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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46화 (1,046/1,108)

1046화 창산의 눈, 검에 낀 성에 (9)

적을 포위해 공격하고, 적을 유인해 모습을 드러내게 한 후 자신에게 반항하는 힘을 일거에 소탕해 버리는 것. 이는 황제 폐하기 전부터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대동산에서의 주역이 모여 있으니, 이 정도의 포진이 뭐 그리 대수일까!

하지만 아무리 상투적인 방법일지라도 이번 일은 경국의 막강한 지원 아래 진행되는 거였다. 그러니 그 누구도 황제 폐하의 묘책을 깰 수는 없는 거였다.

“뭐 새로운 것 좀 없나?!”

범한의 눈동자가 잠시 반짝이더니 입에 핏물이 고인 상태에서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런 후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아예 해당타타 품에서 혼절해 버렸다. 오늘 그는 경국 황제와 수차례 대전을 치렀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손가락 끝에서 검의 기운까지 뽑아냈지만, 황제 폐하의 무상의 정기를 담은 손가락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런데 정신과 정기가 일찌감치 거의 다 소모된 상태에서 이 정도로 버티다가 기절했다는 건, 범한이 이미 대단한 인물 축에 속한다는 걸 의미했다.

광장 주변에서 발걸음 소리가 서서히 안정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도 조금도 느려지거나 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경국 정예군이 광장 주변으로 접근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눈밭 정중앙은 점점 화살의 사정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한편 삿갓을 쓴 수십 명의 고행자들은 군대 앞에 서서 범한 일행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장궁 공격이 자객들을 전멸시키지 못하면, 자연스레 정예 기마병과 고행자들이 나서게 되는 거였다.

지금 범한 일행 중에서 랑도와 검려의 강자 넷을 제외하면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이처럼 강대한 무력이 압박해 오는 상황에서는 절대 도망갈 수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두 9등급의 경지이고, 범한을 제외 하고는 생사는 어느 정도 초월한 터라 이들의 얼굴에서는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랑도와 검려 제자 넷이 서로를 바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각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거였다. 그런 후 북제 황제의 제일 고수가 애석한 모습으로 고개를 돌려 해당타타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런데 작은 사매의 얼굴에서는 이별의 슬픔 같은 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그녀는 차분하게 범한을 품에 안은 채 미소나 짓고 있었다.

이에 랑도도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해당타타 품 안에 있는 범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젓고는 탄식했다.

“이런 때에 아예 혼절을 해버리다니. 저러니 어찌 안 들어줄 수 있겠어!”

* * *

새 용포로 갈아입은 황제는 황성 돌계단을 따라 조용히 위로 걸어 올라갔다. 그러자 금군 사병들이 속속 무릎을 반만 꿇고 군례(軍禮)를 올렸고, 그 누구도 감히 밝은 황색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황제를 바짝 따라가고 있던 요 태감에게 황제가 갑자기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

“왜 아직이냐?”

“그것이…….”

요 태감은 순간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그는 지금 황제 폐하께서 작은 범 대인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계신 상태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요 몇 년 동안 작은 범 대인을 뼛속 깊이 총애하셨다는 사실은 더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태자와 2 황자 마마가 죽은 후 황제 폐하는 온 황궁 안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작은 범 대인을 총애하셨다. 이에 그는 조금 전 자신의 명으로 만 발의 화살이 일제히 발사되어 작은 범 대인이 죽었다면 황제 폐하께 어찌 아뢰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나 황제 폐하께서 친히 황성 위로 올라오시자 요 태감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고작 황궁 밖에 있는 자객들만 포위해 죽일 생각이라면 황제 폐하의 안배로 이미 충분한 건데. 무엇 하러 친히 성벽 위까지 올라가 보시려 하는 걸까? 그렇다면 아직 마음이 내키지 않으셔서일 수도 있데…….

“짐이 저 불효자의 죽음을 직접 봐야겠다.”

황제가 요 태감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건지는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결국에는 싸늘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말았다.

“활을 쏘거라.”

천자의 말은 사두마차도 따라잡지 못한다고 하는데, 활을 쏘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자 황제가 아직 황성의 돌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중인데도 광장 주변에 있는 군사들은 당기고 있던 활의 시위를 놓아버렸다. 만 발의 화살이 빽빽하게 슈욱, 하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흡사 하늘과 해를 가려버린 메뚜기 떼처럼 광장 정중앙부터 반경 10자 안팎을 향해 날아갔다.

만약 지금 범한의 몸 상태가 온전했다면, 어쩌면 그는 얼마 전 깨달은 심법으로 곧장 수십 장을 달려 영혼을 잡아먹으러 온 빽빽하게 빗발치는 화살을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미 혼절한 상태라 이제 세상에서 빗발치는 화살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더는 없었다.

그런데 경국 군이 화살을 쏘기 바로 직전이었다. 랑도가 고함을 쳤다. 그리고 눈에서 날카로운 빛을 번뜩이며 해당타타 품 안에 있는 범한을 잡아챘다. 그런 후 한 손으로 곡도 사이의 쇠사슬을 잡고 두 개의 곡도 사이에서 바람도 새지 않게 휘두르며 조금 전 고행자들이 나타났던 방향으로 용맹하게 돌진했다.

* * *

경국 황제가 느긋하게 황성을 밟고 올라섰다. 밝은 황색의 용포를 입고 있는 그는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뒷짐을 지고 있는 양손은 조금의 떨림도 없어 유달리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런 그의 눈언저리는 움푹 들어가 유난히 차가워 보였고, 동요하는 모습도 전혀 없었다.

황성 앞 눈밭이 붉게 피로 물들어 가고 화살이 땅바닥에서 흩어지고 있는데도 황제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을 살짝 옮겨 생사를 알 수 없는 채로 사람들 뒤에서 보호 받고 있기만 한 범한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맛살을 아주 살짝 찌푸렸다.

빽빽하게 화살이 쏟아지자 검려 강자 넷이 주변을 지켰다. 이들은 9등급의 강력한 무공 실력으로 검(劍)의 그물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셀 수도 없이 많은 화살을 조각냈다. 그런데 사람의 힘은 언젠가는 고갈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예전에 삼석 대사가 경도 밖에서 어지럽게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와 달리 오늘 경도에서는 수 천 수 만 발의 화살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니 빗발치는 화살에 누가 피에 젖지 않고 또 누가 죽지 않을 수 있을까?!

빗발치는 화살에 검려 강자 넷은 화살 여러 대를 맞았지만, 그래도 굳건히 버텼다. 하지만 피를 잔뜩 흘리고 있어서 제아무리 사고검의 잔혹함과 살벌함을 답습한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다음번 공격이 들어오면 이들도 쓰러질 수 있었다.

한편 검의 그물 가장자리에 있던 하도인은 화살을 맞아 고슴도치가 되어 완전히 죽어 있었다. 북제에서 위풍당당했던 9등급 고수인데도 강대한 제국(帝國)의 힘 앞에 쉽사리 무너져 내린 거였다.

제아무리 강대한 개인도 흥성한 왕조 앞에서는 한낱 힘없는 땅강아지밖에 되지 않는 거였다. 그 개인이 평범한 사람의 경지를 넘어선 존재, 그러니까 대종사인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빗발치던 화살이 멈추었다. 이에 피투성이가 된 랑도도 원래 있던 자리로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범한을 보호하며 뚫고 나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빽빽하게 빗발치는 화살을 결국에는 뚫지 못했다. 그가 들고 있는 영혼을 잡아먹는 곡도도 고행자 둘만 제거하고는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서는 화살이 뼈를 뚫고 박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해당타타가 그런 랑도를 바라보았다. 랑도가 제 자리에 서서 생각했다.

‘황제 폐하의 명이니 이 자를 반드시 살려야 해.’

이제 다칠 사람은 다치고, 죽을 사람은 죽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세상을 주무를 수 있는 강자였지만 애당초 하나로 뭉쳐 용감하게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는 없었다. 경국 조정의 포석을 보아하니, 처음부터 아예 살아나갈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은 거였다.

* * *

성 아래에서 펼쳐지는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한동안 말없이 차분하게 지켜보던 황제가 크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계속하라.”

아까 태극전에서의 싸움이 끝난 찰나, 황제는 드디어 해탈한 기분이었다.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무형의 굴레에서 벗어난 거였다. 이에 그는 과거의 자신감, 침착함, 우아함을 되찾고 조리 있게 모든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대동산 이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20여 년 전 태평 별원 사건 이후, 이 위대한 경국 황제는 검은 천을 두르고 있는 소년과 사라져버린 상자를 가장 경계하며 지냈다.

그런데 태극전에서 범한을 막다른 길로 몰고 갔음에도 상자도 오죽도 나타나지 않자 황제는 마지막 경계심이 사라져 버렸다. 범한이 그 상자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적어도 범한에게 있는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든 거였다. 한편 오씨는…… 분명 신묘에 붙잡혀 있느라 다시는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황성 아래에 있는 죽을힘을 다해 몸부림치는 강자들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서는 큰 파란 같은 건 일지 않았다. 아까 범한이 생각했던 것처럼, 대동산에서 모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저 9등급의 별 볼 일 없는 녀석들쯤이야!

물론 황제는 이 정도의 별 볼 일 없는 일로 전혀 득의양양해 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제는 저 멀리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범한을 차분하게 지켜보며 단지 어렴풋하게 피로감만 들 뿐이었다.

황성에서 군령이 내려지자 온 광장을 포위하고 있던 경국 정예병들이 다시 장궁을 들었다. 그리고 눈밭에 있는 피투성이 강자들을 향해 차분하게 활을 겨누었다.

정예병들은 저 자객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아는 거라고는 자신들의 시위에서 화살이 나가면 저 자객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결과는 죽음뿐이라는 거였다.

어쩌면 일부 군 장수나 똘똘한 병사는 저들 중에 있는 작은 범 대인을 알아봤을 것이다. 그리고 범한을 발견한 이상 심장이 떨릴 것이다. 범한은 경국에서 전기적 존재였다. 그런 전기적인 인물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다니. 경국 사람이라면 동요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에 지금 이 순간 세 갈래 길에 있는 섭중, 궁수 뒤에 있는 사비, 황성 위의 궁전, 이들 경국의 군측 고관 세 사람의 마음에는 희미하게 슬픔이 드리워졌다.

하지만 군왕의 명도, 군령도 지엄한 것이라 군사들은 들고 있던 장궁을 들어 광장 한 가운데를 조준했다.

그러자 황제가 눈을 더 가느다랗게 떴다.

* * *

하지만 황제도,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게 있었다. 황성 앞 광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적성루(摘星樓) 꼭대기에서 누군가가 황성에 있는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적성루는 경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이곳은 원래는 천문관이 별을 관찰하기 위해 사용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섭씨 아가씨가 경도로 온 후 경도 외곽에 위치한 산에 새로 천문대가 지어져, 이곳 적성루는 점점 쓸모없는 곳으로 변해갔다. 이에 이곳은 평소 청소하는 종 말고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경력 12년 정월, 그것도 눈이 내리는 날 마르고 작은 체구의 사람이 적성루 꼭대기에 포복해 있었다. 그는 사환이 입는 것 같은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지만, 하얀색의 큼직하고 값비싼 털가죽 옷으로 몸을 덮어 건물 위에 쌓인 눈인 양 위장을 하고 있었다.

이 자는 제대로 위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보라까지 치니 그는 영락없는 적성루 꼭대기에 쌓인 눈 같았다.

값비싼 하얀 털가죽 전방에는 차가운 금속 재질의 관이 앞으로 삐쭉 나와 있었다. 바로 일찍이 초원에서 연소을을 죽인 저격총이었다.

하얀 털가죽 아래에 있는 사람이 살며시 입김을 불어 언 손을 녹였다. 그런 후 다시 광학조준경에 눈을 대고 호흡을 조절하며 긴장해 뛰고 있는 심장을 정기로 진정시켰다. 이어 그는 조준경으로 황성 위에 있는 황제 폐하의 몸을 조준했다.

황성은 아득히 먼 곳에 있었지만 황제는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오늘 환경은 적응할 만했다. 창산에서 보낸 눈 쌓인 밤이 사실 오늘 경도에 쌓인 눈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털가죽 아래의 총구가 살짝 이동해 마지막 조준을 마쳤다. 그러자 손가락이 싸늘한 금속 위에 안정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로 잠시 멈추어 있다가 가볍게 방아쇠를 당겼다.

‘칵!’ 하고 작게 울린 소리는, 이내 낮게 깔린 소리로, 다시 천둥소리로 변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공중을 찢는 괴상한 울음소리와 함께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한 불꽃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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