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7화 사당 안에 있는 사람 (4)
지금의 상황에서 보면 범한이 과감한 행동을 한 게 옳은 선택으로 보였다. 불빛이 응축되어 형성된 선인의 몸에 강력한 힘이 없는 게 확실했다. 오히려 선인은 범한이 추측했던 데로 홀로그램 화면과 같은 걸로 이루어진 형체 같았다.
하지만 신묘 안에는 여전히 아주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었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예를 들면, 신묘 주변은 다른 곳과는 다르게 천지의 원기가 강하게 농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친어머니인 섭경미가 훔쳐 가지고 온 무공 비결들은 세상에서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굳이 비슷한 걸 따진다면 범한이 이전 세계에서 본 태극권의 원리를 설명한 진씨 태극권보(陳氏太極拳譜)와 비슷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위력이나 효과 만에서 패도 공결처럼 신묘한 무공 비결은 본 적이 없었다.
건물로 다가가는 범한의 얇은 입술을 살짝 떨렸다.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물 문턱을 넘으면서 그가 뒷짐을 지고 뒤에 있는 해당과 왕 십삼랑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는 두 동료가 신묘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압도되지 말고 굳건히 버티고 서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기를 바랐다.
범한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반딧불이처럼 공중에 떠 있는 불빛도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그러자 눈이 덮인 광활한 광장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석대 앞에는 파랑새의 발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육중한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범한은 닫힌 문 안에 서 있었고, 해당과 왕 십삼랑은 닫힌 문밖에 서 있었다.
해당과 왕 십삼랑은 겁에 질린 상태였지만, 도망을 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범한이 어디서 저렇게 큰 용기를 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범한이 선인의 몸을 통과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선인이 어떻게 범한과 부딪치는 순간 불빛으로 변할 수 있었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두려움 보다는 굳게 닫힌 대문 안에 있는 범한의 안전이 더 걱정되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대문을 바라보고 있던 해당타타가 눈을 번쩍였다. 그녀가 용기를 내어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 하자 왕 십삼랑이 작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작은 범 대인의 수신호를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작은 범 대인의 수신호를 해석하면 밖에 남은 우리가······ 이 기회를 틈타 사람을 찾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범한이 큰 위험을 무릅쓰고 해당과 왕 십삼랑을 문밖에 남겨둔 이유는 두 사람이 자신이 목숨을 걸고 얻은 기회를 이용해 신묘 안에서 오죽 아저씨의 행방을 찾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범한이 갖은 고생을 하며 멀고 고된 길을 뚫고 신묘까지 온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의 소중한 가족인 오죽 아저씨를 찾기 위해서였다.
* * *
겉은 오래된 사원처럼 보였지만, 내부는 달랐다. 신묘는 이 세계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평범한 청석이 아니라 금속 같은 자재로 지어져 있었다. 범한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눈을 굴려 내부 이곳저곳을 훑어보았지만, 건물 안은 텅 비어 있었고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눈에 띄는 흔적이라면, 곳곳에 있는 비어 있는 구조물마다 희미하게 박물관이란 글씨를 볼 수 있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아주 오래전에 전시대로 쓰였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신묘 외부 벽화는 이미 허물어져 있었지만, 건물 안에 벽화는 여전히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이 되어 있어 무슨 그림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범한이 나이 든 노인처럼 양손을 뒷짐 지고 허리를 구부린 채 벽화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천천히 벽화 앞을 지나가면서 아주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세심하게 살펴봤다. 불빛으로 응축된 선인이 신묘의 역사와 진실을 알려주려 하지 않으니 스스로 진실을 알아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범한이 허리를 구부리고 꼼꼼히 벽화를 살펴보는 동안 불빛으로 변한 선인인 반딧불처럼 그의 뒤에서 날아다녔다. 범한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돌려 바라보거나 입을 열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정말이지 이 세상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선인 또는 귀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뒤를 따라다니고 있는 만큼 범한도 두려움을 이기기 힘들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신묘 내부 벽화 양식은 범한이 이전 세계에서 알던 양식과 아주 흡사했고, 묘사된 내용은 모두 대륙 경집에서 가끔 언급된 먼 옛날의 신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다만 신의 얼굴이 명확하게 그려져 있지는 않았는데, 산봉우리에서 번개를 내리치는 신이나 바다 위에 있는 신이나 화산구 용암 속에 있는 신 모두 하얀 안개가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벽화를 꼼꼼히 살펴보던 범한의 마음속에서 ‘쿵쿵’ 소리가 울렸다. 그의 머릿속에 경도 경묘 안에서 보았던 벽화와 대동산 경묘 안에서 보았던 벽화가 떠올랐다. 그곳 벽화들에 그려진 내용이 얼마나 오래전 일을 기록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범한은 분명 수십 세대를 거쳐 전해진 내용인 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왜곡되거나 모호해진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신묘는 세상 모든 전설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데, 어째서 벽화에 그려진 신의 얼굴이 제대로 묘사되어 있지 않은 걸까?
그때 갑자기 반딧불이나 도깨비불의 모습으로 범한의 뒤를 따라오던 신묘의 선인이 입을 열었다.
“이 벽화는 보어가 그린 것들이다.”
“보어라고요? 3백 년 전에 활동했던 서방 대법사를 말하는 겁니까? 전설에 따르면 그와 그의 아내 볼포는 하늘의 자손이었데······ 나중에 흔적도 없이 사려졌다고 그러더군요. 아마도 마지막에 신묘로 돌아왔던 거겠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거예요.”
인상을 찌푸린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계속했다.
“하늘의 자손은 신묘가 가진 지혜의 씨앗을 세상에 뿌리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하늘의 자손들이 마지막에 모습을 감추는 이유가 그들이 다른 마음을 품어서 신묘의 사자가 그들을 죽였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에 신묘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을 줄은 몰랐군요.”
“신묘는 세상일에 간섭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도 없다. 하지만 당신이 한 말도 맞았다. 신묘의 지혜를 물려받은 하늘의 자손이 헛된 생각을 품고 백성들을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에는 신묘는 사자를 보내 죽이고, 그의 흔적이 지워버렸다.”
“역시 전설 속에서 하늘의 자손이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하는 이유가 그거였군요.”
범한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뒤에서 반딧불이처럼 빛나는 불빛의 말투가 침착하고 온화한 점에 주의를 기울였다. 더구나 상대가 자신을 부를 때 ‘당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점을 보면 이제는 소통할 마음이 생긴 것 같았다.
“보어와 볼포 부부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두 사람은 속세의 욕망을 품지 않았지. 볼포가 죽은 뒤 보어는 온갖 수고를 무릅쓰고 신묘로 돌아왔다. 마침 그때 신묘의 벽화가 곧 허물어질 상황이라 그가 7년을 쏟아 신묘의 벽화를 다시 복원했다.”
“하지만 대동산 경묘와 경도 경묘의 역사는 채 3백 년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곳 벽화에서도 보어가 그린 벽화와 비슷한 양식이 보이는 거죠?
“보어는 기본의 벽화를 수리해 복원했을 뿐 창조한 게 아니니까. 아주 오래전 벽화 양식에 따라 수리를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성장하면서 보고 익힌 벽화 양식을 적용했던 거지.”
범한이 손을 들어 벽화 중 하늘에 빛과 불꽃이 가득한 장면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신들의 얼굴이 없는 이유는 뭐죠?”
“진짜 신은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니까.”
“그러면 당신은 진짜 신이 아니군요.”
범한의 뒤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불빛은 어느새 노인의 얼굴을 버리고 거울처럼 바뀌어 있었다. 불빛이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당신의 말처럼 나는 신이 아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네요. 사실 저는 당신이 설산 안에서 수만 년 동안 갇혀 있다 보니까 미쳐버려서 자신이 정말 신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만일 그렇다면 앞으로 일이 상당히 힘들어질 테니까요.”
신이 아니라는 신묘의 말을 들은 범한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최소한 가장 두려우면서 사실일 수 있던 가능성을 신묘 스스로 부정한 것이었다.
더구나 만일 진짜 생명과 감정을 가진 존재였다면, 범한의 이 말을 듣고 내면에 숨겨진 뜻을 알아들었을 거였다. 하지만, 신묘 안에 선인은 정해진 어떤 방식에 따라서만 상황을 판단하고 결정할 뿐이라서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신이 얼굴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신이라 할 수 없지요.”
범한은 이 말을 내뱉자마자 마음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세상에 정말 신이 없다면, 그와 그의 친어머니인 섭경미가 다른 영혼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타난 이유를 알 수도 없었다. 어쩌면 두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이 세상에 온 걸지도 몰랐다.
“강력한 위력을 가진 기구나 무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죠?”
범한이 벽화 위에 천지를 창조하는 신을 가리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장면만 봐서는 무슨 무기인지 모르겠네요. 원자탄인가요? 아니면 중성자탄인가요? 어쨌든 엄청나게 무서운 위력을 가진 거겠죠.”
범한의 말에 허공에 떠 있는 불빛의 거울 같은 표면이 강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서둘러서 상황을 분석하기 위해 모든 능력을 총동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신묘의 선인은 범한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음이 틀림없었다.
건물 안을 비추는 빛은 보아도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로 옅었다. 부드럽게 범한의 몸을 비추는 것이 마치 그에게 광명을 내려주는 것처럼 보였다. 보관하는 전시품이 없어 불을 밝게 밝히지 않는 건지 아니면 신묘의 에너지가 약해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더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자 범한이 다시 앞으로 걸어가며 모든 벽화를 살펴본 뒤 건물 정중앙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들고 허공에 떠 있는 불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범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당신도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겠죠······. 제 두 명의 동료도 여기 없으니 더는 숨기지 말고 신묘가 생겨난 이유와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줘요.”
불빛에 형성된 거울 표면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마치 범한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지 없는지를 분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말을 하지 않으시니 먼저 제가 지금까지 파악한 것들을 말해보죠.”
범한이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 지쳐 피곤해진 범한은 천천히 차가운 바닥에 앉고는 천지 사이에 어디에는 있는 원기를 빨아들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신묘는 유적입니다. 어떤 문명의 유적이죠. 당신의 말을 빌리자면 이곳은 군사 박물관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러니 이 안에는 가장 발전된 문명의 산물이자 가장 두려운 존재가 보관되어 있었을 겁니다. 당신은 제게 신묘의 역사를 알려주려 하지 않지만, 여기 벽화만 봐도 어느 정도는 추측해 낼 수 있어요.”
“이곳에 담겨 있는 문명은 분명 제가 아주 잘 아는 문명이거든요.”
범한이 천천히 두 눈을 감고는 소은이 동굴 안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고, 오죽 아저씨가 과거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시 어머니는 신묘에서 처음 도망을 치고 나서 얼마 뒤에 오죽 아저씨를 찾기 위해 다시 신묘로 돌아갔을 거였다. 그러니 상자는 마땅히 어머니가 다시 신묘를 방문했을 때 오죽 아저씨와 같이 나오면서 훔쳐 가지고 온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