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9화 과거의 이야기 (1)
어둠이 드리운 땅은 거센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었고, 짙은 남색 바다도 불길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었으며, 끝이 없이 펼쳐진 하늘도 타오르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 죽어 있는 것 할 것 없이 천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불길에 휩싸였다. 세상은 안에 있는 모든 연료를 동원해 온 세상을 불태우려는 것 같았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분출된 용암이 모든 걸 녹이며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용암이 바닷물을 증발시키면서 엄청난 연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바다에서 일어난 엄청난 높이의 파도는 거센 불길에 기괴한 모습으로 녹아 내려버린 대륙을 쉴 새 없이 때렸다. 모든 걸 다 태워버릴 것 같은 치명적인 불과 열기로 가득한 세상의 모습에서 멸망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땅 위에 있는 동물들이 처량한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쳤지만,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이곳저곳 썩어서 하얀 뼈가 드러난 사체들이 즐비했다. 모든 걸 집어삼킬 듯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와 불길은 저승에서 온 원혼처럼 죽음만 남겼다. 절망이 모든 걸 집어삼킨 세상에서 도망칠 곳은 없었다. 불타는 숲을 피해 멀리 도망친 동물들은 초원 깊숙이 굴을 파서 열기를 피하려 했지만, 모든 생명을 앗아가는 멸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바다 안에 있는 생물들도 불안해하며 살기 위해 발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다 생물들은 해저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치명적인 열기와 독성을 가진 가스를 피하려 죽기 살기로 노력했다. 차가운 바닷물 안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포유동물들은 바닷속 위험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데일 듯이 뜨거운 공기와 독소를 가진 연기를 흡입해야 했다.
한편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은 하늘에서 피어오르는 눈부신 불꽃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기 위해 쉼 없이 날갯짓을 하며 대륙의 양 끝으로 날아갔다. 예민한 생존 본능을 가진 동물들은 인간들이 없는 곳으로만 갈 수 있다면, 생존이 가능한 최후의 피난처를 찾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계절과 상관없는 오로지 살기 위한 대규모 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모든 새들이 이동에 성공한 건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의 새들이 날아가던 도중에 죽었고, 메마른 땅 위에 떨어졌다. 아주 극소수의 새들만이 모든 걸 태우는 뜨거운 불꽃과 독성을 지닌 검은 연기를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온 세상을 뒤덮은 불길은 점점 잦아들었지만, 하늘 가득 피어난 먼지와 구름은 무정하게도 태양마저 가려버렸다. 푸르던 풀과 나무들은 이미 색깔이 변해버렸고, 운이 좋게 살아남은 동물들은 작은 물웅덩이 주변에 모여서 유일하게 깨끗한 물을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게다가 물웅덩이 안에는 30여 마리의 악어들이 엎드려 있었다. 작은 연못 주변에 모여든 동물들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육식 동물인 악어에게 잡혀먹힐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하늘에는 새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고, 바닷속 생물들은 겁에 질려 산호초 안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먹잇감을 찾아 돌아다니던 상어들은 낯선 상황에 당황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하는 건지,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안함 속에서 십여 마리의 거대한 향유고래가 지친 모습으로 수면 위를 오르락내리락했고, 가끔은 힘없이 꼬리를 들어 해수면을 치기도 했다. 해안에서 더욱 멀리 떨어진 작은 섬 주변에서는 바다사자들이 하늘을 향해 분노 섞인 비명을 외쳤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서로를 참혹하게 물어뜯기도 했다.
작은 물웅덩이 주변에 모여 있던 동물들이 하나둘씩 죽어갔다. 서로 싸우다 죽기도 했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검은 연기를 마시고 죽거나 굶어 죽거나 목이 말라 죽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물웅덩이의 물을 마시고 죽었다.
공기는 모든 걸 태울 듯이 건조했고, 작은 물웅덩이 주변에는 무수히 많은 하얀 백골만 남게 되었다. 어떤 건 컸고, 어떤 건 작았다. 어떤 건 잔뜩 웅크린 모습이었고, 어떤 건 놀라 엎드린 모습이었다. 뼈들에 붙어 있던 살과 근육은 이미 흙으로 돌아갔고, 하얀 백골만 주변 곳곳에 나뒹굴었다. 작은 물웅덩이에 남아 있는 건 강인한 생명력으로 수천만 년 동안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은 파충류뿐이었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작은 물웅덩이에 고여 있던 물이 모두 말라 버리자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거대한 악어는 타는 듯한 열기를 피해 진흙을 파고 들어갔다. 그렇게 천천히 말라 죽은 악어의 몸은 서서히 부패해 결국 거대한 백골로 변해 버렸다.
하지만 모든 파충류가 죽은 건 아니었다.
공기는 여전히 치명적인 독소들로 가득했고, 세상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대기에 따라 움직이는 두꺼운 먹구름을 제외하면 움직이는 다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바다의 상황은 육지보다 더욱 참혹했다. 과거 따뜻한 해류와 북부 차가운 해류가 만나는 지점에서 살아가던 수많은 어류, 바다 안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던 고래와 같은 대형 포유류들, 육지와 바다를 오가며 살았던 바다사자와 같은 포유류 동물들, 해저 아래서 포식자로 명성을 떨친 상어와 같은 어류들까지 생물 대부분이 죽은 것이다. 상어, 고래, 바다사자 등 온갖 사체들이 썩어 바다를 오염시켰고, 해면에는 파도에 떠밀려온 온갖 사체들로 악취가 진동했다.
세상에 살아 숨 쉬던 생물들 중 거의 대부분이 죽었다. 하지만 모든 생물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물들은 육지와 바다에 드리운 죽음의 기운이 갈수록 더 짙어진다는 걸 알고는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며 조심했다.
마침내 어느 날 지옥처럼 타는 듯이 건조하고 어둡던 세상에 비가 내렸다. 비가 초원 구석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던 나뭇잎을 때리자 동굴 속에 숨어 있던 곤충이 놀라 깨어났다. 동그란 물방울이 땅을 때리자 신이 난 딱정벌레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얼굴을 씻었다. 빗물이 점점 모이기 시작하더니 오래된 물길을 따라 흘렀다. 초원 깊은 곳으로 흘러 들어간 물줄기가 멸망의 기운을 피해 잠자고 있던 생물들을 깨웠다.
졸졸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말라 버린 물웅덩이에 흘러 들어가자 돌 틈 사이에 숨어 있던 도마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마뱀이 선홍색 혀를 빼꼼 내밀며 주변을 살피고는 얇은 물 안으로 조심히 들어갔다. 백골이 된 거대 악어의 눈구멍을 드나들며 헤엄을 치던 도마뱀이 오른쪽 앞발을 쭉 내밀었다. 마치 이 물웅덩이의 주인은 자신이라고 주변에 선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웅덩이 주변에 나뒹구는 1천 구가 넘는 백골 사체들은 작은 도마뱀의 주장을 반대하더라도 의견을 낼 수 없었다. 만약 사자나 원숭이 같은 동물들이 주변에 있었다면, 전혀 다른 모습이었겠지만 지금은 도마뱀 말고 다른 생물은 보이지 않았다.
물은 항상 생명을 대표해 왔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중에 자욱하게 깔려 있던 독소를 머금은 연기가 빗물에 씻겨 내려갔다. 바람이 불어도 사라지지 않던 검은 연기가 마침내 빗물의 위력에 굴복한 것이었다. 빗물에 검은 연기가 씻겨 내려가자 공기에는 다시 신선하고 맑은 냄새가 났다. 주변에 살아 있는 생물들은 물로 인해 깨어났고, 물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절망적인 재난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살기 위해 다시 서로를 잡아먹었다. 서로를 잡아먹는 피비린내 나는 상황에서도 생명의 기쁨이 느껴졌다.
하지만 살아남은 생물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검은색 연기보다 더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더욱이 살아남은 생물들은 빗물이 검은 연기를 씻을 수는 있어도 천지에 가득 깔린 보이지 않지만, 생명 대다수를 죽일 수 있는 치명적인 무언가까지 씻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비는 계속 내렸고, 바다는 숨막일 정도로 조용했다. 파도가 천천히 죽은 사체를 암석이나 모래사장 위로 밀고 왔지만, 빗물 덕분에 썩은 냄새가 많이 나지는 않았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더니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 같은 거센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물에 즐거워하던 생물들을 다시 한번 자신의 몸에서 생명이 천천히 떠나는 걸 느꼈다. 이들이 세상이 변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에 절망하고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이성을 잃은 생물들은 미친 듯이 퍼붓는 비를 견디며 자신의 마지막 힘까지 모두 쏟아부어 아무 의미도 없는 잔인하고 참혹한 살육을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의 동족까지도 모두 죽이려 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이곳저곳에서 크고 작은 홍수가 났고, 세상에 생물들은 다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했다. 시커먼 물속에 잠긴 수없이 많은 사체 외에 다른 어떤 흔적도 볼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생명의 흔적은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바닷가에 쌓인 부패한 사체들이 폭우를 맞으면서 고약한 거품을 만들어냈다. 동화에서는 절대 등장하지 않을 참혹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를 향한 신의 정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원해 내릴 것 같은 폭우가 그치자 이번에는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가면서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북쪽부터 남쪽까지 기온이 갑자기 몇십 도씩 떨어졌다. 태양이 사라진 세상은 마치 다른 계절은 사라지고 겨울만 남은 것 같았다. 예고도 없이 나타난 극한의 겨울은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생물들의 삶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
서리가 내린 뒤에는 눈이 찾아왔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눈이 하염없이 내렸다. 맨 처음 내린 눈은 불에 그을린 듯한 검회색이었지만, 마지막에 내린 눈은 완전한 하얀색이었다. 더없이 깨끗한 눈이 하늘을 덮었고, 대지를 덮었고, 바다를 덮었다. 온 세상이 눈보라에 뒤덮였다. 극한의 추위는 대지 위 모든 걸 얼려버렸고 심지어 바닷물까지 얼렸다.
하얀 눈으로 덮인 대지는 정말 깨끗해 보였고, 한없이 내리는 눈은 영원히 그칠 것 같지 않았다. 눈으로 뒤덮인 세상에는 어떤 살아 있는 생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숨 막힐 듯이 조용하고 잔혹한 광경이 한없이 펼쳐졌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100년 지났다…….
* * *
범한은 마치 아주 긴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범한은 공중에 떠 있는 거울에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그의 두 눈을 벌겋게 충혈이 되어 있었고, 창백한 입술을 살짝 벌려 있었다. 그는 신묘로 들어온 이후 이미 화면에서 본 장면들과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을 거라 짐작했지만, 절망적인 화면들이 자신의 두 눈앞에서 펼쳐지자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강렬한 슬픔과 좌절감에 범한은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가 이처럼 마음 아파하는 이유는 자신이 본 장면들이 신의 세상이 아닌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영혼을 가지고 있었기에 벽화에 신화로 기록된 장면들이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 땅에 멸망에 가까운 참혹한 재난이 일어나 수없이 많은 무고한 생물들이 죽은 것이었다.
눈에 선 핏발은 범한이 현재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고개를 숙인 범한이 손을 들어 피곤한 눈을 비볐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고 거울에 보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눈밖에 없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눈들은 영원히 녹지 않고 지속될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땅에 문명화된 사회가 있지도 않은 테니 말이다. 사실 범한의 마음을 가장 떨리게 하는 건 거울이 보여주는 장면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이전 세상에서 범한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재난을 맞이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