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0화 과거의 이야기 (2)
웅장하거나 아름답거나 정밀하거나 소박하거나 예스럽거나 누추한…… 온갖 건물들이 즐비한 그 세계는 짚으로 엮은 건물이나 돌과 나무로 지은 건물이 즐비한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 세계의 사람들은 조물주의 어떤 비밀을 파악해 내는 데 성공했고 결국 세상을 파멸시킬 엄청나 위력을 가진 살상 무기를 만들어 그것을 자신들의 머리 위에 던지고 말았다. 그 엄청난 위력에 세상을 파멸시킬 재난을 겪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일이란 말인가.
고온에 시멘트와 철근이 녹아 내렸고, 충격에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 부서져 버렸다. 세상을 휩쓴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선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모든 게 불타고 말라 버리자 폭우가 내리면서 홍수가 찾아왔고, 이후에는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면서 서리가 내리더니 끝없는 눈보라가 몰아쳤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쉼 없이 휘날리는 눈발이 모든 걸 덮어버렸다. 휘황찬란했던 과거의 영광들은 눈 속에 파묻혔고, 과거에 존재했던 종족의 흔적이나 아름다웠던 문명의 흔적도 모두 사라졌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눈보라가 휘날리는 장면만 보이던 화면 속에서 어렴풋하게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문명은 모두 사라지고 생존 본능만 남은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죽였다. 재앙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문명 속 인간이 가장 외면하고 지우려 했던 동물의 본성만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범한은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화면을 빠르게 이동시켰다. 그는 타임머신 같은 거울 앞에 앉아 이전 문명이 몰락하는 모습을 보았고, 또 이전 문명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불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불꽃이 미개한 인류에 의해 꺼져가는 모습도 보았다.
그는 재난 속에서도 가까스로 모습을 유지한 고층 건물이 눈과 얼음만 남은 세상 속에서 점차 눈보라에 의해 침식되는 모습을 보았다. 눈과 얼음에 부서진 문명의 파편들은 잡초에 가려졌고, 나중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의 힘에 굴복해 암석과 자갈처럼 자연으로 돌아갔다. 기존의 문명의 모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범한은 짐승 가죽을 입은 사람들이 동굴 안에서 원시인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고, 짚으로 움막을 만드는 모습이나 뼈로 화살이나 창을 만드는 모습을 보았다. 이들은 말이나 문자까지 잊어버린 상태였다.
이전 세계에서 쌓아 올린 모든 게 무너진 뒤 사람들은 느리지만 꾸준히 새로운 세상을 개척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전에 범한은 문명이야말로 가장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문명은 어떤 시련이나 공격을 받아도 아주 작은 불꽃만 남아 있다면 다시 활활 타오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거울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을 바라보자 그는 비로소 문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깨달았다. 사람들은 문명을 증명할 수 있는 물질세계가 무너지면 너무나도 쉽게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말았다.
화면이 스쳐 지나가는 건 찰나에 불과했지만, 실제로는 수백 수십 만년의 시간을 보여주는 거였다. 세상에는 과거의 휘황찬란했던 모습들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범한의 눈앞에서 이 모든 게 일어났다. 바닥에 앉아 붉게 충혈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던 그가 두 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 깜짝하는 순간에 천년의 시간이 지났고, 모든 게 그대로인 와중에 화면에서는 만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정말 시간이 쉴 새 없이 흘러갔다. 세대가 바뀌고 땅 위에 모습들이 변하는 장면들이 펼쳐졌다.
그는 과거 해변이 비옥한 땅으로 변하는 걸 보면서도 수없이 많은 동물 사체들의 양분이 되어 비옥한 땅이 되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 재앙 속에서 죽어간 사체들은 새로운 생명이 싹트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또 화산 활동이 잠잠해진 뒤 조용해진 초원에 다시 생기가 도는 모습도 보았다. 홍수의 위협에서 벗어나자 동북 방향에서 원시 부족이 와서는 힘겹게 야생 동물들을 몰아내고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북쪽 설원에서 온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맹인이 원시 부족을 찾아왔다 왔다. 이후 사람들은 그를 사자라 불렀다.
북쪽 설원에서 온 사자는 부족 사람들에게 그물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줬고, 부족민들은 사자가 온 북쪽은 신성시했다.
이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북쪽 설원에서 다시 사자가 와서 이번에는 줄에 매듭을 지어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줬고, 부족민들은 신의 은덕을 칭송했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북쪽 설원에서 다시 사자가 와서 문자를 알려주자 부족민들은 제단을 세우고 절벽 암석에 그림을 그려 신묘의 은총을 칭송했다.
* * *
범한이 머리를 무릎 사이에 넣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격해진 호흡으로 그의 등이 쉴 새 없이 들썩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는 마침내 장면에서 본 장면들을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했다. 그가 자신이 새로 태어난 곳이 지구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이 세계에서 사용하는 문자가 자신의 이전 세계 문자와 똑같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이 세계의 문자는 오랜 시간 복잡한 변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완전한 문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던 것 같았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사라졌는데, 어째서 당신은…… 아니 신묘는 계속 존재할 수 있었던 겁니까?”
범한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그는 대재난이 발생한 건 자신의 죽은 뒤가 맞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신묘의 건축 양식을 볼 때 약간 낯선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그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발전된 과학 기술로 지어진 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평평한 거울에는 여전히 원시 부족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삶이 펼쳐지고 있었다. 부족 사람들이 황량한 땅을 개간하기 위해 쏟아부은 엄청난 희생과 노력을 보여주었다. 수십만 년 동안 이어진 추운 겨울을 버티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과거의 모든 일을 잊어버린 채 미개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지만, 어쨌든 한번 진화를 경험한 인류였다. 이에 마침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되자 이들의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지혜가 폭발했다. 더욱이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북쪽 설원의 사자는 나타날 때마다 부족민들에게 신묘의 은택을 가져다 주었고, 인류의 사회 문명이 더욱 빨리 발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가속 페달을 밟은 것처럼 거울 안에 화면이 아주 빠른 속도로 변화했다.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이어지는 문명의 흥망성쇠를 거치지 않고 짧은 시간 만에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인류의 문명이 어느 정도 발전하자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북쪽 설원의 사자는 더는 인류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세상을 왕래하는 사자와 사자에게 지혜를 전수 받은 하늘의 자손이 맡게 되었다.
범한이 질문을 했을 때 거울 화면은 산봉우리에서 멈춰 있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미친 듯이 부지런히 산에 돌계단을 놓고 돌과 나무를 산봉우리로 옮겨 사원을 건설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바닷가에 서 있는 거대한 산봉우리는 한쪽 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었는데, 절벽은 마치 청옥처럼 반질반질했고 동해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범한에게는 너무 익숙한, 직접 손으로 기어 올라갔던 대동산 절벽이었다.
신묘의 목소리가 다시 주변에서 울렸다. 여전히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진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박물관이 본연의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운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하늘이 보우하신 거지.”
그렇다. 하늘이 보우했다는 말이나 운이 좋았다는 말 외에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수십만 년 전에 존재했던 문명의 유적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설산 안에 보존된 이유를 다른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전 문명의 흔적이 은밀하게 세상에 남은 사람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그들이 발전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었던 이유를 다른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오랜 시간 녹지 않고 유지된 눈과 얼음이 시간의 위력과 대자연의 흐름 속에서 신묘를 지켜줬을 거였다. 그렇기에 이 웅장한 건축물이 장구한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는 거였다.
신묘가 태양에너지를 사용하는 것도 아마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일 거였다. 다만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전쟁이 세상에 극심한 충격을 줬다고 해도 지구 전체에 재앙을 일으킬 수는 없을 거였다. 설마 지구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어 재앙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범한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속에 온갖 감정이 격렬하게 일어나서 도무지 이성적인 생각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화면 속에서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맹인 사자와 대동산의 절벽이 등장하자 입이 바짝 마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화면에 등장한 장면들이 모두 진짜라면, 오죽 아저씨는 뭐가 되는 거지? 지금 인류 사회를 만들어낸 선각자가 되는 건가? 아니면 스승이 되는 건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함께 살아온 오죽이 원래는 살아 있는 전설적 존재였다는 생각이 들자 범한은 몸이 떨려왔다. 도무지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전 시대의 흔적이 남은 곳이 이곳뿐일리는 없잖아요.”
범한의 쉰 목소리가 떨려서 기괴하게 들렸다.
“이건 말이 되지 않잖아요.”
“시간이 이미 사실임을 증명해주었다. 나는 수십만 년 동안 꾸준히 다른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무척이나 차분한 신묘의 목소리가 범한의 귓가에 울렸다.
“내가 지금까지 존재하면서 인류를 도와야 한다는 사명을 계속 실행해 나갈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수십만 년 동안 사자들이 계속해서 신묘를 수리해줬기 때문이다. 다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자들도 점점 소모되어 버렸다.”
신묘는 안타깝다고 말하면서도 말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범한이 두 눈을 감고 한참 동안 깊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거울에 비친 대동산과 점점 완공되어가는 사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을 가본 적이 있어요. 왜 사자를 통해서 저곳에 사원을 지으라고 명령한 거죠?”
배를 타고 대동산을 지나갈 때마다 범한은 신이 검으로 갈라놓은 듯한 절벽을 보면 마음이 떨렸다. 대동산의 옥색 절벽은 세상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진귀한 광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절벽을 볼때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거라면 얼마나 강한 힘이 필요했을지를 계산해 보곤 했다.
그리고 범한이 가장 궁금했던 건 오죽 아저씨가 어째서 대동산에 가서 상처를 치료했냐는 거였다. 그리고 황제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 대종사들과 싸울 최후의 장소로 대종산을 선택했던 걸까?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범한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중에 신묘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울려 퍼졌다.
“그곳은 전쟁이 시작된 장소이다. 인류가 만든 살상 무기들이 그곳에서 격렬하게 충동했고, 그 엄청난 폭발력은 결국 인류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마지막 흔적이 바로 가지런하게 잘려 나간 옥색 절벽이다. 강한 열기에 과거 도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산도 절반이 녹아서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범한이 두 눈을 꼭 감자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오늘에야 그는 비로소 이 비밀을 알게 되었다. 대동산은 아주 오래전 전쟁이 시작된 장소였다. 충격에 산맥이 모두 사라지고 바닷가에 외로운 산봉우리 하나만 남게 되었고, 암석이 고온에 녹아 새파란 옥벽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정말이지 상상만으로도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대동산에 방사능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거군요. 천지 원기가 가장 강한 곳이 된 이유가 바로 이거였어…….”
범한의 쉰 목소리로 자신의 추측을 말하기 시작했다.
“만약 제 판단이 맞았다면, 사람을 죽이는 방사능이 어떻게 천지 사이의 원기가 될 수 있는 겁니까? 만약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이전 시대 인류가 남긴 후손이라면, 어째서 이들의 몸 안에는 경맥과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 겁니까?”
“그건 인류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동물이자 가장 총명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신묘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