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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48화 (1,048/1,108)

1048화 창산의 눈, 검에 낀 성에 (11)

황제는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죽기 전에 자신이 정한 위대한 대업을 이루지 못하는 건 두려웠다. 이 세상에서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나 상황은 이미 얼마 안 되었다. 그 맹인과 상자를 빼면 말이다. 그래서 진평평이 유난히 냉담하게, 냉혹하게, 냉혈하게 달주에서 돌아오자 황제는 너무 분노한 나머지 살짝 오싹한 기분을 느낀 거였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방패를 들고 있는 이 군사들은 이렇게 황성 각루에 감추어져 있었다. 황제 폐하가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고 뒷짐을 쥔 채 가을비 내리는 사형장에서 늙은 개가 죽는 걸 지켜볼 때, 이들도 조용히 황제 뒤에서 대기했다. 하지만 그 날은 상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상자가 나타난 거였다.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레 말이다. 이에 황제는 슬프게도 상자의 무시무시함을, 그러니까 적어도 오늘 상자를 사용한 사람의 능력을 자신이 얕잡아 봤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래서 각루의 비호를 받고 있어도 죽음의 기운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고, 손쉽게 강철 방패를 뚫고, 마지막에는 인정사정없이 자신의 몸으로 파고들 거란 생각을 못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얗고 깨끗했던 눈이 황제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각루에 있던 사람들도 이제야 드디어 반응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비록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황이 변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요 태감이 깜짝 놀라 겁먹은 모습으로 황제 옆에 엎드렸다. 그의 목에서는 갈라진 마찰음만 날 뿐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본능적으로 황제의 가슴에 난 상처 부위를 손으로 헤치며 금속 파편들을 끄집어냈다. 그런 후 그는 다시 상처 부위를 조금 더 헤집어 봤지만 흉기를 찾지는 못했다.

헐떡이는 호흡을 따라 황제의 몸이 들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황제가 초점 없는 눈으로 옆에 있는 요 태감을 바라보았다.

“짐은…… 죽을…… 수 없다!”

짧은 몇 글자를 황제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하지만 중상을 입은 탓에 제아무리 사납게 말해도 전부 쇠약하게만 들릴 뿐이었다. 이때 황제는 요 태감 얼굴 너머 하늘에서 내리고 있는 눈송이를 사납게 노려보며 속으로 처량하고 날카롭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짐은 천명을 받았느니라. 하여 누가 짐을 죽일 수 있겠느냐! 오늘 짐은 못 죽는다! 하늘이 짐을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야!’

적성루 꼭대기에 있는 자객은 모든 걸 계산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황제 폐하라는 이 대종사의 육신이 얼마나 강한지에 대한 계산은 빠뜨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천하를 깔보는 황제 폐하가 뜻밖에도 죽는 걸 두려워하는 놈이란 점을, 그래서 용포 속 심장 위쪽에 호심경(護心鏡)을 넣어둔 걸 계산에서 빠뜨린 거였다.

저격총에서 시작된 영혼을 잡아먹는 선은 경도 하늘을 따라 먼 거리를 뚫고, 다시 강철 방패를 뚫은 후 최종적으로 전혀 치우침 없이 황제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하지만 저격총의 사정거리 끝에 있던 터라 총알은 황제의 흉골 부위만 광범위하게 부수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뼈와 맞닿은 살점을 헤집고 들어가 곧바로 군왕의 목숨을 취하지는 못한 거였다.

아까 황폐한 정원에서 범한이 가슴에 덧댄 강철판을 꺼냈을 때 황제는 비웃으며 훈계를 했었다. 잔재주로는 큰일을 이룰 수 없는 법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황제가 결국에는 이런 잔재주에 기대어 요행히 목숨을 건질 거라는 건 누가 봐도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무릇 큰일을 이루고자 하는 자는 삼가고 신중하라 했다. 그러니 어떤 형태는 극단적으로 신중을 기하고 삼가는 자세는 필요한 법이다. 특히나 목숨을 아끼는 건 제아무리 힘들고 재미없는 일이어도 어떻게든 필요한 거다. 그러니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부자 사이인 황제와 범한은 사실 세상에서 가장 닮은 후안무치한 사람이었다.

“적성루군.”

황제는 살짝 풀린 초점 없는 눈으로 회색 하늘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오늘 그 상자를 사용한 사람이 분명 오씨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오씨였다면, 일찌감치 황궁으로 쳐들어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가 숨을 가쁘게 쉬며 말했다.

“모두 죽여라.”

* * *

황제가 갑자기 공격을 받아 생사를 알 수 없는 혼수상태가 되었다. 그러자 황성 위에 있던 신하와 장수들은 갑작스러운 변고에 순간 당황해 몸이 굳어버렸다. 한편 광장에 있는 강자들은 황성 위아래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포위당한 채 아직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두 번째 화살이 빗발치면, 아직 혼수상태인 범한을 포함해 저들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다.

태의원에서 태의들이 서둘러 오고 있었다. 그래도 궁전이 참담한 표정으로 황제 폐하에게 달려가 지니고 있던 상처용 약으로 일단 지혈을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별 효과는 보지 못했다.

한편 요 태감은 황제가 혼절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내린 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에 그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각루를 지나 조심스레 금군 부통령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갈라지는 음성으로 모두 죽이라는 황제 폐하의 마지막 명을 전달했다.

요 태감은 황궁 성벽에 몸을 웅크린 채로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정말 웃겼지만, 이는 그가 정말로 두려움에 빠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황제 폐하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강력한 군왕을 보이지도 않는 자객이 중상을 입혀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놨으니,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심지어는 보이지 않는 공중에 난 선 때문에 다음번에는 자신의 살점이 찢겨 나가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곧이어 벌어진 일 때문에 요 태감은 동공이 맹렬히 수축하면서 바닥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가 우려하고 있던 두려운 일이 실제로 일어나서였다.

* * *

푹, 하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황성 꼭대기에 싸늘한 모습으로 서 있던 금군 부통령은 성벽 위아래 병사들에게 두 번째 화살을 퍼부으라는 군령을 내리기 위해 깃발을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깨를 움직였는데, 어느새 그의 머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 벌건 대낮에 귀신이라도 나타난 듯 금군 부통령의 머리가 갑자기 폭발해 버린 거였다. 마치 너무 익은 수박처럼, 물이 잔뜩 찬 물주머니처럼 영문도 모르게 터지면서 성벽 위에서 핏물, 골수, 뼛조각이 하늘 가득 날리게 된 거였는데…….

그런데 더 끔찍했던 건 머리가 폭발했는데도 그의 몸이 마치 자신의 골수가 하늘로 흩뿌려진 줄 모르는 듯 왼쪽 팔을 계속 들고 있다가 갑자기 툭 떨어뜨린 거였다. 그 모습은 흡사 줄이 툭 끊어진 꼭두각시가 갑자기 주저앉은 것만 같았다

황궁 성벽 위에서 비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관병들 앞에서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장면이 펼쳐졌으니, 모두 놀라고 두려웠던 거다. 이에 모두들 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에 불을 밝히고 열심히 황성 위아래, 동료들 사이, 심지어는 아무것도 없는 눈 내리는 하늘까지 샅샅이 훑었다.

물론 그들은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부통령 대인의 머리가 갑자기 터져버렸다는 것 말고는 애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조차 감을 잡지 못했다. 이들 금군이 아무리 경국 정예라고는 해도 수 리 밖에 자객이 있다는 건 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금군들은 쓸데없이 소리나 치고, 화나 내며 열심히 찾기만 했다.

아예 보이지도 않는 자객들을 상대로 어떻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맞설 수 있는 거지? 금군들은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자 점점 공포가 밀려들었다.

끝을 알 수 없는 공포가 황궁 성벽 위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병사들은 모두 무력하게 자객이나 찾았다. 그러자 일부는 이 조용한 압박감에 차츰 무너지기 시작해 광장 강자들을 향해 조준하고 있던 활시위가 느슨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경국은 군 기율이 엄격해 금군 부통령이 처참하게 죽었다고 해서 군기가 빠질 리는 없었다. 경국의 군인들은 전장에서 그리고 반란을 평정하면서 온갖 기기괴괴한 상황들과 맞닥뜨렸었고,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정도의 죽음도 경험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신의 뜻이 내린 듯한 공격은 속인들에게 엉뚱한 생각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이에 다른 장수가 용감하게 소리쳤다. 금군 부하들을 진정시키는 동시에 아래쪽에 공격 명령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몇 마디 후 갑자기 멈추어 버렸다. 성벽 위에 있는 관병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살의가 다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장수의 배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안에 있던 내장은 피와 함께 짓이겨졌다. 그리고 그는 ‘헉!’ 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곧바로 고꾸라져 버렸다.

상황이 이쯤 되자 황성 성벽 위는 공포에 휩쓸려 그대로 혼란에 빠져버렸다.

* * *

황성 성벽 위에서 혼란이 일자 성벽 아래에서도 이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명을 받들어 주변을 봉쇄하고 있는 군사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에 눈밭 위 강자들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 궁수들은 아직까지 활을 쏘라는 황명이 내려오지 않자 손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한편 장수들은 황성 성벽 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저 난리가 났을까 걱정하며 이맛살이나 더 강하게 찌푸렸다.

만약 병사들을 이끌고 하는 일반적 전투라면, 또 만약 오늘 황궁이 아예 전쟁터라면, 황제가 활을 쏘라는 명을 내릴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고, 모든 화살이 향한 곳에는 작은 범 대인이 있었다.

범한을 죽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두들 잘 알고 있었다. 작은 범 대인과 황제 폐하 사이에 은원이 있다는 건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황제 폐하께서 명확히 명을 내리시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제멋대로 화살을 발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재 성벽 아래에 있는 장수들은 황제가 중상을 입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정도로 혼미한 상태란 걸 모르고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괴상하게 차분한 상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전쟁에 투입된 장수라면 긴장 국면과 맞닥뜨렸을 때 반드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설령 지금 이 곳이 황궁 밖이기는 해도 경국 장수에게는 주도적으로 상황을 처리할 권한이 있었다. 궁수들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비 대장이 이맛살을 찌푸린 채 광장 정중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포위된 자객들이 황궁 성벽 위에서 이변이 인 걸 알아차리고 포위를 뚫고 나가려 한다는 조짐을 발견했다.

그런데 사비는 과거 연소을 부하들이 있는 정북 진영을 홀로 굴복시킨 대단한 인물이었다. 이에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이 발동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공격하라는 군령을 자신이 직접 내리지 않고 옆에 있는 부장에게 내리도록 했다. 그가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건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공포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비도 경국의 다른 문관과 무장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손으로 범한을 죽이는 일이 영원히 또 영원히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사비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의 옆에 있던 부장이 깃발을 들어 올리자마자 곧바로 바닥으로 떨어져 버려서였다.

그건 부장이 말을 제대로 타고 있지 않아서도, 또 다른 이유 때문도 아니었다. 부장과 함께 타고 있던 말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면서 무수히 많은 피가 새하얀 눈을 붉게 물들였기 때문이었다.

사비는 수축된 동공과 조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옆에 있는 부장에게서 나온 피와 살점을 바라보며 아까 자신이 명을 내렸다면, 자신도 벌써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형태도 질량도 없어 예측할 수 없는 천외(天外)의 공격을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황성 성벽 위에서 나타난 이상한 움직임이 무엇 때문인지 알게 된 사비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한데……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살아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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