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8화 사당 안에 있는 사람 (5)
군사 박물관 안에는 대물 저격총 배럿이 소장되어 있었으니, 이 박물관은 범한이 이전 세계에 살았을 때도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존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범한은 한 시대의 문명이 다른 시대에 똑같이 재현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어떻게 이전 문명에서 존재했던 저격총은 이후 문명에서 똑같이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평생 동안 그리워한 이전 세계의 문명은 이미 기나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이전에 박물관이었던 이곳은 눈 덮인 설산 안에 갇혀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 무너진 사원으로 변해버렸다. 범한······ 아니 범신이 이전에 사랑했고, 미워했고, 그리워했던 사람들은 이제 시간이 긴 흐름 속에서 망령이 되어버렸다. 그가 이전에 거닐었고, 보았고, 즐거워했던 사물들은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이런 생각이 들자 범한은 마음이 쓰라리고 아팠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고통이 아니라 아주 또렷하게 느껴지는 쓰라림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선명한 슬픔과 실망감이 그의 마음에 드리웠다. 범한은 이미 세상을 떠난 섭경미를 제외하면, 사라져 버린 문명을 기억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고독감이 천근처럼 무겁게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바닥에 주저앉은 범한이 연달아 기침하면서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한참 뒤에 호흡을 가라앉힌 그가 냉담하면서 슬프고 고독한 눈빛을 지었다. 그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불빛이 응축해 만들어낸 허공에 떠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이전 세계가 어쩌다가 파멸하게 된 건지 말해주겠어요? 설마 정말 어떤 미친놈이 원자 폭탄을 세상 이곳저곳에 터뜨리기라도 한 겁니까?”
얼음처럼 평평하고 매끄러운 거울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온화하면서 침착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그건 신의 세계에서 일어난 큰 전쟁이었다. 선인들이 각자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강력한 법보를 펼쳐 보이자 천하는 혼란스럽고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 대지가 뒤틀렸고, 화산에서 용암이 분출되었지······.”
“됐어요!”
범한이 분노에 찬 목소리가 넓은 건물 안에 메아리쳐 울렸다. 거울을 노려보던 범한은 격렬하게 기침하다가 피까지 토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범한은 감정을 추스르지 않고 입가에 묻은 피를 거칠게 닦으며 거울을 향해 욕을 했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그 거지 같은 신의 세계에서 온 사람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개소리는 그만 지껄이고 사실을 말하란 말이야! 이 거지 같은 곳은 그냥 무너진 박물관일 뿐이잖아! 신묘라는 개소리 좀 그만해!”
* * *
봄기운이 경국 황궁 안에 가득했고, 어서방 안에서는 낭랑하면서 차가운 소리가 천천히 울렸다. 바람이 통하도록 살짝 열어둔 어서방 나무 문 한쪽이 끼익하고 움직였다. 하지만 요 태감을 필두로 한 태감과 궁녀들은 조심히 밖에서 기다릴 뿐 안을 보거나 들어오지는 않았다.
“조정 높은 자리에 올라 있을 때는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고, 멀리 강호에서 지낼 때는 군주를 걱정하네. 벼슬길에 있을 때도 나라를 걱정하고, 물러나 내려온 뒤에도 세상을 걱정하는구나. 그러니 어느 틈에 기뻐할 겨를이 있으리? 이에 말하기를 백성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하고 백성들이 즐거워 한 뒤에 즐거움을 쫓는다고 하였다······.”
작은 목소리로 문장을 읽던 범약약이 책을 덮었다. 어서방 한쪽 구석으로 걸어간 그녀가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창밖에 잎사귀를 틔우고 있는 봄날 나무들을 바라보자 자연스럽게 오라버니가 생각이 났다.
‘북쪽으로 간다고 들었는데, 북쪽에는 뭐가 있지? 설마 전설에 등장하는 신묘가 북쪽에 있는 건가? 북쪽 끝에는 사시사철 눈과 얼음 밖에는 없어서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오라버니는 왜 그곳에 간 거지? 정말 괜찮은 걸까?’
지금은 이미 늦봄이라서 지난번 황궁 사건이 일어난 지 4개월 남짓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황궁 곳곳에는 부드럽고 따스한 봄볕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어서방에는 항상 차가운 한기가 감돌았다. 경국 황제 폐하는 낮은 평상에 누워서 얇은 이불을 덮고 있었는데, 안색이 창백하고 두 눈동자는 살짝 풀려 초점이 없었다.
범약약의 시선을 따라 창밖 나무들을 바라보던 황제 폐하는 왠지 모르게 푸른 나무들이 밉고 짜증이 났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이 만물의 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게 새삼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먼저 근심하고 백성들이 즐거워 한 뒤에 즐거움을 쫓는다라······. 안지가 북제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곳 황궁에서 했던 말이구나.”
황제가 먼 곳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짐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구나.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놈이 어째서 군주도 아비도 모르는 놈처럼 황당한 짓을 벌일 수 있는 건지.”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경국 조정도 자연스럽게 반역자 범한이 이미 경도를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북쪽에서 파악된 정보에는 범한의 행방을 한층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경국 조정 관리들이 의외라고 생각했던 점은 북제에 간 범한이 그곳 조정의 품에 안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의외였던 점은 황제 폐하가 분노를 범한 한 사람에게만 쏟을 뿐 경국 내부에 관련된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황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드물게 난 속눈썹은 마치 가을에 힘없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나약해 보였고, 얼굴은 갈수록 주름이 많아져서 축 처져 있었다. 그가 범약약의 어깨를 스쳐 먼 곳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짐은 정말 좋은 황제가 아닌 것이냐?”
가장 서럽고도 슬픈 질문이자 황당한 질문이었다. 경제가 용상 위에서 한 일들은 나중에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한 문제였지 한 사람이 평가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황제라 불리는 이 남자는 누군가에게든 좋은 황제라고 인정을 받고 싶었다.
경국 황제 폐하가 범한을 경도 안에 가둬두려 했던 이유는 범한의 눈을 통해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자신이 좋은 황제라는 걸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배신을 하고 떠나자 황제 폐하는 습관적으로 범약약에게 이 질문을 했다. 그때마다 범약약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때 어서방 밖에서 요 태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 귀빈 마마가 오셨습니다. 신 군주도 오셨습니다······.”
말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의 귀빈과 임완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최근 두 사람은 시간이 날때마다 자주 이곳을 찾아왔다. 황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 허락 없이 들어온 걸 질책하거나 나가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두 사람이 낮은 평상으로 다가와 자신을 부축하는 걸 말없이 받아들였다.
낮은 평상 이불을 전부 바꾼 임완아가 웃으면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중주(中州)의 솜을 사용해서 천주 쪽에서 가장 유행하는 방법으로 만들었으니 편한지 아닌지 한 번 봐보세요.”
의 귀빈이 찬합 안에서 음식을 꺼내 조심스럽게 황제에게 먹여주면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최근 이틀 동안 햇살이 정말 좋습니다. 폐하께서도 얼른 일어나 밖을 걸어보셔야지요.”
황제가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이렇게 매일 오면서 귀찮아하지도 않군. 짐이 움직일 수 없어 누워 있는 게 아니다.”
말을 이렇게 했지만, 사실 황제 폐하의 상처는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범약약과 태의원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회복 속도가 느린 것이 심상치 않았다. 몸이 노쇠해서 그런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부상을 입기 전 경제의 몸이 건강했던 만큼 연달아 중상을 입지 않았다면, 진작에 상처를 회복했을 거라는 거였다.
임완아는 황제 삼촌의 말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안마해주기 시작했다. 범약약이 잠시 옆에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황제의 다른 쪽 어깨를 같이 안마해주었다.
조용한 어서방 안에서 의 귀빈이 황제 옆에 앉아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이 안마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난리가 일어났음에도 조정 안에서는 대규모 숙청이 일어나지 않았다. 더구나 범한이 하종위 쪽 관리들을 단번에 모두 죽여 버렸음에도 조정은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정 내부는 철통처럼 단단해졌고, 3 황자 이승평은 최근 호 대학사의 가르침을 따라 나랏일을 조금씩 주관하기 시작했다. 매비의 배가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와중에 경국 내부는 아주 긴장된 안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황제 폐하는 후계자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경국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범한이 인간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지 반년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그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고,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임완아는 범한이 세운 계획을 따라 가족들을 데리고 담주로 내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묵묵히 경도 안에 머무르면서 이전보다 훨씬 자주 입궁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일은 짐이 조회에 나갈 것이니 오지 말 거라.”
한참 침묵이 이어진 뒤 황제 폐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불쾌한 기색은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황제 폐하 역시 가족들에게 살뜰한 보살핌을 받는 걸 즐거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들 그에게 반항한 아들의 가족이었다.
“폐하, 알겠습니다.”
임완아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또 자신은 그저 범한의 생각을 계승할 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놈이 살아서 돌아올 거라는 헛된 기대는 품지 말 거라. 설사 그놈이 살아서 돌아온다고 해도 그리고 짐이 그놈을 살려 두려 한다고 해도 천하의 관리들은 그놈이 살아 있는 걸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황제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입꼬리가 속눈썹처럼 축 처져 있는 게 약간 피곤해 보였다.
범한이 어느 날 살아서 돌아올까?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이 말로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가지는 걸 차단했다. 황제가 눈을 감은 채로 매정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그놈이 신묘를 찾아간 이유를 모르지만 짐은 알고 있다. 그놈은 오죽을 찾아와서 짐을 죽이려는 것이다. 이처럼 배은망덕한 생각을 품고 있는 아들을 짐이 불쌍해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음에도 범한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숙청하지 않았으니, 경제로서는 이미 충분히 관용을 베푼 셈이었다. 물론 그가 관용을 베푸는 이유는 범한과 한 약속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그 역시도 범한이 지금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신묘를 찾아가서 안에 있는 사람을 구해 돌아온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한 여자가 비슷한 일을 시도했었고, 심지어 성공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여자와 자신 사이에 난 아들은 이미 세상이 놀랄 만한 일들을 많이 해냈었다.
‘만약 오죽이 범한을 따라 돌아온다면, 짐은 어떻게 되는 건가? 이 천하는 어떻게 되는가?’
황제가 갑자기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뜨고는 살기등등한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섭중에게 입궁하라 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