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4화 북으로 향하는 마음 (3)
언빙운은 웃고 있었지만 음침하고 싸늘하고 씁쓸했다.
“당신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요. 당신은 북제 사람인데, 대체 언제부터 우리 대경국 조정에 충성하고 있던 겁니까?”
저택 정원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런데 이곳 주인은 침소나 차분히 지켰다. 언빙운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안고 있던 심완아가 용감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 그녀의 두 눈에는 원망과 독기가 가득했다.
“왜냐고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상공의 아내란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시지요! 그렇습니다. 그 일은 상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요. 하나 그 일과 범한이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실 수 있습니까?!”
심완아가 쩌렁쩌렁 울리게 말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비통하고 원한에 차 있었다. 그녀가 언빙운의 뒷모습을 향해 고통스럽게 울먹였다.
“제 아버지는 북제 황제가 상삼호를 시켜 돌아가시게 한 겁니다. 또한 이내 온 집안의 가산이 몰수되어 집안이 망하고 사람들이 죽었지요……. 상공께서는 집안이 망하고 사람들이 죽는다는 게 뭔지 모르십니다! 집 안에 있던 2백여 명이 몰살당했습니다! 3살밖에 안 된 제 아우도 죽었고요! 이게 다 누구 짓일까요?”
“그건 북제 황제가 한 짓이지요. 그리고 범한과 해당타타란 여인이 꾸민 짓입니다. 상공께서는 제가 그 정도도 모를 줄 아셨습니까!”
심완아의 눈에는 원망과 원한의 빛이 가득했다.
“하나 제가 뭘 할 수 있을까요? 범한은 상공의 상사이자 친구이지요. 직접 언급한 적은 없으셨지만, 상공께서 실제로 가장 대단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이런데도 제가 상공께서 제 집안 식솔 2백 명의 복수를 해주시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그런 저에게 그가 굴러들어왔고 또 발각된 것입니다. 하여 저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을 뿐입니다.”
말을 마친 심완아는 이제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앞에 있는 저 남자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낙인 자신이 복수심 때문에 이리 대담한 일을 저지른 것에 놀라 온몸에 맥이 풀린 모습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언빙운은 몸이 살짝 굳어 버려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이에 속으로 한숨이나 내쉬고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후원에 있는 가짜 산은 군사들이 다 파헤쳐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안에 있는 밀실에는 먼지만 가득할 뿐 사람이 들어가 있던 흔적은 없었다. 이에 군사들은 가만히 서서 멍하니 밀실 안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란한 소리에 깜짝 놀라 방 밖으로 나온 언약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범인 체포 책임자인 군사 및 궁정 고수를 향해 찬바람이 쌩쌩 돌게 말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 * *
“그 저택에 숨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 걱정 같은 건 안 했다니까.”
마차 안에 있는 범한은 푹신한 곳에 몸을 편히 기대고 있었다. 비록 체내 경맥은 여전히 엉망진창이라 폐인보다도 못한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이 기분 좋은 상태를 망칠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경도 밖으로 나와 사방에 펼쳐진 경도의 생동감 넘치는 풍경을 보게 되니 마냥 기분이 좋았던 거였다.
징해자작부를 떠날 때 범한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또한 경력 5년 북제 상경성에서 자신이 심씨 가문을 멸문지화로 이끈 참담한 일을 심완아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범한은 언 노(老)선생의 능력은 믿고 있었다. 언씨 부자는 감찰원에서 제대로 묵은 사람들이었으니, 자신들의 저택 안에서 일어난 이상 징후를 감지해내지 못할 리 없다고 말이다.
이에 강력한 능력을 지닌 언씨 가문에서는 기회를 엿봐 범한을 경도 밖으로 내보낸 거였다. 지금 범한이 타고 있는 마차는 산야에 난 아직 여명이 닿지 않은 어두운 길로만 운행하고 있었다. 마차를 모는 사람은 감찰원 관원이었지만 범한이 알던 옛 부하도 계년조 소속 노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언빙운 부자가 이번 일을 믿고 맡겼다는 건 이 관원이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충성스러운 사람이란 거였다.
“그거야 원장 대인께서 홍복을 누리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마차를 몰고 있는 감찰원 관원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게 아니라면, 원장 대인께서는 대인을 경도 밖으로 내보내드릴 기회를 찾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두 차례 언급한 원장 대인 중 앞에 언급된 게 당연히 범한이었고, 뒤에 언급된 게 언빙운이었다. 말을 마친 관원이 한동안 아무 말도 없다가 갑자기 다시 입을 뗐다.
“원장 대인, 마지막으로 하나 여쭙겠습니다. 북제로도 안 가실 거고, 조정도 배반 안 하실 거라 그분께 약속하셨는데, 정말 지키실 수 있으십니까?”
“이런 염병할 얼음덩어리 같으니…….”
범한이 화가나 욕을 날리고는 말을 이어 갔다.
“지킬 거니까 그리 말한 거지! 내가 늙은 절름발이처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하는 놈도 아닌데 원!”
“경도로 돌아가거든, 이 서한을 언빙운에게 전해주게. 어떻게 해서든 황제 폐하의 책상 위에 올라가 있어야 하네.”
범한은 한동안 생각을 해보다가 말을 꺼낸 후 얇은 서한을 그 관원에게 건넸다.
서신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은 간단했다. 자신은 이미 경도를 떠났으니, 그날 밤 황제 폐하와 협의한 내용은 이행되어야 한다는 거였다. 즉, 천자의 일언은 사두마차도 따라잡기 힘들다고 말했던 그 약속을 지켜달라는 거였다. 그리고 범한은 황제 폐하께 옥체 강녕하시란 말도 빼놓지 않았다.
범한이 이런 부질없는 짓을 한 건 아직 경도에서 나오지 못한 몇몇 친구들 때문이었다. 범한도 알다시피 황제 폐하의 주목표는 그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일단 자신이 살아서 경도를 빠져나가면, 아무리 국력이 더 소모되고 이런저런 말이 나돌아도 왕 십삼랑을 포함한 이들은 경도에 남아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상태가 되어서였다.
마차는 경도 외곽에서 몇 차례 돌았다. 그렇게 몇 차례 길을 돌고 돌아 산세를 따라 난 비밀 길과 감찰원이 준비해 둔 몇몇 전환점을 거치니 범한은 딱 사흘을 만에 어느 큰 주(州)의 주성 외곽에 와 있었다.
당연히 마차는 성 안으로 들어갈 리 없었다. 대신 이곳에서는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하필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 범한은 웃음이 터져버렸다.
“당신이 왔으니, 내 더 많이 안심이 됩니다.”
북제 상경성에서 경국으로 돌아온 후 줄곧 경도 밖에서 인수인계를 준비하고 있던 이는 왕계년이었다. 그는 노인으로 분장을 해 얼굴에 온통 주름 투성이었다. 왕계년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범한의 부상 정도를 살폈고, 이에 농담할 생각이 싹 달아나 고개만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떻게 변장해야 할까요?”
왕계년이 품에서 연지분과 꽃무늬 옷을 꺼내주며 억지로 웃었다.
“제가 늙은이로 변장했으니, 제 며느리로…….”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떼를 쓰기보다는 그냥 대놓고 받아버렸다.
“자기는 나보다 편한 늙은이로 변장해 놓고는!”
범한이 아직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왕계년이 궁금증을 참다못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대인, 설마 시작할 때부터 경도를 떠날 수 있게 계획을 세워 놓으셨던 것입니까?”
“내가 신선도 아닌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계획이란 건 언제나 변수가 따라갈 수 없는 법이에요.”
범한이 살짝 씁쓸하게 웃고는 곧바로 말을 이어 갔다.
“만약 황궁에서 내가 이겼다면, 당연히 경도 밖으로 나올 필요까지는 없었겠지요. 하나 패배한 이상 어떻게든 살아날 구멍은 마련해야 했어요. 한데 다행히 내 운은 변함없이 좋더라고요.”
“듣자 하니 그곳은 사람이 갈 곳이 못 된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가본 사람도 몇 없고요. 하여 감히 도전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답니다.”
“누가 다 죽었다고 합니까? 고하와 소은은 살아서 돌아왔잖아요. 그리고 그 아저씨하고, 우리 어머니도 멀쩡히 살아계시지 않았나요?”
범한이 마치 과거 그 사람들의 뒷모습을 찾으려는 듯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그냥 살아남는 거로는 부족해요. 이번에 경도에서 패했잖아요. 하여 신묘로 가서 우리 아저씨라도 찾아와야지, 그것 말고 내게 다른 선택지가 있을 것 같습니까? 진즉에 생각해 놓은 일이니까 막지 말아요.”
그러자 왕계년이 이상한 낯빛을 하고는 자그마한 소리로 구시렁댔다.
“막고 싶어 그런 거 아니구만……. 이 세상에 감히 누가 대인을 막겠습니까? 감히 막았다가는 황제 폐하를 빼고 다 죽을 텐데 말입니다. 다만 신묘는…… 황궁이 아니잖아요. 선인(仙人)이 사는 곳이니, 제가 모시고 갔다가 몇십 년이 걸려도 고생만 하고 못 찾아갈까 봐 걱정되어 그렇습니다요.”
“우리 목표는 고생을 안 하는 겁니다.”
범한은 두어 번 기침을 했다. 이에 그는 체내 경맥에서 느껴지는 작열감을 정신력으로 통제하고는 억지로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하여 왕씨도 너무 겁먹지 말아요.”
이는 범한이 생각해 둔 일이었다. 그 허공을 떠돈다는 신묘에 대해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심지어는 은연중에 신묘의 진짜 배경까지 포착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 모든 건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황제 폐하는 생각보다 강대했다. 심지어는 총소리가 울린 후에도 살아났고, 깨어나기까지 했다. 범한도 알다시피, 이번 일로 황제는 더는 출궁하는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현재 범한과 황제 사이에 남아 있는 건 이들 부자가 싸우기 전 긴 대화를 통해 마련해 놓은 상호 견제와 압박뿐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결국 두 사람의 전쟁이었다. 경국 황제든 범한이든 이 불길이 천하까지 번져나가는 건 원하지 않는 거였다. 그런데 범한은 참패했으니, 어떻게든 자신을 이기게 해 줄 힘을 찾아야만 했다.
천하에서 찾지 못한다면, 답은 천상밖에 없는 거였다. 범한은 신묘가 세인 마음속에 얼마나 숭고한 존재인지 알고 있던 터라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범한은 오죽의 안위도 걱정되었다. 그리고 다친 자신의 경맥을 위해서라도, 이밖에 수많은 목적을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신묘를 향한 험난한 여정에 올라야만 했다.
“어떻게 가야 합니까?”
왕계년이 말고삐를 가볍게 당기며 현실적인 질문을 던졌다. 세인은 모두 신묘를 경배했지만 그 누구도 신묘로 가는 길을 알지는 못했다.
“북쪽으로요. 계속 북쪽으로, 쭉 북쪽으로 가면 되요.”
범한이 왕계년의 질문에 대답했다.
* * *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맞으며 사람들은 계속 북쪽으로 향했다. 마차가 효산을 돌아 연경과 창주 사이에 있는 공백 지대를 슬쩍 스치고 곧 북해에 다다르기 직전이었다. 때는 2월 말, 하지만 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곳은 주변 다른 곳보다 춥고 쓸쓸했다. 이런 황야에서 눈을 얇게 뒤집어 써 마치 가루 설탕을 뿌려 놓은 검정 만두 같은 마차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를 몰고 있는 왕계년은 도롱이를 입고 가까스로 눈을 막고 있었다. 이에 눈썹과 입가 수염에 엉겨 붙은 눈 때문에 그의 몰골은 조금 처참해 보였다. 하지만 평소 혼탁하고 얼이 빠져 있는 듯한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 맑고 예리하게 도로 양측을 천천히 훑어보며 의심할만한 움직임은 없는지 빠짐없이 살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