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1060화 (1,060/1,108)

1060화 북풍이 사납게 분 밤 (2)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는지 모를 무렵, 범한이 느닷없이 말을 꺼냈다.

“지금처럼 눈보라가 일고 혹한이 이어졌을 테니, 그때 그 사람들은 예까지 오는 동안 절반은 죽었을 거예요. 한데 우리 세 사람은 아직 잘 버티고 있으니 대단한 거예요.”

범한과 머리를 맞대고 누운 해당타타가 말했다.

“스승님께서는 신묘를 찾아간 첫 번째 분이세요. 하여 안지처럼 방향과 길을 아는 경우와 비교하면 안 되지요. 분명 그때는 더 힘들었을 거예요. 하나 후대 사람이 선대 사람보다 늘 강하다는 말이 있잖아요. 더군다나 당신은 항상 우리보다 아는 것이 많은 것 같고요.”

“그런 나를 부러워하지 말아요.”

범한이 눈을 감고 흡족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살면서 전혀 다른 곳에 가보고, 다른 경험을 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귀한 걸 누리는 거예요.”

그러자 왕 십삼랑이 맞장구를 쳤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어서 시 짓기나 할까요? 훗날 사서에 이르기를, 눈보라가 습격해온 날 밤, 하나 되어…… 장대한 시를 지으니, 어쩌구저쩌구, 이 어찌 멋지지 않으리요! 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내가 운을 띄울게요. 한밤 북풍이 거세게 불어와…….”

다음 구절이 없는 걸 보니,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은 범한의 진부한 도발에 넘어가고 싶지 않아 그냥 조용히 있는 거였다.

범한이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웃으며 말했다.

“내 체면을 너무 안 살려주는군.”

“우리는 둘 다 거친 이들이에요. 그런 우리에게 함께 시를 짓자고 하다니. 오히려 당신이 우리 체면을 안 살려준 거라고요. 그런데, 그 구절은 《석두기》의 봉랄자가 쓴 거잖아요.”

“《석두기》는 다 내가 썼다고요. 한데 감히 내가 쓴 글이 아니라고 하다니요!”

범한의 뻔뻔한 말들이 천막 안에서 울려 퍼졌다.

그러자 나머지 두 사람은 침묵으로 범한을 무시해주었다. 어둠 속에서 피곤하게 눈을 뜨고 있던 범한이 씩 웃었다. 그리고 기침이 나와 숨을 바삐 몰아쉬면서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뭐 할 말은 다 했으니, 우리 사이에 알아야 할 건 충분히 알았고…… 한데 줄곧 궁금한 게 있었어요. 두 사람은 살면서 뭘 하고 싶었죠?”

“나는 대종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 후 스승님처럼 동이성 백성들을 보호할 거예요.”

왕 십삼랑은 늘 그러듯이 용맹하고 직설적이며, 자신감 넘치게 대답했다.

“이불에 오줌 싸는 아이는 그렇게 군왕답게 말할 자격이 없는 건데 말이다.”

“나는…….”

해당타타는 빛나는 눈동자로 천막 꼭대기를 바라보며 한동안 머뭇거렸다.

“어려서부터 청산의 후산에서 컸거든요. 그러다 상경성으로 갔고, 천하를 두루 유람하기 시작했어요. 청산 일맥을 빛내고, 우리 대북제 조정이 천추만대 이어지도록 비호하고 싶었어요. 적의 침략을 막고 백성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고 싶었고요.”

해당타타의 음성이 느닷없이 암울하게 변했다.

“한데 스승님께서 임종하실 때 내가 북제 사람이 아닌 호인(胡人)이라는 걸 알았어요…….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 생각을 해보니, 북제가 평안하면 천하도 평안할 테니, 그거면 된 거였어요.”

“과연 두 괴물이 길러낸 마지막 제자들답습니다. 대충 던진 질문이었는데 오로지 천하 생각뿐이군요.”

범한이 탄식을 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사실 당신을 알기 전에는 좋은 전쟁이니 나쁜 평화 따위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우리 오죽 아저씨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셨거든요. 하여 나도 관심을 갖지 않았었지요. 그저 나 혼자 잘 살면 된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범한이 유난히 맑고 담담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생동감 넘치고 신선할수록 좋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사실을 알고 이해한 첫날부터 내 주변 모든 게 꿈같았거든요. 한데 꿈이라면 언젠가는 깨어나게 될 터. 그런 기분이 드니 열심히 또 하루하루를 진지하게 살게 되더라고요.”

“나는 그렇게 자질구레한 것들을 풍성하게 만들면서 꿈에서 깨어날 거란 공포를 희석시켜 온 거 같아요.”

* * *

범한의 뜬구름 같은 말에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범한이 자신의 기이한 처지와 다채로운 삶을 두고 감상에 빠졌다고만 생각해 범한이 무엇 때문에 진정 탄식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나 깨고 싶지 않은 꿈이라면, 그 꿈은 분명 좋은 거겠군요.”

해당타타가 범한을 달래주었다.

그러자 범한이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당연하죠. 이 아름다운 꿈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내가 무엇 하러 이 새도 똥도 안 싸는 곳까지 왔겠어요! 또 무엇 하러 황제 아버지와 싸우고, 또 무엇 하러 용감한 척까지 해가며 대의를 위해 황궁에서 전투를 치르고, 그러면서 조심스레 대경국 조정의 안정을 지키고 있겠냐고요!”

* * *

이 모든 게, 환생 후 이 모든 게 정말로 단순히 꿈일까? 천막 안은 조용했다.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범한만은 잠들지 못했다. 그저 눈을 멀뚱멀뚱 뜬 채 천막 너머에 있는 하늘이나 바라보고, 천막 밖 쌩쌩 부는 눈보라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저 세계에서 죽고 이 세계에서 다시 살아나고. 그래서 범한은 어린 시절 몇 년 동안은 꿈에서 깨어날 수도 있다는 공포 속에서 살았다. 그는 이 모든 게 허구일까 봐, 자신이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일까 봐, 이곳이 온갖 게 다 있는 트루먼쇼일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자신이 잘 짜인 게임 속에 들어와 있는 단순한 뇌파이거나, 데이터 또는 최면 상태에 빠진 꼭두각시일까 봐 두려웠다.

진정 용감한 사람이나 죽음을 제대로 직면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러니 인생 2회 차를 사는 범한에게 진정한 공포는 자신이 정말로 죽었는지 자체를 모르는 거였다.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제대로 암흑의 구렁텅이에 빠져 더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한 거였다.

바로 강산, 호수와 바다, 꽃과 나무, 미인들을 말이다.

담주 지붕 꼭대기에서 옷을 걷으라고 소리치고, 황궁에서 시 3백 편을 짓고. 이는 모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에서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경국이란 강산에서 20년 넘게 살고, 웃고 울고 지내보니 드디어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었다.

비록 아직까지 신묘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확신한 게 있었다. 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정말로 자기 주변에서 일어났으며, 무슨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는 신이 환각으로 만들어 낸 게 아니란 거였다.

이 세상 사람들은 진짜였고, 이 세상에서 느낀 감정도 진짜였다. 그리고 인생, 그리고 슬픔과 기쁨도 진짜였다. 인간 세상에 있어야 할 것들은 가짜일 수 없는 거였다. 만약 정말로 모든 걸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신이 있다면,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어 빛이 있고, 여와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반고께서 오랜 잠에 빠져 세상이 태어났다면, 이 모든 걸 일일이 따져보는 게 무슨 의의가 있을까?

신묘에 가까워질수록 범한은 이런 질문들에서 더 빠져들었다. 그러다 오늘 밤이 되어서야 무언가 좀 알 것만 같았다. 이번 여행에서 신묘는 어떤 궁금증에 대한 답에 대해 물으러 가는 것일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이 더 관심을 갖는 쪽은 아무래도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현실이라고 생각한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 슬픔과 기쁨인 거였다.

알 수 없고, 탐구할 수 없고, 접촉할 수 없고, 관찰할 수 없는 사물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생 세계의 물리학에 나오는 내용으로 범한은 이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밤 문득 이 물리학의 정의를 운명이란 글자에 대입해볼 수 있다고 느낀 거였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범한은 운명의 기로에서 받아들일지 무시할지는 선택할 수는 있었다. 범한은 이 세계에 살고 있고, 이 세계에 있는 사람과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사랑하고 싫어했다. 그러니 이 세계는 분명 진짜였고, 뼛골에 아로새길 만큼 진짜라고 범한은 굳게 믿었다.

밤새 잠들지 못한 범한은 체내 정기가 흩어져 버렸다. 비록 천지간의 원기가 호흡할 때마다 손실분을 매워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빨리 보충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에 날까지 춥고, 마음까지 뒤숭숭 하자 범한은 결국 병이 나 버렸다.

천막 밖에서 눈보라 소리가 멈추고 설원의 새하얀 빛이 천막 안으로 반사되어 들어올 때였다. 범한의 두 뺨은 너무나도 창백했고, 눈언저리에는 건강하지 못한 붉은 기가 돌았으며, 머리는 펄펄 끓었다.

가장 추운 날 제일 우려한 병이 나고 만 거였다. 범한은 해당타타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품에 안긴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처방한 약을 진지하게 마시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약탕기가 할 말이 있다네요.”

“말해봐요.”

미간에 걱정이 한가득 담긴 해당타타는 범한을 조심스럽게 껴안고 아이 어르듯 흔들고 있었다.

“멈추면 안 돼요. 계속 가야 해요.”

“한데 여기 설원은 너무 넓어요.”

천막 문이 갑자기 열리면서 왕 십삼랑이 얼굴을 삐죽 들이밀었다. 그의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가득했다.

밤새도록 북풍이 사납게 불어서 그런지 문을 여니 아직도 눈이 휘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들은 땅에서 날아오른 거였고,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지 않고 있었다. 이에 새파란 하늘 위에는 잔뜩 위축된 태양만 있었다. 공기는 여전히 추웠지만 그래도 드디어 눈이 멎은 거였다.

광풍에 폭설이 내렸고, 눈보라가 휘몰아쳤고, 싸락눈이 바람에 날려 비스듬히 내렸다. 하지만 일행은 돌아갈 필요도 없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러다 다시 귀신같이 스산한 바람이 불며 사납게 눈이 내리고, 저승에서 불어온 바람과 눈이 하늘과 해를 가려 세상을 어두컴컴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 발아래 있던 눈이 무릎 정도까지 올라와 발을 잘못 디디면 온몸이 눈 속에 쏙 빠져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수십 일의 고되고 추운 여정 끝에 별의별 눈이 갑자기 멎었다. 마치 하느님이 인간 세상에 종잇조각 뿌리는 게 유치한 행동이고, 이런 행동으로는 앞만 보고 나아가는 세 젊은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느껴버렸는지 손을 털고 양손을 다시 소맷자락 속에 넣어버린 것만 같았다.

날이 개자 새파랗고 여전히 차가운 하늘이 나타났다. 햇살은 따뜻하지는 않아도 눈이 부셨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과 빙하 전체에서 하얗고 메마른 빛을 반짝이게 했다.

눈보라가 지나갔다고 해서 하늘이 맑고 아름다우란 법은 없는 거였다. 그리고 날이 개었다고 해서 무지개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포레스트 검프는 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많은 일을 겪어야 했고, 다시 제니를 만났고, 그런 후에도 또 무언가 이해가 안 되어 다시 출발해 계속 뛰었으며, 그로써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풍경들을 사이를 뛰게 된 거였다.

눈보라가 멎었다. 그리고 설견들이 즐겁게 짖는 가운데 썰매가 다시 출발했다. 설견들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빙설을 뭉개며 북쪽을 향해 전진했다. 낯빛이 창백한 범한은 썰매 위에 앉아 있었다. 몸의 절반을 해당의 품에 기댄 채 기침을 하면서도 피곤한 눈을 억지로 뜨고 판별해내기 힘든 주변 지세를 살폈다. 그리고 머릿속 지도와 대조를 해가며 방향을 찾아갔다.

체내 한증(寒症)은 점점 더 심해졌다. 지니고 있던 약물을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중상으로 정기를 모두 잃은 범한에게 혹한은 분명 잔혹한 시련이었다. 이에 요 며칠 범한은 밤낮으로 침낭에서 지내면서도 온몸이 냉습하다고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장기를 다 토해낼 듯 목에서 갈라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큰 소리로 거칠게 기침을 해댔다. 그러니 그의 몸은 돌에 계속 갈아대는 칼처럼 언젠가는 견디지 못하고 부서질 수도 있었다.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은 범한의 몸 상태를 걱정해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범한은 강경하고 냉정하게 그들의 생각을 저지했다. 만약 이참에 허공을 떠돈다는 신묘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살면서 언제 또 용기를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였다. 더군다나 자신의 체내 경맥은 계속 엉망인 채로 있는 반면 황제 폐하는 황궁에서 상처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신묘로 가 오죽 아저씨를 찾지 않으면 남쪽으로 돌아간다 한들 아무 의의가 없었다.

그런데 범한에게 이토록 믿음을 갖게 해준 건 고하 대사가 남긴 작은 책자에 담긴 법술 이었다. 범한은 법술 덕분에 북으로 갈수록 천지간의 원기 농도가 훨씬 짙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에 그는 부단히 명상했고, 이제는 허리 뒤쪽 설산의 단전에 기운이 안정적으로 쌓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 범한 입장에서는 지금 포기하면 너무 아쉬운 거였다.

그러므로 현재 세 사람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었다. 지금 이들은 경주를 하는 중이었다. 바로 범한의 병세와 신묘까지의 거리가 서로 경주를 하는 중이었다. 범한은 신묘를 찾으면 분명 몸이 많이 회복될 거라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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