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5화 사당 안에 있는 사람 (2)
범한은 눈을 던져 그것이 신선의 형체를 통과하는지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단 무언가를 알아내고 나자 공포감도 자연스레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과 마찬가지로 성심성의껏 무릎을 꿇고 있기는 했다.
“북제 천일도의 해당타타가 선인께 인사드립니다.”
해당타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올리려는 사람처럼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신묘 선인이 천일도 일파를 알고 있고, 천일도가 신묘를 받들고 이곳의 어짊과 사랑을 담은 천일도문을 전파한다는 걸 알 거라 생각한 거였다.
“동이성 검려의 왕 십삼랑입니다.”
왕 십삼랑의 음성은 조금 이상했다. 평소에는 위풍당당한 청년인데 오늘 드디어 정신적 충격을 받아 조금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경국의 범한입니다.”
범한은 자신의 본명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번 신묘 사자가 세상에 나왔을 때 오죽 아저씨의 손에 죽기는 했지만, 그건 황제 아버지의 악랄한 수법이었다. 이에 범한은 자신과 섭경미의 관계를 신묘가 분명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범한은 신묘가 자신들에게 대문을 열어 준 이유가 대체 무엇일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신묘가 무수히 오랜 세월 동안 이 세계의 신화와 전설 속의 신선으로 사칭해 온 거라면, 오늘도 분명 그런 척을 할 것이다. 그런데 신선인 척을 하려면 당연히 끝까지 제법 그럴싸하게 억지를 부려야 할 테고, 그래야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 같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먼저 말을 걸기 전에는 신묘 쪽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저희 세 사람은 남쪽에서 왔고…….”
범한이 쉰 목소리로 설원에서 겪은 고생을 한 차례 늘어놓음으로써 세 사람의 결심 및 신묘를 숭배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그사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은 범한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신선께서는 생각만으로도 자신들이 충성스러운지 간사스러운지 아실 텐데, 그런 분 앞에서 거짓말이라니. 범한은 대담해도 너무 대담했다.
“그대들은 세상의 생명. 위대한 신묘는 가엾은 백성들을 주시해왔도다. 눈과 얼음으로 된 길이 그대들의 결심을 증명했으니, 의혹이 있다면 광명이 인도할 것이며, 그 광명은 그대들 앞에 있느니라.”
파랑새가 변한 선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감정 기복이 없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냉랭하지 않고 오히려 따스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어 있었다.
선인의 음성은 넓고 적막한 신묘 안을 감돌며 웅웅 울렸다. 그런데 그 소리가 선인의 입에서 나오는 건지 천지 사방팔방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이 말만으로도 신묘함이 드러난 거라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은 다시금 상대방이 신선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범한은 속으로 싸늘하게 웃었다. 이건 기능이 개선된 대형 확성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광명이 앞에 있고 광명이 인도한다고? 인간사는 너무 고달프니 의혹이 있으면 신묘 선인에게 도움을 구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이에 범한이 자연스럽게 다시 말을 걸었다.
“지고지상한 선인이시여, 알고 싶은 게 있는데…….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나이까?”
그들은 남쪽에서 출발해 신묘로 왔다. 하지만 이들이 장차 어디로 가야 할지 누가 알겠는가? 파랑새는 이들을 석대(石臺) 앞으로 인도하기 전까지는 이들에게 철학적이고 대답하기 까다로운 문제에 답해줘야 한다는 건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인은 범한이 던진 세 개의 질문에 짐시 침묵했다. 그러자 차가운 공중에서 펄럭이던 옷자락도 순식간에 굳어 버려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은 범한이 왜 저런 질문을 던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때 범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고 냉랭한 눈으로 침묵에 빠진 선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세세히 관찰함으로써 자신이 내린 판단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그대들은 그대들이고, 그대들은 온 데서 왔으며, 갈 데로 갈 것이다.”
선인의 옷자락이 다시 휘날리기 시작했다. 음성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따스했고, 대답은 여전히 현묘했다.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 귀에는 이 말은 멋지게 들렸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들었을 때도 유난히 미묘하니 멋지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상대방이 대답할 때, 허공에 떠 있는 반짝이는 사람 형체를 차분하게 직시하며 속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자료 검색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군. 이제 보니 신묘 기능이 곧 못쓰게 될 것 같아.’
범한이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데도 선인은 전혀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빛 속에서 범한을 온화하게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제가 원한 답은 그게 아닙니다.”
범한이 이리 말했다.
“답은 답일 뿐이니, 필요하든 불필요하든 그건 단지 마음의 문제일 뿐.”
신묘 선인의 대답은 여전히 무당이 내뱉는 말 같았다.
범한이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묘의 과거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선인이 다시 침묵했다. 그리고 그의 옷깃을 감싸고 있던 빛이 순식간에 많이 어두워졌다. 범한은 눈도 깜빡 않고 이 빛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속으로는 애원하듯 생각했다.
‘만약 너가 정말로 홀로그램이라면, 이 박물관의 해설자라면, 너의 사명이나 다하거라. 이미 사라져 버린 역사에 대해서나 말하란 말이다!’
만약 누구든 정말로 전설 속 신묘로 들어가게 된다면, 연금술, 불로장생술, 신기한 최상의 무공 공결 같은 거나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범한은 달랐다. 그가 가장 원한 건 신묘의 역사였다. 신묘 문밖에서 그는 ‘박물관’이란 세 글자를 말했다. 하지만 신묘에 있는 사람은 그 세 글자를 가지고 범한 체내에 자신과 은근히 통하는 영혼이 있다는 걸 추측해내지는 못했다.
선인의 옷자락은 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고, 빛도 오랫동안 어두운 상태로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빛 속에서 떠 있는 사람은 어떤 ‘접근 허가’에 관한 걸 가지고 저울질하는 중일 수도 있었다.
신묘가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신묘는 어떻게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는지, 신묘의 과거, 현재, 미래는 범한의 질문이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목표였다. 흰 눈이 얕게 덮여 있는 신묘 안에서 범한의 질문이 메아리치자 파랑새에서 모습을 바꾼 선인은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잔뜩 긴장해 있던 해당과 왕 십삼랑은 범한의 감정이 갑자기 변했다는 걸 알아채고는 마음속에 용솟음치는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살짝 고개를 들었다.
눈과 얼음으로 둘러싸인 신묘한 사원 안에서 범한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해당과 왕 십삼랑이 벌거벗은 아이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과는 달리 범한은 석대 위 선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조금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주 아주 오랫동안 침묵하던 선인이 자신의 발아래 있는 범한을 향해 말했다.
“이것은 일반 사람이 접촉을 시도하거나 이해할 범위가 아니다.”
“저는 제가 일반 사람이라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공중에 불빛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목소리를 낮추며 계속 말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무슨 선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 대륙에서 수천수만 년 동안 이어져 온 역사에서 신묘는 항상 은밀하게 영향을 끼쳐왔다. 그래서 범한은 신묘의 인간 세상일에 함부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규칙은 그저 스스로를 신비롭고 독립적인 존재로 꾸미기 위한 것일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신묘의 정체가 이전의 유물이든 아니면 어떤 기괴한 사물이든 상관없이 인간 세상의 전설이나 신화 속 이야기를 통해서 스스로를 허무맹랑한 신비로운 존재로 꾸며 왔음이 틀림없었다.
“대답을 하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그럼 저희를 신묘 안으로 들어오게 해준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범한은 공중에 불빛이 기이하게 변화하여 만들어진 기이한 장면과 사람의 형체를 똑바로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가 알기로 신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일반 사람을 안에 들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를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해주셨으니, 분명 요구할 게 있는 것이겠지요.”
범한과 선인의 대화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해당과 왕 십삼랑이 눈밭 위에서 천천히 일어나 조심히 주변을 살폈다. 두 사람은 범한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은 고결하고 숭고한 존재 앞에서도 당당하게 대화를 하는 걸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해당 타타와 왕 십삼랑은 한편으로는 범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범한은 정말 신묘에 있는 선인과 협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건가? 어째서 서둘러서 장님 대사의 행방을 찾으려 하지 않는 거지?’
범한 뒤에 서 있는 해당이 천천히 그의 시선을 따라 공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공중에 떠 있는 눈동자를 보자마자 온몸에 용기가 전부 사라지면서 더는 고개를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해당이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며 범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당당하게 서서 선인을 쳐다보는 범한과 달리 자신은 왜 그럴 수 없는지를 생각했다.
“저는 속세에서 아주 많은 일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장사해서 돈을 버는 걸 가장 잘합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선인을 바라보던 범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는 이익 외에 다른 건 관심이 없는 상인입니다. 아무 노력 없이 이익을 얻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손해를 보는 건 더 싫어합니다. 그러니 신묘를 덮고 있는 빛을 위해서 제 이익을 손해를 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저희가 신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기를 원하신다면, 반드시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셔야 할 겁니다.”
신묘에 들어오자 범한은 평소보다 훨씬 침착하게 행동했다. 그는 신묘의 정체를 확실하게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으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그의 눈앞에 있는 선인은 신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무언가일 뿐이었다. 게다가 범한은 어렴풋하게 신묘를 찾아오는 길이 예상보다 순조로웠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분명 신묘 안에 있는 저 존재는 이곳을 찾아온 세 사람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범한은 심지어 그 요구가 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 * *
“신의 도리가 희미하고 큰 도는 번성하지 못하니 잘못된 길을 배회하는구나. 산과 강을 흥성하게 하고 바람과 구름을 일으켜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이 나의 뜻이다. 그러니…….”
석대 위에 불빛이 응집해 사람 형체가 되더니 잠시 뒤 아름다운 장문의 문장을 읊기 시작했다. 길고 거창한 문장이었지만, 말하고자 하는 뜻은 아주 간단했다. 신묘 안에 있는 선인은 범한, 해당, 왕 십삼랑이 신묘의 사자가 되어 신묘를 대신해 어둠 속에서 천하를 관찰해 주기고, 또 적당한 시기를 선택해 신묘로 돌아와 신묘 안에 사람에게 보고를 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해당과 왕 십삼랑의 눈동자 안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두 사람은 선인이 신묘 안으로 들어온 자신들을 돌덩이로 바꿔버리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을 뿐 황당무계하면서 중요한 임무를 요구받게 될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묘를 대신해서 세상의 일을 감시한다니? 만일 그러겠다 약속한 뒤 신묘를 떠난 자신들이 다시는 신묘를 찾아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신묘 사람은 신묘를 나가 세상일에 간섭할 수 없으니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신묘 안 선인의 단순하고 황당한 요구는 천일도 제자들이 봤을 때는 더할 수 없이 숭고한 사명처럼 들렸지만, 범한에게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증명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설마…… 이것이 전설 속 하늘의 자손들이 맡았던 임무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