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6화 여정에 오르다 (2)
“안지는…… 이미 좀 알고 있는 게 있나요?”
해당타타가 두서없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범한은 곧장 알아듣고는 눈을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후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이미 알고 있었다면, 황궁에서 그리 처참하게 패하지 않았겠지요.”
범한의 말에 마차 안에 있던 젊은이 셋이 동시에 침묵했다. 그들은 모두 눈보라치던 날의 황궁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곳에는 천하에서 최대 강자에 속하는 세 사람이 있었다. 이들 가장 잠재력 있는 젊은 고수들이, 그리고 천하제일 자객까지 가세한 상태에서 밝은 황색 옷의 형체와 맞섰는데도 변함없이 별 볼 일 없었다니.
세 사람에게 경국 황제의 그 날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마차 안 세 사람은 황제에게 부상을 입히는 데 성공해 놓고도 여전히 그가 어려운 상대로만 여겨졌다.
“세상에 진짜 신은 없어요. 황제 폐하께서 나보다 더 심각하게 다치셨거든요.”
범한이 내뱉은 담담한 말에 질식할 것만 같았던 마차 안 분위기가 깨졌다.
“만약 지금 내가 폐인이 되지도 않고, 십삼랑도 몸이 멀쩡하고, 당신도 피를 쏟지 않았다면, 사실 지금 제일 좋은 선택은 다시 경도로 돌아가 공격하는 걸 거예요.”
그러자 해당타타가 살짝 웃으며 이런 대담한 계획은 범한만 생각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문득 범한의 창백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다친 거는 상태가 어때요?”
“십삼랑보다 처참해요. 아예 원래 상태로 돌아갈 여지가 없거든요.”
범한이 자신의 다친 상태에 대해 계속 차분하게 설명해 나갔다.
“하나 그런 것 따위 전혀 개의치 않아요. 싸우는 걸로는 황제 폐하를 이기지 못해요. 그건 어린 아이가 이기지 못하는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거랑 같아요. 하여 그럴 때는 집안 내 더 힘센 친척을 찾아가 도움을 구하는 게 만고불변의 법칙이에요.”
해당타타는 범한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피곤함이 살짝 가신 맑은 호수 같은 눈망울로 차분하게 물었다.
“황궁 광장 앞에서 천둥소리가 났는데…… 그게 뭔지 알고 있나요?”
“상자.”
범한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내 상자예요. 아마 고하와 사고검께서도 두 사람에게 그 상자에 대해 언급한 적 있을 거예요.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줄래요? 나도 지금 그 상자가 누구 손에 가 있는지 모르니까요. 더군다나 그 상자를 너무 무시무시한 걸로 여기지 말아줬으면 해요. 만약 그게 정말로 신의 무기라면 황제 폐하께서는 중상이 아니라 진즉에 돌아가셨어야 해요.”
해당타타가 한동안 침묵한 후 물었다.
“줄곧 이해 안 되는 게 있었어요. 안지와 경국 황제가 서로 견제하고 압박 하는 사이라면, 둘 다 경국에 내란이 일도록 하지는 않을 텐데, 그런데도 왜 안지는 경도를 떠나 은거하기보다는 다시 공격하려는 쪽을 선택한 거죠?”
범한은 오랫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까보다 더 차분해진 눈빛으로 온화하게 대답했다.
“첫째, 황제 폐하께 내가 그분과 평등하게 담판할 자격이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에게 그분과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눌 용기가 있어야 했어요. 둘째, 경도 밖으로 나가 은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기는 해도, 황제 폐하께서는 내가 통제 범위를 벗어나는 걸 원치 않으실 거예요. 그리고 제일 관건은…… 내가 싫어서 그래요.”
범한이 눈을 감고 그윽하게 말을 이어 갔다.
“섭류운과 비개 스승님처럼 바다로 나가 떠돌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대륙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는지 신경 안 써도 되요. 하나 나는 그런 건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러니까, 아무도 그분을 막지 못하면 역사에는 그분이 옳다고 기록될 거 아니에요.”
이는 승리한 자가 무조건 옳고 패한 자는 무조건 그르다는 이치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니 아무도 경국 황제를 저지하지 않는다면, 역사에는 섭경미의 숨결이 전혀 남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진평평도 온갖 악행을 저질러 절대 용서할 수 없기에 결국에는 능지처참당한 환관 놈이라고 낙인찍힐 것이었다.
범한은 같은 고향에서 온 영혼이 이 대륙에서 노력해 이룬 결과가 깨끗이 지워져 버리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용감하게 시도는 해보려 한 거였다.
“어떻게든 한 번은 시도는 해봐야 했어요.”
범한이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고 말을 이어 갔다.
“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아쉬운 건 없어요. 나중에 죽을 때 이번 생은 용감하게 살았노라고 나 자신에게 말할 수는 있잖아요.”
난로에 있던 약탕기가 소리를 내며 끓자 마차 안에 약 냄새가 가득 찼다. 해당타타가 멍하니 범한을 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면,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현 국면을 보면, 범한이 맹렬히 공격을 펼쳐 성공하려던 순간 실패하고 만 거였다. 경국 황제에게 중상을 입혀 황궁에서 누워 지내도록 만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죽이지는 못해서였다. 다시 말해, 경국의 강대한 국력도 그대로이므로 그 누구도 저 수사자에게 정면으로 대항할 수 없는 거였다.
그러므로 황제 아버지가 계속 약속을 이행하도록 만들려면 범한 입장에서는 경국 조정을 격노하게 할 그 어떤 일도 하면 안 되었다. 이에 지금 범한 앞에 놓여 있는 길은 작은 산촌에 가려져 있는 것 같아도 실은 그에게는 인생의 남은 길이었다.
“여러분이 흥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신묘로 갈 겁니다.”
왕 십삼랑이 눈을 반짝였다. 해당타타는 살짝 놀랐지만 그래도 웃어주었다.
“왕 대인, 그 길은 힘들 거예요. 하여 나는 마차를 타고 갈 겁니다.”
“가는 길을 알아요?”
범한이 웃음이 터져버렸다. 하지만 동시에 기침도 두어 번 하고 말았다.
그러자 해당타타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웃으며 대꾸했다.
“전에 강남에서 안지가 말해준 적 있잖아요. 북쪽에 있겠죠, 뭐.”
* * *
무도하 강에서 국도로 들어갔을 때였다. 도로에는 아직 눈이 남아 있었고 그 옆 자라난 관엽림은 점점 침엽수림으로 변해갔다. 눈꽃이 아름답게 핀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은 북제 도읍이자 조정이 있는 상경성까지 이어져 있었다.
오랜 시간 온갖 고난을 이겨낸 상경성 성벽에는 눈이 덮여 있었다. 현재 경국과 강남 일대는 이미 봄을 맞아 새싹과 풀이 자라나고, 벌레가 울고 날이 따뜻하건만. 북제는 아직도 연일 눈이 흩날리고 있어 기온이 올라갈 수도 없었고, 세상도 거의 대부분 하얀색으로 덮여 있었다.
밝은 황색의 어산(御傘)이 눈 속에서 핀 한 떨기 꽃처럼 상경성의 오래된 성벽 위에 피어 있었다. 어산 위로는 하늘에서 나부끼는 작은 눈송이들이 소리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편 어산 아래에는 북제 황제 폐하와 그가 가장 총애하는 리(理) 귀비가 화려한 털 모피를 입고 서 있었다. 그들은 북제 조정의 무수히 많은 내관, 궁녀, 대신들 앞에 서서 상경성 앞으로 난 길을 차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평범하게 생긴 마차가 서남쪽 방향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자 상경성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상인 대열처럼 보이는 대오가 다가가 그들을 맞았다.
북제 황제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두 손은 뒷짐을 지고 있었다. 살짝 하얀 얼굴에는 건강해 보이지 않는 붉은 기가 있었다. 마차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참다못해 가볍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데 잔뜩 억누르고 내뱉은 거라 바로 옆에 있는 사리리 빼고 들은 사람은 없었다.
사리리는 이불로 꽁꽁 싸맨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아이 머리에 씌워 놓은 방한용 모자를 정리해주고 있었다. 그러다 옆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오자 그윽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날이 너무 추운데, 계속 이런 식이면…… 유모들에게 홍두반(紅豆飯: 팥밥)부터 데려가도록 할까요?”
경력 11년부터 경력 12년 사이, 경국이 변화무쌍한 정세 변화를 겪고 있음에도 북제 조정은 참고 인내하는 태도만 보였다. 그리고 상삼호에게 대군을 움직여 범한을 도와 동이성 국면을 안정시키도록 한 게 전부였다. 북제 조정이 경국 황제와 범한 부자간의 반목을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지 않은 건 더 큰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제일 관건은 북제 황제가 작년 가을부터 중병에 걸린 탓이었다. 그런데 그 병은 경국이 상경성으로 석방한 청산 목봉 선생도 고치지 못하는 거였다. 이에 북제 황제는 수개 월 동안 병으로 몸져누워 있느라 신하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으니, 그가 국사를 돌볼 여력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에 조정 일은 대개 태후가 처리했다. 한편 북제 황제가 병이 걸린 지 수 개월이 되었을 무렵, 다행히 북제 신민들이 걱정하던 황실 혈육 관련 소식도 들려왔다. 황제 폐하께 총애 받는 리 귀비가 회임을 했고 무사히 공주를 낳았다는 내용이었다.
어쩌면 이 기쁜 소식 덕분에 북제 황제의 병이 점점 나은 것일 수도 있어 북제 조정과 민간에서는 크게 기뻐했다. 비록 리 귀비가 태자는 낳지 못했지만, 그래도 백성들은 일단은 하나라도 낳았으니 나중에 자연히 더 낳게 될 거라 여겼다.
북제 공주에게는 아직 정식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북제 황제와 리 귀비는 이 옥을 깎아 놓은 듯 어여쁜 아이에게 홍두반(紅豆飯)이란 아명을 지어주었다. 이 아명은 전혀 예쁘지도 않을뿐더러 황가의 존엄까지 크게 손상해 내관과 궁녀들이 이러쿵저러쿵해댔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사리리의 말에 북제 황제가 조금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사리리 품 안에 있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살짝 화를 냈다.
“요 조그마한 게 정말 귀찮게 하는군.”
하지만 사리리는 속으로만 활짝 웃었다. 그리고 품속의 홍두반이 황제 폐하를 귀찮게 한 거라면 다행히 모든 게 평온히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사리리가 슬픔과 원망이 담긴 눈으로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몸은 부어 있었지만 그건 산부 흉내만 낸 것일 뿐. 결국 자기 뱃속에는 그 어떤 씨도 들어 있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황제 폐하께서 왜 이 추위를 무릅쓰고, 게다가 공주까지 안고 나와 성벽 위에서 저 마차를 보고 계시는지 이유를 알고 있었다. 저 마차는 북제 영토로 들어온 이상 북제 조정과 연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북제 황제와 사리리는 저 마차가 이제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누구도 저들이 돌아오는 걸 반기지 않았으니, 황제 폐하께서는 이렇게라도…… 저 남쪽에서 온 남자에게 떠나기 전 이 아이를 보여주고 싶은 거였다.
* * *
상경성 성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로 위는 아까와는 풍경이 딴판이었다. 혼자 덩그러니 나타난 마차와 상경성에서 나간 상인의 마차 대열이 만나자 두툼한 모피를 걸친 범한이 오랜만에 마차 밖으로 나왔다. 범한은 앞에 있는 소년 때문에 만감이 교차해 일단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순간 눈가가 촉촉해져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경력 4년 봄부터 지금까지 눈 깜짝 할 사이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에 눈앞에 있는 범사철은 예전의 얼굴에 뭐가 잔뜩 나고 미운 짓만 골라 하는 애에서 성숙하고 진중해 제법 대상의 풍모가 느껴지는 젊은이로 변해 있었다. 이 순간 범한은 자신이 늙은이가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들었다. 범한이 앞으로 걸어가 별말 않고 아우를 와락 끌어 앉았다.
형제가 함께 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래도 범한은 사철을 교육하고 타이르는 걸 게을리하지도, 서신을 끊은 적도 없었다. 범한은 아우가 홀로 북제에서 지내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옥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않는 법이니, 범한은 어떻게든 아우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접고 참고 견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