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5화 여정에 오르다 (1)
왕계년은 이미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이 정도 눈보라로 피곤해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이 늙은이는 생긴 건 비쩍 마른 원숭이 같아도 근육이 뼈처럼 단단해 힘과 정신력이 대단했다. 이에 오랫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넜어도 그는 여전히 쌩쌩했다.
그런데 마차를 타고 변경 근처까지 오려면 무수히 많은 경국 조정의 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에 일행은 먼 길을 오는 동안 계속 변장하고, 길을 뚫고, 문서를 위조해야 했는데, 이는 모두 체력 좋은 감찰원 양 날개 중 한 사람인 양계년이란 대단한 인물 덕분이었다.
과거 왕계년은 대륙 북쪽을 종횡무진 하던 강양대도였다. 그러므로 이런 일에 그는 누구보다 적임자였다. 마차가 산간 평지를 지나 눈 내린 계곡 위로 난 작은 다리 위를 건너자 왕계년이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국경선을 넘어 북제 영역으로 들어와 더는 마차 칸 안에 있는 저 대인이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게 되어서였다. 하지만 왕계년은 이내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대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이해가 안 되어서였다. 분명 경국 사람인데, 적국의 영토를 밟고 나서야 안전하다고 느끼다니.
타고 있는 마차가 들썩이는 걸 느꼈는지 안에 있던 범한이 잠에서 깨어났다. 여러 해 감찰원 일을 해서 그런지 마차 바퀴와 맞닿은 노면이 그동안 힘겹게 도망칠 때 달렸던 곳과 다르다는 걸 범한은 분명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지금 체내의 정기는 전무해도, 몸에 아직 미묘한 촉각을 느낄 수 있는 3만 6천 개의 모공과 근육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범한이 덮고 있던 두툼한 양가죽을 끌어당기며 가볍게 두 번 기침하고는 창문 한쪽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마차는 눈에 익은 나무다리를 지나고 있었고, 경치가 완전히 다른 곳이 보였다. 하지만 범한은 계곡물의 흐름, 양쪽에 펼쳐진 절벽, 작은 언덕의 모양을 통해 마차가 지금 무도하 강을 건너고 있음을 정확히 알아차렸다.
과거 범한은 젊은 시선으로 북제 사절단으로 왔었다. 그때 그는 소은을 쫓아 이곳까지 왔고,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해당타타를 만났다. 그러니 어찌 잊었겠는가?
범한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얇은 입술은 색상이 거무튀튀했다. 체내 부상을 입은 게 아직 호전될 기미가 없는 거였다. 지금 그의 경맥은 황제 폐하의 손가락 공격에 산산조각 나고 구멍이 뻥뻥 뚫린 상태여서 몸을 전혀 보호해주지 못했다. 이에 연일 바삐 움직이며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 마차 밖으로 강추위까지 찾아오자 범한은 다시 몸져눕고 말았던 거였다.
범한은 두툼한 양피로 몸을 둘둘 말고 머리만 내놓고 있었다. 마차 칸 안에 작은 난로가 있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열기를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다리 너머에 있는 북제 영토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볍게 입김을 후 불고는 사색에 빠졌다.
이번에 황제 폐하와 정면 대결을 펼칠 때 범한은 자신이 이번 생에 쌓은 최고의 실력을 모두 발휘했지만 손가락 하나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결과 체내 경맥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체내에 쌓여 있던 천일도의 자연스러운 정기는 오장육부로 모두 흩어져 더는 응집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지금 범한에게 유일하게 쓸모 있는 건 고하가 남겨준 신비한 작은 책자뿐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천지간의 원기가 너무 희박해 지금 회복세라면 대체 몇 년이 걸려야 치료가 가능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도하 강을 지나면 멀지 않은 곳에 북해가 있었다. 이에 체내 경맥이 모두 부서져 있던 범한은 자연스레 해당타타가 떠올랐다. 과거 체내 경맥이 산산조각 났을 때 강남에서 해당타타가 자신을 세심하게 치료하고 돌봐준 적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상 정도가 심했고, 해당타타도 경도에서 도망 나오지 못한 터였다.
범한은 그림자의 안전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림자와 자신 사이의 비슷한 점에 대해 알고 있어서였다. 그림자는 일단 인산인해 속으로 뚫고 들어가면 어떤 신분으로든 안전하고 편안하게 잘 지낼 사람이었다. 하지만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은 달랐다. 그들 두 사람은 천하 젊은이들 중에서는 최고수로 꼽히는 강자이지만,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서는 연구를 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경도 쪽 소식과 관련해 범한은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언씨 가문 저택 내 가짜 산에 숨어 있을 때 노대인 언약해가 매일 경도 근황을 말해주어 범한은 황제가 이미 깨어나 있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경도 밖으로 나온 후 그와 왕계년 두 사람은 말없이 전진하기만 했고, 감찰원 옛 부하 및 천하 각 측에 있는 범한에게 속한 세력과는 자발적으로 연락을 끊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범한과 황제사이에 체결한 협약의 일환이어서였다. 범한은 자신이 살아 있는 한 황제 폐하가 그들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자발적으로 그들과 연락을 취하는 건 오히려 타당치 못한 행동이었다.
살을 에는 찬바람이 창밖에서 밀려들어왔다. 그러자 범한이 눈을 더 많이 가느다랗게 떴다. 2월 말인데 날씨가 이렇게나 춥다니. 범한으로서는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에 범한은 이제 곧 신묘로 떠날 텐데 지금의 이 허약한 몸뚱이로 어떻게 뼛골을 스며드는 추위를 견딜 수 있을까라며 걱정했다.
범한이 손과 발을 모두 움츠려 두툼한 양가죽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런 후 피곤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창가에 기대어 얼굴을 때리는 눈을 그대로 맞았다. 그리고 다리 건너에 있는 겨울 숲을 바라보며 그날 숲에서 꽃바구니를 들고 차분하게 서 있던 낭자를 떠올렸다. 만약 그녀가 지금 곁에 있다면, 아니면 함께 신묘에 가준다면 마음이 훨씬 홀가분할 텐데.
그런데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이는 마치 범한을 위해 있는 말 같았다. 범한은 새하얀 겨울 숲에서 홀연 나타난 알록달록한 형체에 순간 자신의 눈이 잘못 된 줄로만 알았다.
“약 드셔야죠.”
나무다리를 지나자 마차가 조심스럽게 멈추어 섰다. 그리고 왕계년이 손을 비비고는 마차 칸 안으로 들어와 그동안 난로 위에 두고 데운 탕약 한 그릇을 범한 앞으로 가져왔다. 아까 범한이 기침을 해 왕계년은 걱정을 하던 차였다.
범한이 양가죽 안에서 손을 꺼냈다. 그리고 웃으며 창밖 멀리 보이는 겨울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약은 저기 있어요!”
* * *
범한은 순간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무도하 강에서 해당타타와 함께 자신을 기다려준 이 중에…… 왕 십삼랑도 있어서였다. 그런데 태극전에서 황제를 공격하러 돌진했던 것과 달리, 조용하고 굳건한 왕 십삼랑은 해당타타 뒤에서 순식간에 나타나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마차를 차분하게 보기만 할 뿐이었다.
마차 가림막을 열어젖히자 눈이 안으로 날려 들어왔다. 범한이 생사를 함께 한 두 사람을 향해 억지로 입꼬리를 움직여보았다. 그런데 웃고 싶은데 웃음이 나지 않아 결국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두 사람이 나보다 더 빨리 와 있을 줄이야.”
“안지보다 늦게 경도에서 빠져나왔어요.”
해당타타가 두툼한 솜옷 위에 엉겨 붙은 얼음을 떨어내고 범한 옆에 앉았다. 지난 달 경도에서의 만남을 떠올려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낭자는 차츰 재회의 미소를 거두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이 경도를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경도 조정에서 수색을 덜하더라고요. 하여 우리에게도 기회가 온 거였어요.”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두어 번 기침을 했다.
“살았으면 된 것이니, 우리 사이에 굳이 고맙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한데 경도에서의 일은 원래 당신네 괴물 같은 스승님들과도 관련이 있으니, 굳이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한다면 두 사람이 나에게 해야 할 겁니다.”
그러자 해당타타가 한숨을 내쉬고는 범한의 창백한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안지가 조금 더 성숙해 질 줄 알았는데. 아직도 그런 농담이나 즐기다니.”
“성숙요? 나는 태어나기 20년 전부터 성숙한 사람이라고요. 어렵서리 청춘의 맛을 다시 즐기고 있는 판이니, 어찌 그냥 버릴 수 있겠습니까.”
범한은 왕 십삼랑을 본 순간 그의 몸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황제 폐하께 공격 받은 왼팔이 원래대로 회복되지 않을 것 같았다.
검에 온 마음을 바치는 검객에게 칼 쓰는 손이 못쓰게 되었다는 건 분명 치명타였다. 하지만 왕 십삼랑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다음과 같이 부드럽게 말했다.
“댁네 어르신께서는 정말 너무 패도적이시더군요. 내 오른팔 경맥이 전부 뒤틀리고 엉망이 되어 아예 치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는 길에 시도는 해봤는데, 효과는 그저 그랬어요.”
해당타타가 왕 십삼랑을 걱정스럽게 잠시 바라보았다. 그동안 두 대종사가 가장 아낀 제자는 함께 포위당해 있으면서 서로 꽤 친해져 있었다.
범한이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좀 봐주겠네.”
말을 마친 후 범한이 손가락 두 개를 왕 십삼랑의 맥소(脈所)에 올렸다. 그리고 용의 발톱이 구름에서 나와 위로 미끄러져 올라가듯 힘이 들어가지 않는 왕 십삼랑의 오른팔을 섬세하게 짚어나갔다. 그런데 범한의 표정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왕 십삼랑이 조용히 있다가 대꾸했다.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다쳤으니, 별일 아닙니다.”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경성에서 좋은 금침(金針)을 사다가 시도를 해 봐야겠…….”
범한이 바로 몸을 돌려 주먹으로 입술을 막고 두어 번 기침을 한 후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어 갔다.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우리끼리 감출 게 뭐 있을까요? 천일도 법문을 왕 십삼랑에게 전수해 줍시다.”
그러자 해당타타가 아무런 대꾸도 않고 가만히 있다가 한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천일도 정기는 손상된 경맥을 회복시키는 데 유독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청산 일파 외에는 외부에 알려주지 않는 비기인데도 해당타타는 과거 범한에게 사사로이 전해주었다. 이에 그녀는 검객인 왕 십삼랑의 삶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왕 십삼랑이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범한의 말을 잘못 들었나 싶어서였다. 이에 평소 외부 사물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장렬한 사내대장부 왕 십삼랑도 지금만큼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고요?”
“확신할 수는 없고. 그저 시도라도 해보자는 것이네.”
범한이 피로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적어도 밥 먹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겠지. 하나 만약 처음 경지로 돌아가고 싶다면, 어쩌면 충분하지 않을 수도……. 이제는 왼손도 쓸 수 있도록 다시 수련을 하게. 옛날에 형무명이란 자가 있었는데 왼손을 잘 쓰는 걸로 유명했지. 물론 그의 오른손은 더 꽁꽁 숨겨 두고 안 쓴 거지만 말이야. 자네가 양손을 다 쓸 수 있게 연마한다면 정말 대단해질 거야.”
마차 안에서는 순간 침묵이 흘렀지만 왕 십삼랑은 느닷없이 차분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면 우선 왼손부터 연마해보겠습니다. 이후 시간이 나면 오른손도 다시 연마하고요.”
해당타타가 눈을 감고 있는 창백한 얼굴의 범한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수 없이 많은 갖가지 감정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녀는 몇 년 동안 범한과 떨어져 있으면서 거의 만나지 못했고, 이에 서로 많은 말을 나누지는 못했음에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해당타타는 자신이 범한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던 걸 알게 되었다.
경도 황궁에서 있었던 일로 해당타타는 너무 놀라운 걸 발견해버렸다. 지금의 범한은 세인이 알고 있는 9등급 상의 경지를 은근히 뛰어넘어 자신과 왕 십삼랑을 압박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건 범한이 경국 황제와 수 회합을 정면으로 겨루고, 더 나아가 그에게 상처를 입힌 점만 봐도 알 수 있는 거였다. 그러니 범한의 실력은 이미 무시무시한 단계에 와 있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