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3화 산속에 있는 신묘 (2)
맨 위 돌계단에 선 범한은 외투 밖으로 드러난 손을 살며시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서 앞에 있는 사당을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는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은 범한보다 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멍하니 웅장한 건축물만 바라보았다.
신묘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적어도 인간 세상의 건축 기술로는 이리 큰 사당을 지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높고 검은 돌담은 마치 천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시커먼 얼음처럼 세 사람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회색의 긴 처마는 돌계단의 맨 끝을 연장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역사의 비밀을 그리고 천지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걸까.
사당 크기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지금 이 곳은 돌계단의 끝부분이면서 눈보라 치는 산맥 안으로 깊이 숨어 있는 곳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넓었다. 경국 황궁 앞에 있는 수만을 수용하는 광장보다 몇 배는 더 큰 크기였다.
그런데 이들 세 사람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위압감과 장엄함을 느끼게 해준 건 그들 앞에 있는 정문이었다. 여닫이로 형태의 신묘 문은 높이가 7장(丈)은 족히 되어 보였고, 깊이는 알 수 없었으며, 고졸한 색상을 띄고 있었다.
세 사람은 돌계단 위 신묘 정문으로부터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런데 정문이 너무 높고 커서 세 사람은 신묘 바로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압박감과 위압감 때문에 바닥에 털썩 엎드려 쉼 없이 절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계단 위, 신묘 앞에 서 있는 범한, 해당타타, 왕 십삼랑은 하나 같이 인간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젊은이들이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광장과 사당 앞에서 그들은 풀밭에서 길 잃은 개미에 불과했다. 길은 잃은 개미가 문득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태양을 가린 거대한 나무를 발견하고는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 * *
이들 중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건 대략 범한뿐이었다. 그는 전생에 88층짜리 진마오 빌딩, 삼협 댐을 본 적 있어서였다. 그는 눈앞에 있는 사당이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는 신의 기적으로 보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의 기준에서는 그냥 예쁘게 잘 지어진 건축물일 뿐이었다.
거대한 바다를 보고 나니 강물은 물도 아니오, 무산의 구름을 보고 나니 다른 곳의 구름은 구름도 아니라고 했다. 과거 범한은 장묵한 대가에게 이 구절에 대해 설명해 준 적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신묘 앞에 서 보니 범한은 새로운 해석법이 떠올랐다. 바로 견문과 직접 체험해 얻은 지식이 개인의 능력치를 결정한다는 거였다. 왜냐하면 과거 경험해 본 것에는 압도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범한은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보다 더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전생에 발달된 문명을 경험해본 터라 지금 훨씬 더 차분할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신묘 앞에 선 그는 긴장감과 흥분을 억누를 수 없어 한동안 말없이 앞에 있는 신묘 대문만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러다 순간 그가 고개를 떨구고 자기 발 앞에 놓인 푸른색 돌계단을 바라보며 수십 년 전 일을 떠올렸다.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고하 대사는 발아래에 있는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도 하고, 손바닥으로 바닥을 치기도 했었는데 그런 그에 비하면 여기 있는 세 사람은 너무 침착했다.
마음을 가다듬은 범한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신묘 대문 위의 커다란 현판 부분으로 향한 범한의 동공이 순간 살짝 수축되었다.
* * *
소은이 과거 산속 동굴에서 해준 말처럼 거대한 현판 위 글자는 너무 오래되어 그런지 정확한 알아볼 수가 없었고, 부호 몇 개 정도만 남아 있었다. 그때 소은은 그건 부호였고, 하늘이 세상에 남긴 신비한 뜻을 담고 있을 수 있다고 했었다. 그런데 드디어 범한의 눈에 들어온 그 부호는 그야말로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범한이 거대한 현판 위에 남아 있는 물(勿)자와 그 아래에 있는 부호 세 개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획이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고, 위로 올라갔다 다시 내려왔고 원호가 두 개 얹어져 있었다. 그게 이 부호와 관련된 모든 정보였다.
범한이 차가운 공기 중으로 손을 뻗어 무의식적으로 부호를 따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경력 5년부터 그는 이 물(勿)자와 똑같이 생긴 세 개의 부호에 대해 알아보려 많은 공을 들였었다. 그리고 오죽 아저씨와 사고검에게도 물어봤었다. 하지만 정보가 너무 적은 탓에 그 어떤 결과도 도출해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오늘 물(勿)자와 부호들을 드디어 마주하게 되었으니, 어찌 범한의 마음이 일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범한이 현판 위에 걸린 남은 물(勿)자의 위치와 남은 부호 세 개의 위치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순간 번쩍하면서 지나가 그의 두 다리가 제멋대로 신묘 대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신묘의 진면목에 놀라 넋이 나갔던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은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이들은 범한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를 따라 신묘 대문을 향해 다가갔다.
범한은 시선을 현판에 고정한 채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말소리가 점점 빨라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디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양 뺨에는 흥분했을 때 보이는 홍조가 나타나 있었다.
“저게 무슨 하늘에서 남긴 부호야! 그냥 M자 아니야?!”
피로에 절어 있던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복잡한 감정에 의해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이를 악물고는 멍청한 표정으로 기침하며 웃어댔다. 현판을 통해 드디어 신묘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낸 거였다.
이 순간 범한은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추론이 정확하다는 걸 확인했다. 설산에서 본 궤도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푸른색 돌계단을 산 바깥쪽 하늘 아래로 내려 보내는 게 아닌, 이 거대한 신묘를 하늘 아래로 내려 보내는 장치였다!
신묘는 에너지가 필요했다. 햇빛이 필요했던 거다. 그래서 극야 이후 사람들 앞에 나타난 거였다. 그리고 바로 이 점 때문에 범한은 신묘가 신의 기적이 아닌, 지금은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건축물에 불과하다고 확신한 거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자신이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이 바로 그 푸른 별이란 걸 드디어 확인한 거였다! 별빛이 쏟아지던 날 밤, 임대보에게만 슬프게 말해주었던…… 지구였다!
범한이 하얗게 질린 양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혼잣말했다.
“여기는 지구였어. 그럼 저 사당은 뭐지? M자 세 개랑, 물(物)자 하나랑……. 한데 내가 살적에는 저렇게 큰 박물관은 없었는데…….”
셀 수도 없이 많은 감정들이 그의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과부하가 걸린 범한은 두 뺨은 붉어지고 양 입술은 창백해졌으며, 두 눈은 초점을 잃고 말았다. 그렇다. 신묘는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박물관이었다. 소은이 기억하는 물(勿)자는 도끼와 낫을 그려 놓은 게 아니었다. M자 세 개는 하늘의 부호도, 러시아의 비행선에 있는 표식도 아닌 단순히 알파벳이며 흔히 볼 수 있는 글자일 뿐이었다.
그렇다. 신묘의 거대한 현판에 배열되어 있는 글자 중 물(物)자 아래쪽에 있는 M 세 개는 그 단어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신묘는 원래…… 박물관인 거였다!
* * *
범한은 신묘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거대한 현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어지지 않았다.
만약 지금 이 세계가 지구라면, 몇천 몇만 년 전 것으로 보이는 이 박물관은 대체 언제 지어진 걸까? 이 건물을 지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왜 세상에 이런 게 존재하는 걸까? 왜 이 박물관을 사람들은 신묘라고 부르게 된 거지?
이에 범한은 인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애매모호한 전설을 떠올렸다. 하늘의 자손, 신묘의 사자, 어머니인 섭경미가 신묘에서 훔쳐 온 공결과 상자. 범한은 몸이 계속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자신이 이 세상의 최대 비밀과 진상을 찾아낸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도 이내 알게 되었다.
범한이 극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짙은 색의 신묘 대문 앞에서, 역사 천서(天書)와도 같은 신묘 문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가슴속에서부터 우러난 분노와 무력함을 쏟아냈다.
“이건 대체 무슨 염병할 박물관인 거야!”
“이곳은 군사박물관입니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 신묘 안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좌절감과 허무함으로 가득 찬 범한의 질문에 답을 주려는 것 같았다.
눈보라가 멎었다.
담담한 음성에 범한의 동공이 수축하면서 대문을 경계하며 바라보았다. 앞에 있는 천서(天書) 같은 나무문에서 괴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어서였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고 또 지나도 신묘 안쪽은 조용했다. 신묘는 마치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화를 내며 던진 질문에 대답해준 후 복잡한 사고 과정에 들어가 있느라 침묵하는 것만 같았다.
대신 신묘의 거대한 문은 어느새 조용히 열려 문틈이 벌어져 있었다. 저렇게나 육중한 문이 열렸는데 아무 소리도 안 나다니. 정말 소름 돋는 일이었다. 신묘 문은 15도가량만 열려 있어 밖에서는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 없이 열려 있는 문은 사당 안에 있는 사람이 초대해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범한은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지만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실눈을 뜨고 신묘 문 쪽 그림자 진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범한은 천천히 바닥에 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석대 위에 엷게 쌓인 눈 위에 앉았다.
범한은 멀고 먼 수십 년 전처럼, 고하 대사가 신묘 문을 열었을 때처럼, 안에서 전광석화처럼 검은색 그림자가 나와 자신들에게 강력한 공격을 퍼부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당 문은 열리기만 했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마…… 사당 안에 있는 사람이 적적하고, 고독하고, 혼자 있기에는 썰렁해서 그런가? 그래서 신묘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건가?
보물산, 지옥, 천당, 눈 내린 꽃동산이 눈앞에 그것도 지척에 있는데도 범한은 그냥 주저앉아버렸다. 그리고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띠고, 두 눈은 감고 명상에 돌입했다.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은 신묘에서 나온 소리와 범한 간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세계에는 박물관이란 게 없어서였다. 그들은 범한이 왜 하필이면 지금 신묘 앞에 주저앉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에 두 사람은 신묘가 열어 놓은 대문을 놀란 모습으로 주시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범한 곁으로 다가와 무기를 들고 범한을 보호했다.
해다타타의 무기는 그녀가 허리에 차고 있는 연검(軟劍)이었다. 왕 십삼랑은 어디서 찾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무 막대기를 들고 살짝 열린 신묘 문틈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냥꾼처럼 노려보았다.
눈 위의 세 사람은 이렇게 조용히 신묘 문 앞을 지켰다.
이곳의 천지간 원기 농도는 대단히 짙었다. 그래서 이 점을 감지해 낸 범한은 신묘로 들어가기 전 일단 눈을 감고 바닥에 앉아 버렸다.
적어도 행동에 나섰을 때 문제는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따가 미친 듯이 도망가야 한다면,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에게 최소한 짐이 되면 안 되어서였다. 그리고 앞에 있는 신묘가 문까지 열어 줬다는 건, 몇만 몇천 년을 기다린 저들에게는 굳이 이 찰나와도 같은 지금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무렵, 범한이 천천히 눈을 떴다. 몸에 있는 3만 6천 개의 모공이 천지간의 원기를 탐닉하듯 충분히 빨아들였다. 체내 경맥에 난 상처가 많이 회복되었고, 허리 뒤 설산에 쌓인 정기의 양 역시 서서히 흘려보내 보아도 될 정도였으며, 정신 상태도 많이 좋아져 신묘로 들어갈 준비를 마친 거였다.
범한이 신묘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왕 십삼랑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같은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짹짹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이어 자그마한 새 한 마리가 신묘에서 걸어 나오더니 앞쪽에 긴장한 모습으로 있는 세 사람을 향해 짹짹 두 번 울었다.
온통 파란 털을 가진 맑고 깨끗한 느낌의 정말 아름다운 새였다. 갑자기 새 한 마리가 나타나자 신묘 밖에 있던 세 사람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신묘에서 손님을 맞으러 나온 게 악마나 신선 장군이 아니라 작은 새라니.
파랑새는 세 사람을 열심히 관찰했다.
“들어가죠.”
아름다운 파랑새의 등장에 순간 심장이 떨렸던 해당타타는 저도 모르게 말을 꺼내고는 범한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범한은 머리가 많이 맑아진 상태였다. 이에 잠시 심사숙고를 해보고 한마디 했다.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