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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