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8화 설원, 혹한, 차분한 범한
“조금 춥기는 해도 그렇다고 우리가…… 이렇게나 껴입어야 하는 겁니까?”
왕 십삼랑이 범한 앞에 서서 가쁘게 숨을 두 번 쉬었다. 두툼한 모피에 가죽 장화까지, 그에게는 너무 불편했다. 범한은 중상을 입어 정기로 추위를 방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왕 십삼랑과 해당타타는 여전히 정기가 차고 넘치는 9등급 상의 강자였다. 이에 어떤 상황에서든 그들은 추위와 더위를 타지 않았다.
범한이 피식 웃고는 왕 십삼랑을 향해 말했다.
“열량과 정기를 조금이라고 더 보존하려 그러네. 절약을 좀 하려고 말일세. 이 추위에서 버틸 수 있다고 장담하지 말게. 우리는 아직 한참을 더 북으로 가야 하니까. 거기로 가면 또 얼마나 더 추울지 누가 알겠는가?”
말을 마친 범한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일부러 눈에 옅은 근심을 드리웠다. 경력 5년, 서산 동굴에서 그는 소은이 죽기 전 한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번 신묘 여행을 위해 충분히 준비해둔 터였다. 하지만 천관에서 나온 지 열흘도 안 되었는데 이 정도로 춥다니. 이건 범한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 기온은 몇십 년 전 소은과 고하가 신묘에 갔을 때보다 더 추워진 것 같았다.
“제일 큰 어려움이 혹한이란 걸 알면서 왜 여름에 출발하지 않은 거예요?”
해당타타가 예리하게 문제점을 짚어냈다. 그리고 범한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다지 절박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여름에 출발하는 게 제일 좋은 선택이었을 터.
범한이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가는 데 두 달가량 걸려요. 한데 막상 도착해서 신묘를 찾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나도 몰라요. 그러니 겨울이 끝나는 시점에 출발해 초여름에 도착하는 게 비교적 안전할 걸요…… 더군다나 나는 반년 동안 암흑 속에 빠져 있고 싶지도 않고요.”
“음. 듣자 하니 신묘는 천지가 뒤바뀐 곳이군요. 반년 동안은 밤뿐이고 반년 동안은 낮뿐이고.”
왕 십삼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여러분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요. 하여 모두 내 말 듣는 게 좋을 거예요.”
범한이 차분하게 말했지만, 그의 말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 그는 일찍이 임대보와 함께 별을 보다가 다시 한번 이곳이 지구란 걸 확인했다. 그리고 이곳이 지구라면 북극에는 분명 극야와 백야 현상이 있을 것이었다.
이 세계의 북극은 너무 추워서 설원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본 사람은 몇 안 되었다. 그러니 살아 돌아온 사람은 훨씬 더 없는 거였다. 이에 전설 속에서 등장하는 현묘의 위치는 현묘하고 신비한 미지의 분위기가 덧씌워진 거였다. 하지만 범한에게 그와 같은 신비함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범한이 옆에 놓인 보따리 안에서 이상한 물건 세 개를 꺼내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에게 건넸다.
“이제 우리는 눈[雪]만 보게 될 거예요. 하나 저 단조로운 색상이 우리 눈에 문제를 일으킬 테니, 편하든 불편하든을 떠나 꼭 착용해요.”
말을 마친 범한이 그 물건을 자기 콧대 위에 얹어서 썼다. 원래는 깨진 유리로 만든 안경이었다. 그런데 안경 위에 검은색 칠을 했는데도 빛은 투과되고 있었다.
해당타타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한동안 말없이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이 갈수록 이해가 안 되어서였다. 더욱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 어디에 쓰는 것이며 눈에 무슨 소용이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해당타타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범한이 하는 행동을 따라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검은 안경을 높이 솟은 콧대 위에 얹어서 썼다.
그들도 수정 안경은 본 적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검은색인 거는 본 적 없었다. 왕 십삼랑이 해당타타를 쓱 보고는 조금 머뭇거리며 검은 안경을 썼다. 세 사람은 순간 젊은 맹인들이 된 것 같았고, 얼핏 보면 또 조금 익살스러웠다. 이에 세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서둘러 갑시다. 한 시진 정도 더 가서 야영해야 해요.”
범한이 품 안에서 조심스럽게 보관 중인 회중시계를 꺼내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 후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눈보라 치고 있는 하늘의 색을 살핀 후 위와 같이 말했다. 하늘의 색과 시간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범한은 이 회중시계가 이 혹한 속에서 며칠을 더 버텨줄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계속 북쪽으로 향했다.
잠시 우우, 하고 소리가 났다. 그러자 잠시 휴식을 취한 60여 마리 설견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짖어대며 설원 깊은 곳을 향해 은색의 모피를 아름답게 출렁이며 즐겁게 내달렸다.
범한은 썰매 위 가죽 상자 위에 몸을 반쯤 기댄 채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리고 눈썹에 엉겨 붙어 얼은 눈이 자신의 얇은 피부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아 참다못해 코를 씰룩였다. 그런 후 목과 소매 등 열린 부분을 더 꽉 여며 눈송이가 단 하나도 제멋대로 몸 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했다.
경력 5년에 신묘의 방위와 가는 길을 안 후, 범한은 이 비밀을 6년 동안 간직해 왔다. 그는 자신이 신묘에 갈 운명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오죽 아저씨를 찾기 위해서일 줄은, 또한 자신과 황제 폐하 간의 결렬 때문일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탐험의 여정이라니!…… 직접적인 목표가 생기니 여러 아름다운 느낌들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썰매가 평평한 설원 위를 빠르게 미끄러져 갔다. 사방팔방에서 설견들의 가쁜 숨소리와 휘이잉 하는 눈보라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도 범한은 잠이 쏟아졌다.
하지만 자면 안 되었다. 설견의 호흡 상태를 꼼꼼히 들으며 그들의 피로 정도를 판단해야 했다. 6년 동안 범사철은 형님 분부에 따라 혹한에서도 버틸 수 있는 물건을 준비했다. 썰매에 실은 음식과 불, 눈에서도 야영할 수 있도록 해줄 특수 제작한 설원용 천막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북문 천관에서 3년 동안 훈련시킨 설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 신묘 행에서 범한은 설견에게 가장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이것만 봐도 범한이 얼마나 꼼꼼한 사람인지 잘 알 수 있다. 그는 준비하지 않는 싸움은 절대 하지 않았다. 이에 신묘는 세인들에게는 하늘에 오르는 것만큼 알현하기 어려운 곳이지만, 범한에게는 준비만 충분히 한다면 조금 외진 곳에 있는 여행지일 뿐이었다.
그러니 범한이 경계하는 건 유일하게 추위뿐이었다. 지금은 소은과 고하 때보다 기온이 더 내려가 있었다. 과거 북위 조정에서는 수백 명으로 이루어진 탐험대를 파견했는데 소은과 고하라는 이 위인들은 인육을 먹으며 버틴 끝에 신묘를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 사람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범한이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는 얼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체내 경맥은 확실히 못 쓰게 되어 몸은 정기로부터 보호받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아무도 없는 황무지에, 그것도 너무나도 추운 설원으로 들어오자 눈보라 속에서 남쪽 지역에 있을 때보다 훨씬 짙은 천지간의 원기를 느낄 수 있었다.
범한의 감각이 이렇게나 예민해진 건 모두 고하 대사가 임종 전에 남겨준 작은 책자 덕분이었다. 만약 그 작은 책자가 없었다면 범한은 천지간의 자그마한 변화도 감지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북쪽으로 갈수록 천지간의 원기는 더 짙어지는 걸까? 이는 범한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잘된 일 아닌가. 범한은 썰매에 반쯤 누워 천천히 천지간의 원기 파동을 빨아들였다. 만약 북방의 원기가 더 짙은 거라면, 어쩌면 2년에서 3년 안에 체내 경맥을 처음 상태로 되돌릴 수도 있는 거였다.
빙설 위에서 썰매가 살짝 흔들렸다. 이에 범한은 공명(空明)한 상태에서 깨어나 살짝 실눈을 떴다. 그리고 검은 안경을 통해 전방에서 눈보라가 치고 있는 대지를 살펴보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과거 북위가 천하 패자이던 시절, 세상 모든 걸 다 갖고 있던 황제는 불로장생의 도를 얻기 위해 신묘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은 다 고하의 제안 때문이었다.
그러다 소은이 이끄는 근위병에서 은연중에 신묘의 대략적 방위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하늘 아래 평범한 사람이 어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신묘를 찾으러 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고하가 이 일을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불로장생으로 북위 황제를 혹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수십 년 전 신묘 행은 아예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하는 왜 신묘에 그리 강한 흥미를 지녔던 걸까? 그것도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말이다. 그가 천일도 고행자라 평생 신묘를 신봉하기 때문에? 아닐 것이다. 고하는 현실주의자였다. 신묘 밖에 있던 그가 신묘에 구금되어 있던 모친 섭경미와 순식간에 협의를 체결한 것만 봐도 고하 대사의 신묘를 향한 공경심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범한이 검은 안경 아래에 있는 눈을 더 가느다랗게 떴다. 고하 대사는 그 작은 책자를 언제 획득한 걸까? 설마 그때 이미 북방의 천지 원기와 관련한 무언가를 알고 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신묘로 가서 이 모든 파동의 원천과 진상을 알아보려던 걸까?
* * *
눈보라가 갈수록 거세지고 기온도 갈수록 떨어졌다. 가끔씩 보였던 백양과 설호(雪狐)도 혹한을 피해 어디로 갔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에 황량한 설원에서는 이 대오의 설견들만 눈보라를 헤치고 썰매를 끌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범한이 있는 썰매에서 두어 차례 억누르고 내뱉는 기침 소리가 났다. 이 정도의 저온에서는 일반인은 버티기 힘든 거였다. 그런데 범한은 아직 부상에서 회복도 못 했으니 확실히 견디기 힘들었던 거다.
앞쪽 썰매에 있던 왕 십삼랑은 범한의 기침 소리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데 경계하던 눈초리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그가 갑자기 검의 빛이 되었다. 두툼한 외투를 입은 채로 공중을 가르고 나아간 거였다. 그가 설견 대오 최전방으로 가 살짝 튀어나온 빙설 아래쪽을 인정사정없이 찔렀다.
그러자 설견들이 한동안 소란을 떨고는 차분해졌다. 그중 몇 마리는 과감하게 왕 십삼랑 주변을 에워싸고는 코를 박고 냄새를 맡더니 몇 차례 날카롭게 짖었다. 기분이 좋아 죽겠다는 의미였다.
왕 십삼랑이 왼손에 들고 있던 검을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 설견들이 눈 속에서 끄집어낸 새하얀 거대한 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중에 쓸 예비 물품을 확보하는 것. 이는 범한이 왕 십삼랑에게 부여한 임무였다.
설견들은 사람의 명령을 정말 잘 들었다. 그래서 눈 속에 있는 백곰을 물어서 끄집어 내놓고 주둥이에 묻은 핏물을 핥으며 행복해하기만 할 뿐 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 주인들이 고기 대부분을 자신들에게 줄 것임을 알아서였다.
“저녁으로 곰 발바닥 구이를 먹을 수 있겠군.”
썰매에 앉아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이 백곰을 빈 썰매에 묶는 걸 지켜보고 있던 범한이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건 간주곡일 뿐이었다. 썰매 대오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범한의 호각 소리에 빙설로 뒤덮인 빙하를 따라 북서 방향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썰매에 앉아 범한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해당타타의 눈에서 잠시 근심이 스쳤다. 범한이 지금 이 상태의 몸으로 얼마나 더 버텨줄지 알 수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담긴 우려는 불가사의하게도 순식간에 깊은 탄복으로 변해 버렸다. 해당타타는 평생 누군가에게 탄복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범한의 계획이 다 서 있다는 듯한 여유로운 모습, 차분하게 길을 안내하는 모습, 마치 모든 걸 손바닥 안에서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듯한 태도에 결국에는 살짝 탄복하고 말았다.
‘왜 범한은 신묘에 도착할 거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 걸까? 왜 그는 조금도 신묘를 경외하지 않는 거지? 설마 사부님께서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섭씨 아가씨가 정말로 신묘에서 도망 나온 선녀이기 때문일까? 하여 범한이 신묘로 가는 건…… 단순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라서?’
범한이 눈을 반쯤 감고 체력을 아끼기 위해 몸을 눕혔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살랑살랑 물결이 일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신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께서 신묘로 가 그곳 물건을 훔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는 제일 친하게 지낸 오죽 아저씨가 신묘 사람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이 세계에서 신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에 신묘 행에 나선 그는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모든 진상을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고, 심지어는 자신이 환생하게 된 진짜 이유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이는 허황된 바람일 수 있었다. 일단 신묘부터 찾아야 하니 말이다. 과거 고하와 소은은 이 대륙의 최강자였고, 더군다나 나이며 체력이 최상의 상태인데도 신묘를 찾는 데 온갖 고생을 했었다. 그런데 범한은 그때의 그들과 비교해 더 나을 게 없었다. 그렇다면 범한의 믿음은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아는 게 힘이라고 했다. 범한은 이 세계의 다른 누구보다 전생의 지식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현묘한 것들이 그의 눈에는 단순한 자연 현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지식 덕분에 범한은 소은의 입에서 나온 정보로 지도를 그릴 수 있었고, 그래서 길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썰매 위 범한이 작년에 황실 금고에서 만든 최신 나침반을 조심스레 소맷자락에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후 눈이 날리는 공중에 손가락을 뻗어 위로 한 번 아래로 한 번 오르락내리락하며 두 개의 호선을 그린 후 자그마한 소리로 혼잣말했다.
“물(勿)자 닮았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