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화 가짜 산 (2)
3년 전 오죽 아저씨는 경도에서 떠났다. 그는 저 먼 전설 속 신묘로 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겠다고 했었다. 그날로 상자도 범한 곁을 떠났다. 범한은 오죽 아저씨가 상자를 가져갔다고 생각해 조금도 유감스럽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죽 아저씨가 곧 맞닥뜨리게 될 적이 황제 폐하보다 훨씬 더 고강하고 냉정하고 지극히 높은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자는 계속 경도에 있던 거다. 단지 자기 곁에만 없었던 것뿐이었다. 황제가 혼절하기 전 확신한 것처럼, 오늘 상자를 가지고 온 게 꼭 오죽이란 법이 없다는 걸 범한도 알고 있었다. 만약 오죽 아저씨가 정말로 돌아왔다면, 상자를 사용할지 여부는 일단 논외로 하고, 그는 분명 만여 명에 달하는 경국 정예 군사들을 모두 허수아비 취급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니고 있던 쇠막대기를 싸늘하게 쥐고 곧장 황궁으로 쳐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총을 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범한은 오랫동안 생각을 해 보았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몇몇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는 했지만, 확신할 수는 수 없었다. 이에 범한이 지금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는 건 총을 쏜 사람은 분명 자신과 지극히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일 거란 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오죽 아저씨가 자신의 생명을 상대방의 손에 넘겨줄 리 없어서였다.
범한의 계획 중에는 하늘에서 저격이 날아 들어오는 건 없었다. 그러니 그가 애당초 생각해 둔 출구는 황궁 안에 있었다. 그런데 북제와 동이성에서 사람들이 와버린 바람에 황제 폐하의 마음을 이용해 돌파구를 마련하려던 건 모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범한에게 벌어진 더욱 무시무시한 일은 다음과 같은 거였다. 일단 자신이 깨달음을 얻고 얼마 되지 않아 손가락 끝에서 만들어낸 강력한 검의 기운이 결국 황제의 손가락에 산산조각 나 버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경맥까지 전부 엉망진창이 되어 거의 폐인이 된 바람에 그 출구에 아예 접근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홍죽이 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게 되었으니, 그나마도 다행인 거였다.
범한 일행은 황궁 앞 광장에서 도망쳐 나왔어도 여전히 큰 장애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비록 신이 내린 벌처럼 천외의 일격을 펼친 자객이 나타났고, 또한 3 황자가 황성 성벽에 서서 연약한 몸으로 범한에게 활로를 열어주려 했어도 황제 폐하의 명은 이미 떨어진 거였다. 그러니 만 명이 넘는 군사들이 어찌 이국 자객들이 도망가게 놔둘 수 있겠는가.
범한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망쳤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다시 혼수상태에 빠져서였다. 이후 다시 깨어났을 무렵 범한 일행은 쫓기는 토끼가 되어 있었다. 원래는 현 세상의 강력한 고수들이건만. 그런데도 다칠 사람은 다치고, 죽을 사람은 죽어 고작 다섯만 남은 거였다. 그리고 경도에서 사력을 다해 도망쳤지만 어떻게 해도 도망 나갈 수 있다는 가망성이 없어 보였다.
그때 범한은 자신이 누가 된다는 걸 알고는 정말 독하게 마음먹고 그들을 떠났다. 해당타타에게 옛날 그곳에서 보자고 약속을 한 후 그는 검려 제자의 도움을 받아 이 저택 근처까지 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검려 제자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물론 그런 후 범한은 혼란을 틈타 저택 안으로 들어와 드디어 쉴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 온 검려 제자는 모두 9등급에 총 네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이 화살이 빗발치는 가운데 죽었다. 도망가던 와중에 또 범한을 살리느라 두 명이 죽었다. 마지막 남은 검려 제자는 7사형이란 자로, 그도 경국 고수 십여 명의 검에 베인 후 마지막에는 쇠뇌를 맞아 죽었다. 그런데 하필 그는 범한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가는 순간 죽음을 맞이해 범한은 그의 눈동자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에 그때 그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던 눈빛이 떠오를 때면 범한은 유난히 마음이 무거웠다. 자신의 빚이 과거보다 더 많아져서였다. 만약 이번에 살아남고, 더는 숨을 필요가 없게 되면 빚을 갚기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이 많은 거였다.
* * *
범한이 골똘히 생각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밀실 안에는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흘렀고 온통 암흑뿐이었다. 물이 필요했다. 이에 범한은 체내 정기가 다 흩어져버려 시력이 평소만 못해 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물병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곧바로 얼어버렸다.
범한이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밀실의 벽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마치 이 벽 밖에서 눈 한 쌍이 자신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였다.
문지방은 관리가 잘 되어 있었고 그 위에 기름이 잔뜩 발라져 있었다. 그래서 밀실 문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열렸다. 그리고 마치 무성극이 시작된 것처럼 옅은 광선이 밀실 밖에서 들어와 안에 있는 창백한 얼굴과 차분한 두 눈동자의 범한을 비추었다.
이에 범한은 가만히 실외를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희미한 등불 때문에 밀실 밖에 있는 익숙한 형체는 온통 어둡게만 보였다.
“대인이 나를 발견하면 분명 장도리로 내려칠 거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범한이 언빙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가짜 산 뒤쪽에 서서 차분하게 밀실 안의 범한을 바라보고 있던 언방운은 만감이 교차했다. 이에 언빙운이 얼핏 봐도 반항할 힘이 없는 범한을 한동안 조용히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정원에서 자랐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이 가짜 산을 오르지 못하도록 엄금하셨지요. 하나 아시다시피, 아이들은 호기심이 왕성하지 않습니까. 하여 어찌 안 오르고 배길 수 있겠습니까?”
“이 가짜 산은 너무 커요. 하여 처음 대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상하다고 여겼답니다. 댁의 아버님과 몇 차례 이야기는 나눠봤지만, 그분은 도통 저를 믿어주지 않으시더라고요.”
범한이 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웃으며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과연 그런 거였어요. 나도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차릴 정도인데, 대인은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요.”
범한은 일등 징해자작부의 가짜 산 안에 숨어 있었다. 경도에서 아무리 폭풍우가 거세게 쳐도 범한이 언빙운 저택에 숨어 있다는 건 아무도 생각 못할 일이었다. 그러니 언빙운이 문득 감을 잡고 어렸을 때 숨바꼭질을 하던 방안을 열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범한은 언약해의 도움으로 가장 조마조마한 이 시기를 분명 무사히 넘겼을 것이다.
“제가 이 가짜 산의 비밀을 안다는 걸 아버지께서는 모르십니다.”
언빙운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어 갔다.
“하여 이미 아셨다면, 분명 더 안전한 곳에 숨겨드렸겠지요.”
“됐습니다.”
범한이 너무 피곤해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어 갔다.
“내가 그동안 사람답지 않게 운이 너무 좋았거든요. 하여 언젠가는 운이 나쁠 때가 있겠거니 했는데, 바로 이 가짜 산에서 그때를 만났나 봅니다.”
그러자 언빙운이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아버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건 감찰원 업무로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일 수 없다고 말이지요. 특히나…… 저는 우리 대경국을 위해 대인을 북제로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북제로 안 갈 겁니다. 그저 신묘 여행이나 가볼까 하는데. 같이 논의나 해볼까요?”
범한이 이를 드러내고 씩 웃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언빙운은 가짜 산을 사이에 둔 채 눈이 조금 쌓인 이끼 낀 문 너머에 있는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표정도 짓고 있지 않아 그가 무슨 생각 중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있던 언빙운이 한참 후 싸늘하게 입을 뗐다.
“대인은 너무 많은 걸 알고 계십니다. 저는 대인 곁에 여러 해 있었기 때문에 황실 금고에 관해서는 조금은 아는 게 있습니다. 더군다나 요 몇 년 동안 줄곧 북제로 옮겨가는 데 신경을 쓰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범사철도 아직 상경성에 있고요. 하여 과거에 조정을 배반하는 일을 하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북제로 갈 계획이 있으셨는데, 제가 어찌 대인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가볍게 두 번 기침을 하고는 살짝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도 경국 사람이에요. 더군다나 나는 황제 폐하와 약정까지 맺었다고요. 황제 폐하께서 이번에 살아나시면 내 사람들을 제거하지 않으실 것이니, 나도 자연스레 조정과 감정 소모하며 싸우거나 북제 편에 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여 그 일은 걱정 말아줬으면 해요.”
“국가 대사와 천만 백성의 생사와 연관된 일인데 어찌 제가 걱정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언빙운이 최대한 소리를 줄여 노기 어린 음성으로 범한을 꾸짖었다.
“대인과 폐하 사이에 어떤 괴상한 약정을 맺었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훗날 상황이 변해 대인이 살아서 경국을 떠나 북제 상경성으로 갔다고 해보지요. 하면 대인이 격분해 그런 역겨운 일을 할지 또 누가 알겠습니까?”
“역겨운 일? 황실 금고 비밀을 북제에 팔아넘기는 걸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북제 사람들을 위해 알아서 경국 공격에 나서는 걸 말하는 건가요?”
범한이 살짝 비웃듯 말을 이어 갔다.
“사람이라면 살아가는 동안 약속은 지켜야 하는 법. 황제 폐하께서 약속만 지켜주신다면, 그런 일은 자연스레 일어나지 않는 것이거늘……. 대인도 분명 잘 알지 않습니까. 이번에 입궁해 공격을 한 건 단지 국소적인 전쟁을 한 것뿐이에요. 더군다나 내가 가진 모든 무기를 동원하지도 않았거늘.”
“내가 살아남으면 황제 폐하께서는 어젯밤에 나와 맺으신 협약을 받아들이셔야만 할 것입니다.”
범한의 양 눈동자가 순간 얼음장처럼 싸늘해지며 말을 이어 갔다.
“그분은 천하에 대란이 이는 건 원치 않으시니, 내 사람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실 것입니다. 설령 아무리 노하신다 해도 그분의 천추 대업을 위해 어떻게든 참으실 테니……. 잊지 말아줘요. 대인에게 그들은 아는 사람이고, 한때 대인의 협력자이자 친구였고, 동료였음을! 하여 만약 대인이 지금 나를 죽인다면, 내 수중에 있는 힘들은 더는 지도자가 없는 꼴이니, 불손히 말을 좀 해보리다. 황제 폐하께서는 머리 잃은 용을 천천히 괴롭히며 죽이실 겁니다.”
“설마 한때 누구보다 잘 알던 사람들이 황제 폐하께 하나 둘 도살당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요?”
범한이 언빙운의 눈을 응시하며 매 글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자 언빙운이 한동안 아무 아무런 말도 않다가 대답했다.
“이제 보니, 대인은 그 일을 두고 오랫동안 고민하셨군요. 하나 대인도 잘 아시다시피, 하늘에 오직 하나의 태양만 있듯 하늘 아래에는 오로지 한 분의 군왕만 계실 수 있습니다. 만약 대인이 살아 있는 동안 평생 참는다 해도, 우리 대경국 조정은 겉으로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 같아도 대인 때문에 두 조각으로 갈라질 터이니……. 그건 우리 경국 입장에서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지요.”
“나는 단지 내가 보호하고 싶은 사람들을 살리고 싶은 것일 뿐. 그 목표를 위해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예요. 하여 훗날 나는 아주 높은 산 위에 올라서서 사당 안에 있는 황제 폐하와 당신을 싸늘하게 주시할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하면 두 사람에게 경계심은 불러일으키겠군요.”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으십니다. 만약 대인이 사망하신다면, 감찰원 관원과 부하들은 언젠가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위대한 전략가이시니 분명 감찰원, 심지어는 대인이 강남에 배치해 놓은 모든 걸 거둬들이실 것입니다.”
언빙운이 범한의 얼굴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겉으로는 그들의 생명을 보장해주고 싶다 하시는데, 실제로는 요? 사실 대인은 그들의 역량을 가지고 황제 폐하와 조정을 위협하려는 것뿐이지요. 하여 대인이 안 죽고 버티시는 건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기 위해 감찰원을 사적인 기물로 쓰는 것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