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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71화 (1,071/1,108)

1071화 방사능과 원기 (1)

오랜 역사를 지닌 산이 있었고, 그 산 안에는 사원이 한 채 있었다. 그 사원 안에 있는 사람은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전에 산이 있으면······.’ 만약 신묘 안에서 범한의 경험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천하 각지에서 간절히 그가 살아 있기를 바라거나 죽었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여러 겹의 거미줄을 씌운 뒤 죽음으로 몰고 갈 거였다.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재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인류는 과거의 흔적을 따라 무미건조한 발전을 반복하지 않았다. 문명의 불꽃이 완전히 사그라진 뒤 다시 일어난 인류는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일 수 없었다. 설령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전의 문명을 간직하고 있는 신묘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맹인 사자를 통해서 끊임없이 인류에게 문명의 씨앗을 전해 줬음에도 말이다.

두 세계를 두루 경험한 범한은 두 세계의 가장 분명한 차이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시 태어난 이후 20여 년을 살면서 매일 부지런히 패도 공결을 수련했고, 최근 한 해 동안에는 천지 사이에 충만한 원기를 깨닫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인류는 마치 다른 식으로 진화를 거듭한 것 같았고, 체내에 있는 경맥은 이런 변화의 증거였다.

만약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원기와 인간 체내의 정기가 본질적으로 같은 거라면, 수십만 년 전에 일어난 대재난이 세상에 남긴 흔적이자 많은 생물이 죽은 재난 속에서 대자연이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어째서 이러한 흔적이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건지 궁금했다.

신묘 안 선인의 목소리로 설명하자면, 그것은 아마도 생물들이 살기 위해 환경에 적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적응 과정에서 환경과 균형을 맞추고 그 속에서 이익이 되는 점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생명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강력한 생존 본능이나 적응력과 같은 특징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범한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허공을 한참 동안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멍하니 앉아 있는 그는 계속해서 문명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항상 문명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명의 불꽃은 약해질 수는 있어도 절대 사라질 수는 없으며, 영구불변하게 타오를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신묘의 선인이 보여준 과거를 보면 문명은 사실 너무나도 약해서 쉽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문명이 너무나도 약한 건 사실이지만, 한번 불길이 일면 무엇보다도 화려하고 강인하게 타오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인류가 바뀐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듯이 식물들도 다시 이 땅 위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했으며, 동물들도 환경에 적응해 종족을 퍼뜨리며 번식했다. 범한이 두 눈을 꽉 감고 다시 태어난 뒤 보고 들었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다시 눈을 뜬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인류든 식물이든 동물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들은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원기에 영향을 받았음에도 많은 변이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한 그는 적잖게 놀랐다.

이제 보니 방사능이 생명에 치명적인 위협을 주는 두려운 존재임은 틀림없지만, 아주 오랜 시간 천천히 적응하면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모양이었다.

* * *

신묘 안에 들어온 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과거의 이야기에 넋을 놓고 있던 범한이 마침내 감정을 추슬렀다. 이때 신묘 공중에 떠 있는 평평하고 매끄러운 거울에는 대동산 화면이 아닌 다른 각양각색의 생동감 넘치는 화면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밀림 안에서 숨을 죽이고 사냥감을 쫓은 사냥꾼들, 화창한 날 밭에서 즐겁게 일하는 농부, 개울가에서 오순도순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빨래를 하는 아낙들, 갓 돌을 넘긴 아이가 온돌바닥에서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는 모습 등과 같은 일상의 장면들이었다.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소박한 집도 보였고, 여러 집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나 발전된 도시나 궁전의 모습도 보였다.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피비린내 나는 잔인한 전쟁의 장면도 보였다.

천천히 바뀌던 화면에 무예를 수련하는 수행자들의 모습도 나타났다. 연꽃 좌대 위에 앉아서 명상하거나 산봉우리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들은 오랜 시간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밖에서 잠을 잤고,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는 힘겨운 수련을 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방법을 알려달라 요청하기도 하고, 고개를 숙여 바다를 굽어보며 나아갈 길을 알려달라 묻기도 했다. 자신 내면의 마음을 돌아보고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원기를 깨닫고 흡수하며 체내에 있는 혼탁한 기운을 내뱉은 끝에 마침내 어느 날 세상에 무예가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다.

* * *

“그만, 됐어요······.”

범한은 어린 시절부터 감찰원이 교육으로 정신력을 강인하게 다져놓은 덕분에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놀라운 진실을 보면서도 스스로 조물주가 되거나 신선이 된 것 같은 우월감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세상에 일어난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을 알고 나자 머리가 어지럽고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가 씁쓸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거울을 향해 쉰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사실만 말해줘요. 무공 비결 같은 것들은 원래 이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수련해서 깨달아 만들어낸 것들이지요? 그렇다면 어째서 신묘 안에 무공 비결들이 보관되어 있던 거죠? 신묘가 무공 비결처럼 무섭과 위험한 영향을 지닌 걸 보관한 이유가 뭐예요? 이곳에서 훔친 책 두 권으로 인해서 세상에 대종사들이 나타났잖아요.”

범한은 신묘가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마른기침을 하며 계속 물었다.

“당신은 이미 제가 어떤 배경을 가진 사람인지, 제 정체가 뭔지 진작에 파악하고 있었던 거죠?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면서 신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라든지 신선들이 벌인 일이라든지 하는 쓸데없는 말을 한 이유는 뭐예요?”

한참 동안 조용하던 신묘 안에 다시 침착하면서 온화한 목소리가 들렸다.

“신묘는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세상을 관찰해 왔다. 우리는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뒤 이류가 가진 생물 특성을 종합하고 수정해왔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몇 가지 방면에서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범한의 친어머니인 섭경미가 훔쳐 가지고 온 신묘 안에 보관되어 있던 무공 비결은 사실 이런 내력을 가지고 있던 거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었다. 무공 비결은 아주 고명한 식견을 가진 어느 한 사람이 만들어낸 게 아니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유파의 심법을 종합하고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방대하게 자료들을 수집해서 연구한 끝에 만들어낸 것이었다. 세상에서 신묘 말고 누가 이처럼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정밀하고 세심한 연구를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이미 세상에 유용한 방법들을 많이 전해주었어요.”

거울 화면을 통해 본 장면들은 실제로 이 땅에 일어난 사실들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이전 세상의 유적이라 할 수 있는 신묘가 새로운 세상에 문명이 싹틀 수 있도록 지혜를 전달해준 노력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묘는 과거 문명을 모두 잃어버려 다시 미개해진 인류에게 직접 사자를 보내 지혜를 전달해주었어요. 덕분에 인류는 대적하기 어려운 거대한 짐승들도 쉽게 상대할 수 있게 되었지요. 신묘는 오랜 시간에 걸쳐 사자를 인류에게 보내 자연에서 생존할 수 있는 많은 기술을 전수해 주었죠······. 그런데 어째서 무공 비결은 직접 인류에게 전해 주지 않은 걸까요? 신묘는 인류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수 없이 많은 정보를 보관하고 있으면서 전달하기는커녕 숨겨왔잖아요. 그런 이유가 뭐죠?”

거울을 향해 질문을 끊임없이 내뱉던 범한은 자연적으로 자신의 친어머니인 섭경미를 떠올렸다. 신묘와 섭경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고, 그녀의 죽음에 신묘가 분명 어떠한 역할을 한 게 틀림없었다. 섭경미가 신묘 안에서 훔쳐 간 공결이나 황실 금고에서 생산하는 물건들은 지금 인류 사회의 발전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범한은 자신의 심장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걸 느끼면서 앞에 있는 거울을 향해 잠긴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게다가 당신들은 스스로 세운 규칙까지 어기면서 그들을 추격해 죽이려 했어요.”

“그들이 아니었다. 죽이고 싶었던 건 단 한 사람이었으니까.”

신묘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신묘는 가지고 있는 자료와 그동안의 대화를 분석했음에도 범한에 대한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신묘의 답변은 이전과는 다르게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우리는 수호자이다. 우리는 인류 문명의 마지막 씨앗이 다시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지켜주어야 한다. 우리는 재난에서 살아남은 인류가 다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지켜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사명이다.”

신묘의 목소리가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신묘는 세상에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전달한다. 예를 들어 물을 이용한 수력이나 벼를 심어 농사를 짓는 기술이나 무예 지식과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기술이나 지식은 전달하지 않는다. 세상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절대 시도하지 않는다.”

가만히 듣고 있던 범한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수호자일 뿐이지 통제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들이 만들어낸 신묘라는 그림자는 인류의 머리 위에 너무 오래 드리워 있었어요. 게다가 당신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이 구상한 세상을 현실화시켜서 당신들이 생각하는 완벽한 세계를 만들려 했죠.”

범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계속 말했다.

“1천 년 동안. 북위가 세워지고 1천 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 세계는 어떤 본질적인 발전을 하지 않았어요. 정체되어 있었던 거죠.”

범한의 말에 신묘의 목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처음으로 질문을 했다.

“이게 좋지 않단 말인가?”

* * *

이게 좋은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를 누가 감히 명확하게 판단해 말할 수 있을까? 다만 머리 회전이 빠른 범한은 신묘의 말을 통해서 한가지 확실성 높은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아무래도 이전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적이라 할 수 있는 신묘는 어떠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이전 세상을 완전히 파괴한 엄청난 재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신묘가 자주적으로 사고를 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신묘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감시하면서 인류 사회가 더 높은 단계의 문명으로 발전하는 걸 막아온 건 확실해 보였다. 신묘가 발전을 막아온 이유는 아마도 지금의 인류가 이전 세상이 걸어갔던 길을 따라 나아간다면 다시 자멸하게 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거였다.

하지만 섭경미의 등장으로 이 세상은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되었다. 그녀가 알려준 기술과 지식은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다. 이건 의심할 여지 없이 신묘가 정해놓은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신묘는 인간 세상에서 경제와 접촉해 섭경미를 죽이고 그녀와 관련된 모든 걸 없애버리려 한 것이었다. 다만 신묘의 사자가 계속해서 오죽과 싸우다가 죽는 바람에 수가 줄어들었고, 이에 신묘는 이 상황을 해결하거나 통제할 힘이 없었다.

경제는 섭경미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남긴 황실 금고를 없애지 않고 계속해서 운영했고, 섭경미의 핏줄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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