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9화 창산의 눈, 검에 낀 성에 (12)
황성 위아래에서 혼란이 일었지만 결국에는 안정을, 그것도 죽음이 온 듯한 같은 안정을 되찾았다. 경국 군의 기율은 과연 천하제일인 거였다. 하지만 천외의 공격이 지닌 공포의 살상력과 위협에 그 누가 벌벌 떨지 않을 수 있을까. 이에 군사들은 하얗게, 심지어는 파랗게 질린 채 황제 폐하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더는 황성 위로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총 소리가 울리며 황궁 앞 광장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삿갓을 쓴 고행자가 가만히 있는 군사들을 행동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 먼저 공격에 나섰다가 그 즉시 눈밭으로 고꾸라진 거였다. 그런데 그는 경련 같은 것도 일으키지 않고 곧바로 시체가 되어 버렸다.
다시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총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또 다시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찾아왔다.
그러다 또 총소리가 울렸다.
이와 같은 일이 네 번 반복 되었다면 눈밭에는 시체 네 구가 늘어났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총소리는 다시 멈추고는 더는 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에 황성 위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천외 공격을 하는 자객이 지금 자신들을 향해 경고하는 중임을 알게 되었다. 그 어떤 시도도 하지 말라고, 그리고 감히 이 넓은 설원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이 있다면 모두 죽을 줄 알라고 말이다.
총 소리가 한 차례 울릴 때마다 사람 하나가 죽고, 피칠갑을 한 시체가 눈 위로 뻗어버렸다. 모든 건 예외 없이 이루어졌고, 냉혹한 침묵의 선포로 모든 이의 마음을 얼려버렸다.
그런데 이건 개인이 한 나라에 도전하는 거였다.
* * *
죽음 같은 침묵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모를 무렵, 땅바닥에 있는 눈이 튀어 오를 정도로 말들이 불안하게 발을 굴러대기 시작했다. 눈밭 위 강자들은 잔뜩 긴장해 있는 강대한 경국군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는지 강제로 포위를 뚫는 결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눈 내리는 경도 하늘에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가며 낮은 소리를 내는데 그게 대체 왜 그런 건지, 그리고 저들은 어떻게 죽은 건지 알지 못했다.
온몸을 갑옷으로 무장한 섭중은 냉랭하게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가 이끄는 정예 기마병은 충분히 눈밭 위 강자들을 급습해 죽일 수 있었지만, 그들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섭중은 9등급의 무공 고수라 소리가 자기 뒤쪽에서 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외의 공격을 펼치는 자객에게도 공격의 사각지대가 있어, 지금 기마병으로 공격을 펼쳐도 자객이 자신을 막지 못한다는 점도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중은 조용히 말 위에 앉아만 있었다. 지금 황제 폐하의 생사는 알 수 없으니 이곳에서 제일 지위가 높은 건 그였다. 그런데도 그는 단 한마디도 않았다. 여러 해 동안 경국 조야(朝野)에서 해왔던 대로, 그는 이번에도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감히 무시할 사람은 없었다.
섭중이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황제 폐하께서 명을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나타나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사물이 무엇인지, 저 낮게 울리는 소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서였다.
그건 상자였다. 상자가 드디어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섭중은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고 옆에 있는 장수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마음속에서는 이미 거친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과거에 태평 별원 사변이 일어났을 때, 황제는 그를 후군(後軍)으로 쓰기 위해 정주로 보냈다. 분명 섭중 자신과 섭경미 사이의 입장을 황제가 전혀 믿지 않고 있어서였다. 섭중은 섭경미가 막 경도로 왔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섭경미와 한바탕 싸웠기 때문에 그는 과거의 그 사람들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단 한 번도 어떤 의견을 내놓은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섭중이 그 상자, 태평 별원에서의 일, 진평평이 왜 황제 폐하를 배반했는지에 대해 모른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거였다.
섭중의 마음속에서 많은 화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생각이 나 섭중도 조금은 피곤했던 거였다. 섭중의 눈빛이 드디어 맑아지더니 눈밭 한가운데에 있는 한 젊은이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곧장 저 젊은이의 어머니가 그 상자를 가지고 있었고, 그 젊은 여인이 성문 입구에서 자신의 조사를 거절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기에 섭중은 이번 일은 황제 폐하의 잘못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침묵을 유지하며 황명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 * *
그런데 죽음 같은 침묵은 대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눈보라는 얼마나 더 지속 되야 멈출까? 바로 이때, 옅은 황색 옷을 입은 소년이 황궁 성벽 위로 성큼성큼 걸어 올라왔다. 그리고 성벽 가장자리에 서서 차분하게 눈밭 한가운데에 있는 범한을 바라보았다.
이때 성벽 위에 있는 금군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날아온 죽음의 수확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에 성벽 가장자리로 와 서 있는 옅은 황색 옷의 소년은 위대하고 용감해 보였다.
“황제 폐하께서 혼절하시어 정사를 돌보실 수 없으니, 경국 법률에 따라 내가 감국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3 황자 이승평이 소맷자락 안에 있는 양 주먹을 불끈 쥐고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창백한 얼굴의 요 태감이 이리저리 살피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하오나 황제 폐하께서는 이제 막 혼절하시었고, 아직 이레가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다리란 말인가? 우리 대경국의 명장과 장수들이 하늘에게 몽땅 죽도록 놔둘 셈인가!”
이승평이 고개를 돌려 음산하게 요 태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요 태감은 순간 심장이 오싹해졌다.
“마마, 이는 국가 대사이옵니다. 하여 소인네는 참견할 수 없습니다. 하오나 만약 폐하께서 깨어나시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겁낼 것 없으니 모두 물리거라.”
이승평의의 눈에 담긴 냉기가 짙어질수록 요 태감은 심장이 더 오싹해졌다. 요 몇 년 동안 3 황자는 범한에게 교육을 받아 온화하고 인자한 황자로 거듭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요 태감은 이 어린 황자가 과거에 얼마나 악독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상대방이 화가 나서 이번 일로 원한을 크게 품으면 ‘자신이 어찌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더욱이 경국의 강산은 3 황자 마마가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황제 폐하께서 치료에 차도가 없으시다면, 어쩌면 내일이라도 3 황자 마마가 용좌에 앉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저들이 광장 밖으로 나가거든 다시 추격해 붙잡아오너라. 그리 하여야 부황께 설명할 것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 죽게 한다면 그게 뭔 재미란 말이냐?”
이승평이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고는 눈밭에 있는 형님이자 스승님인 범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불필요한 감정 따위는 드러내지 않았다.
* * *
눈 쌓인 적성루 꼭대기에서 순백의 값비싼 털가죽 아래에 있던 금속의 관은 쉼 없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가르며 저 멀리 황궁 쪽에 있는 생명을 수확했다. 금속관이 내는 소리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그래서 반작용력을 많이 줄이기는 했어도 그래도 적성루 꼭대기에 있는 눈은 소리의 진동으로 바스락거리며 계속 미끄러져 내렸다. 그리고 이러한 소리는 먼 곳까지 전해져 주변 거리와 민가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경도부 아속들은 일찌감치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적성루는 조정에서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해놓은 곳이었다. 비록 다년간 황폐한 상태로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수속을 밟지 않으면 그 누구도 들어가 조사를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아직 정월 상순이라 사람들은 아직도 새해를 보내는 중이었다. 이에 아속들은 개구쟁이가 설날 폭죽을 터뜨리는 것일 수도 있다고, 그 폭죽 소리가 조금 더 크게 나는 것 같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제일 빨리 행동에 나선 건 궁정 쪽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혼절하시기 전에 냉정하게 적성루를 입에 담았으니, 궁정 고수들이 황궁에서 몰래 나와 황궁 좌측으로 난 어하(御河)를 따라 산림을 뚫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경도성 동쪽으로 갔다.
길 두 개를 사이에 두었을 때 적성루 쪽에서 다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들 궁정 고수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긴장감을 억누르고 네 방향에서 동시에 덥쳤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자객이 지금 적성루에 있다면 자신들의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다.
궁정 고수들이 용감하게 적성루 정원으로 들어가 꼭대기까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고, 꼭대기에 두툼하게 깔린 눈 위에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흔적을 빼면 마치 아무도 오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하고 아무 물건도 남아 있지 않아 궁정 고수들은 기운이 빠져 버렸다.
그래도 눈이 계속 흩날리는 와중에도 궁정 고수들은 진지하게 꼭대기에 남은 흔적을 조사했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자객은 아무런 단서도 남겨 놓지 않았다. 흔적은 명확했지만 주변 정리를 해놓은 탓에 사람 생김새와 관련한 단서는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 사이 궁정 소속 호위병 하나는 적성루 밖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살짝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얼마 되지 않는 행인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환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오자 그의 순간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소년 사환이었다. 그가 궁정 호위병의 의심을 산 이유는 두툼한 모피를 두르고 있어서였다. 모피는 낡아서 몇 푼 안 되어 보였다. 그런데 모피 안쪽에 푸른색의 무명옷이 보였고, 접어놓은 무릎 아래쪽 부분으로 모피의 다른 쪽 면이 드러났는데 그게 문제였다.
그건 눈처럼 새하얀 색이었고, 지극히 값비싼 모피였다. 대체 어느 집 사환이 저런 비싼 물건을 걸칠 수 있겠는가?
궁정 호위병 눈동자가 수축되었다. 그는 일단 사환의 앞을 가로 막았다. 그리고 동료를 부르려는 찰나 순간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턱 아래가 마비되는 느낌이 들더니 그대로 즉사해 버렸다. 그런데 몸이 너무 갑자기 경직되는 바람에 그는 바닥으로 넘어지지 않고 담벼락에 기댄 채 죽어 버렸다.
사환이 호위병 턱 아래에 찔러 넣었던 가느다란 침을 손끝으로 문질러 꺼냈다. 그런 후 걸치고 있던 두툼한 모피에 단단히 꽂아 넣고는 날이 좀 춥다는 듯한 모습으로 골목길을 나가 경도에서 내리는 눈보라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오늘 눈보라가 거세게 부는 경도에서는 큰일이 일어났었다. 하지만 굳게 봉쇄된 황궁 앞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일단 어사대에서 상소를 올리는 어사들은 일찌감치 한밤중부터 각자의 저택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각부의 대인들 역시 감찰원의 통지를 받고 억지로 저택 안에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호 대학사는 황성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속박으로 인해 생겨난 긴장감과 동요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도 남쪽에 위치한 대로로까지 전달되었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권세가와 귀족이 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모두들 경계하고 의심하는 눈초리로 어느 한 저택을, 그러니까 범씨 가문 저택을 주시하고 있었다.
범씨 가문 저택에서는 오늘도 평소와 마찬가지였고 허둥지둥한다거나, 슬퍼한다거나, 긴장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 끓일 사람은 물을 끓이고, 밥을 할 사람은 밥을 지을 뿐이었다.
범한이 입궁해 황제 폐하와 담판을 지어 놓은 게 있었지만, 저택 내에서는 분명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저택을 관리 중인 마님인 임완아가 집안사람들을 데리고 때는 이때라는 듯 황제 폐하의 묵인하에 담주로 떠나지 않은 거였다. 그녀는 시종일관 차분하면서도 조금 두려운 마음으로 경도 저택에 남아 있었고, 응접실에 앉아 그 남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이 경도를 떠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서였다.
“약약이는 어째 왜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임완아가 온화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옅게 슬픔이 어려 있었다. 그녀가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는 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깨우라고 사람은 보냈는가?”
이제 막 묻기 시작했는데 어젯밤이 되어서야 겨우 황궁에서 풀려난 범씨 가문 아가씨가 응접실 밖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냉정한 얼굴이었다. 신발에도 눈이나 물 같은 건 묻어 있지 않았다. 그녀가 올케언니를 향해 웃어보이고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젓가락질을 하는 그녀의 손은 차분하니 떨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