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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53화 (1,053/1,108)

1053화 북으로 향하는 마음 (2)

오늘 범약약이 입궁하게 된 건 황제의 명 때문이었다. 깨어난 황제의 하명으로 태의원에서 범씨 가문까지 찾아와 범약약에게 도움을 청한 거였다. 이는 범약약이 천일도와 비개의 의술을 두루 섭렵하고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일 중요한 이유는 황제가 치명적 중상을 입은 게 자객이 남긴 내상과 검흔(劍痕) 때문이 아니어서였다. 그건 가슴팍으로 날아와 살점에 박힌 쇳조각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수술 이란 기괴한 치료법은 천하에서 오직 범씨 가문 아가씨만 할 수 있는 거였다.

범약약은 오는 길에 태의로부터 황제의 현 상황을 전해 듣는 것으로 그가 자신이 쏜 총에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범약약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희한하게도 그녀는 심히 실망하기보다는 조금 허탈하기만 할 뿐이었다.

범약약는 황궁 안에서 꼬박 다섯 달을 지냈다. 어서방에서 5개월을 지낸 거였다. 그러니 그녀는 요 몇 년 동안 황제 곁에 가장 오래 머문 여인이었다. 이에 범약약은 갈수록 늙어가는 그 군왕이 어떤 사람인지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제일 관건은 범약약을 대하는 황제의 태도가 확실히 남들과 다르다는 거였다.

“입궁 후에는 스스로 알아서 챙기거라. 또한…… 황제 폐하께서 잠시라도 불편해 하시면 황궁에 남아 치료를 해드려야 하니 집에도 그 소식을 전하고 말이다.”

정왕 세자 이홍성이 범약약 곁에서 미간에 근심을 드리운 채 자그마한 소리로 신신당부를 했다. 황제 폐하를 치료하는 건 원래 극도로 무서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 무서운 사실은 황제 폐하의 부상이 범한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하필 범약약은 범한이 가장 아끼는 누이란 점이었다.

세자 이홍성은 범약약이 얼마 전까지 황궁에 연금되어 있던 터라 심히 걱정이 들었다.

“네.”

범약약이 살짝 웃자 얼음장 같았던 그녀의 얼굴이 따스해 졌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이홍성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태의정과 함께 호위병을 따라 황궁으로 들어갔다.

이홍성의 마음을 알고 있던 범약약은 그의 이번 행동에 깊이 감동했다. 특히나 그건 범씨 가문 저택이 수색 당한 일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동안 범씨 가문은 여러 차례 수색을 당했다. 그리고 저택 내 사람들은 범한이 지은 대죄 때문에 임완아가 군주이건, 범약약이 황제 폐하께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이 더는 언급할 가치도 없는 것 따위의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서량로에서 돌아와 추밀원 부사로 부임한 이홍성은 그런 그녀를 피하기는커녕 용감하게 나서서 거친 군사들을 찍어 눌러 버렸다.

그러니 이홍성이 없었다면 범씨 가문은 더 큰 고초를 치렀을 것이다.

살을 에는 추위가 몰아치는 동굴 같은 고즈넉한 황궁 문을 걸어가는 동안 발걸음 소리가 차분하게 울렸다. 범약약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걸으며 예전 오라버니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인생이란 원래 연기이고, 가끔은 황당한 연기를 해야 하는 거였다. 그리고 지금은 하마터면 자신이 쏜 총에 죽을 뻔한 황제 폐하를 치료하게 된 것이니…….

범약약은 입궁하기 직전까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건 황제가 이미 깨어났고, 다행히 황제는 깨어난 후 범씨 가문을 멸문지화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는 거였다. 범한이 저지른 죄행을 놓고 보면 범씨 가문 저택에 있는 사람 전부가 끌려가 하옥되고 기껏해야 임완아, 범약약, 아이들 정도만 황궁으로 잡혀 들어갔어야 하는데 말이다.

순간 범약약은 경도에 남는 선택을 한 올케언니의 선택에 탄복했다. 임완아는 황궁에서 변이 일기 전날 밤에 황제와 범한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협의를 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 경도에서 범한을 찾는 데 사력을 다하는 것과 상반되게 그가 비호하는 사람들은 대대적으로 진압하지는 않는 것을 보고 임완아는 분명 일부 추측해낸 거였다.

그러니 임완아가 범씨 가문 사람들을 데리고 경도를 떠나 담주로 가지 않은 건 황제가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얼마나 성의를 보여주는지 알아보려는 행동으로 볼 수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범약약은 위기 속에서도 차분한 올케언니의 강단에 탄복했다. 그리고 일찍부터 오라버니를 숭배하고 있던 마음이 더 강해졌다. 이 세상에 강력한 군왕을 습격하고 또 그가 치를 떨 정도로 계속 압박할 수 있는 건 오라버니 말고는 없어서였다.

황제가 있는 궁전(宫殿)이 눈앞에 들어오자 범약약은 마음이 차분해졌다. 얼마 전 적성루에 오른 건 모두 오라버니가 경도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사실, 그녀는 황제에게 원한을 가질만한 이유가 별로 없었다. 물론 만나본 적 없는 20년 전의 그 아기는 불쌍하게도 죽었지만, 그래도 그 일은 그녀와는 한참 동떨어진 일이었다.

정원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경력 12월은 이렇게 안정적으로 이 대륙에 발을 붙였지만 경국 조정은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황제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상주문을 살필 정도는 되었지만 그래도 무리하면 안 되었다.

문하 중서의 하종위가 죽고, 각부의 중요 관원도 범한이 잔인하게 제거해 조정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그런데 다행히 호 대학사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레 밤낮동안 귀가도 않고 사력을 다해 정무를 돌본 덕에 거의 대부분의 조정 대사는 잘 처리된 편이었다.

하지만 어두운 곳에서의 행보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경도는 평상시로 되돌아온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지극히 삼엄한 통제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특히 자객 추격과 수색은 단 한시도 느슨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일로 경도 조정은 자긍심을 가져도 되었다. 황제에게 중상을 입고 빗발치는 화살을 맞아야 했던 9등급 강자들이 지금 분명 경도에 갇힌 채 두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거대한 성에서 강자들의 도망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이유 덕분인데, 하나는 이들 강자가 중상을 입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경국 국가기관의 역량이 정말로 무시무시해서였다.

지금까지 죽은 걸로 확인된 자객 수는 다섯이고, 이들 시신은 모두 황궁으로 운반되었다. 하지만 정체가 알려진 자객 중 셋은 어디로 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바로 북제 황궁의 제일 고수인 랑도 대인, 동이성 검려의 왕 십삼랑, 북제 성녀 해당타타였다. 이 세 사람은 경도에서 여러 차례 붙잡힐 뻔했지만, 그때마다 피 흘리는 대가를 치르고 만신창이가 되어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범한은, 더욱이 그림자는 아예 발견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다. 범한은 사라졌고, 그림자도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체포와 수색 작업을 책임지게 된 경국 관원들은 그제야 비로소 감찰원이 길러낸 인물들이 흔적을 지우고 숨는 데는 그야말로 천재적이란 걸 실감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관원들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한편으로는 작은 범 대인이 중상을 입어서였다. 황제도 그자의 경맥이 모두 훼손되어 1년 안에는 회복되기 어렵다고 단정할 정도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일 밤 입궁해 상주문을 올리는 조정 대신들에게 과거에는 익숙했지만 요즘 들어 유난히 이상해 보이는 광경이 있어서였다. 바로 황제 폐하는 허약한 모습으로 이불을 덮고 누워 계시는데 평범한 차림의 여인이 냉정하지만 담담하고 또 섬세하게 황제 폐하께 약이며 음식을 먹여드리며 돌봐드리고 있어서였다.

그 여인은 바로 범씨 가문의 여식이었다. 조정 대신들은 5개월 전부터 그녀의 얼굴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왜 출궁한 지 고작 하루 만에 돌아온 거지? 작은 범 대인은 군왕을 시해하려 한 수배범인데 어떻게 그의 누이가 황제 폐하를 돌봐드릴 수 있는 걸까?

요 대총관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범씨 가문 여식이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는데 전혀 걱정이 안 되는 건가?

이상한 건 범씨 가문 여식이 날마다 황제 폐하 수발을 드는 것 말고도 또 있었다. 이제 끝장났다고 생각한 범씨 가문은 지옥으로 변하기는커녕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지내고 있었다. 심지어 신아 군주까지 사나흘에 한 번꼴로 입궁해 황제 폐하께 음식을 가져다 드리고 함께 말동무도 해드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황제 폐하께서는 작은 범 대인을 죽이는 데만 혈안이신 거고, 그의 아내와 누이를 괴롭힐 생각은 없으셨던 거야?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봐도 너무 황당하고 이해가 안 되는 일인 거였다.

* * *

경도의 우중충한 분위기는 2월 초 어느 날 드디어 타개되었다. 극비 소식을 접한 요 태감은 그날 밤 어서방으로 들어가 허약한 황제 폐하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후 다음날 궁정과 군측 인사 및 군마를 잔뜩 이끌고 조용히 일등 징해자작부 대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새벽빛이 나오려는 찰나, 나무의 푸른 싹이 아직 수피 속에서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언씨 가문 저택 대문을 맹렬히 열어젖혔다. 그런 후 군사들이 사방을 포위한 가운데 20명의 고수가 높은 저택 담벼락을 넘었다. 그들은 마치 목표물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듯 곧장 후원의 가짜 산으로 향했다.

요 태감은 양손을 소매 속에 넣고 언씨 가문 저택 밖에서 차분히 기다리기만 할뿐 안으로 들어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곳은 그가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단 언약해 대인이 과거 감찰원에서 오래 재직한 건 차치하더라도 이곳의 젊은 주인이 현 감찰원 원장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행동은 감찰원에 전혀 알리지 않고 진행되었다. 언씨 가문에서 정말로 그 귀인을 잡고 있는 거라면, 언빙운은 해명할 자격이 없는 거였다.

잠옷을 입고 있는 작은 언 공자는 저택 안을 마구잡이로 수색하는 군사들을 엄숙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분노가 갈수록 짙어졌지만, 그래도 표정은 변함없이 차분했다. 그는 경국에서 최고로 성공한 간자였다. 그러니 그의 의지력은 남들과 비견될 바가 아닌 거였다.

그는 아버지가 거주하는 후원으로 당장 달려가 보지 않았다. 단지 침소 문 안쪽에 서서 모든 상황을 냉랭하게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뒤에 있는 침대에서 그의 아내인 심씨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언빙운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되물었다. 그의 음성에는 싸늘한 한기가 압축되어 들어 있었다.

일어나 침대에 앉은 심완아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리고 한참 후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와 아버님만 알고 있는 일입니다. 한데 전에 당신이 내게 언질을 줬었지요.”

언빙운이 입가에 한껏 씁쓸한 웃음을 띄우고 말을 이어 갔다.

“옛날에 내가 당신을 저버렸던 건 사실입니다. 하나 이미 여러 해 전 일이라 당신이 이미 잊었다고 여겼거늘. 더군다나 지금 우리는 부부이지 않습니까. 이제 보니, 당신은 우리 언씨 집안이 쫄딱 망해야 만족을 할 모양이군요.”

심완아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상공이 자신을 꿰뚫어 본 거였다. 이에 그녀가 언빙운의 뒷모습에 대고 처량하게 말했다.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단지 조정에서 찾는 범인이기에, 조정에서 알면 우리 집안은 발뺌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여 그분은 원래 대단한 분이니, 몰래 숨어들어 있는 걸 발견한 거라 말하면 조정에서도 믿어줄 것입니다.”

“그렇지요. 하여 우리 집은 첫 번째로 공을 세우고도 비호해 준 죄까지 쓰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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