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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45화 (1,045/1,108)

1045화 창산의 눈, 검에 낀 성에 (8)

죽음과도 같은 평온함이라니. 이는 너무나도 괴이했고, 또한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 거였다. 범한은 검려 제자들을 동원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황궁 밖으로 나가기 위해 그가 선택한 길은 그림자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황성 정문이었다.

그가 황성 정문을 선택한 건 사전에 명확히 판단을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범한은 자신이 입궁해 황제 폐하와 교섭과 담판을 하면, 분명 그사이 자신이 하종위를 죽인 일이 경도에서 문제가 되어 문관들이 달려들어 ‘통촉하여주시옵소서!’를 외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고집불통인 어사들의 경우 아예 눈밭에 무릎까지 꿇고 앉아 황제 폐하에게 지속적으로 압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범한의 판단은 어젯밤 요 태감의 보고로 확인되었다. 그러니 황궁 정문을 나가 도망가고 있는 지금, 범한이 봐야 할 건 분노와 슬픔에 찬 관원들이 왁자지껄 논의하고 그들에게 밟혀 질척해진 바닥이어야 했다.

그리고 각부에서 온 하인과 종들이 멀리 떨어진 골목에 보이지 않게 세워둔 마차도 있어야 했다. 이에 문으로 도망쳐 나온 범한 일행은 혼란을 틈타 도망가거나, 마차 하나를 훔쳐 타고 생각해 놓은 퇴로로 빠져나가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새하얗고 깨끗한 대지뿐이었다. 범한에게 보이는 건 자신의 일행이 눈밭에 남긴 족적과 흐릿한 그림자뿐이었다. 그리고 들리는 건 자신의 무거운 숨소리뿐이었다.

그러다 모두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뒤쪽에 있는 황궁 문이 벌써 천천히 닫히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금군과 호위병은 쫓아오고 있지 않다니. 그렇지만 그림자는 냉랭한 얼굴로 앞으로 빠르게 나아가기만 했다. 수상쩍고 궁지로 몰려는 게 분명했지만, 어쩌겠는가! 빠르게 전진하며 뚫고 지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을.

황성 앞에는 넓고 웅장한 광장이 펼쳐져 있다. 과거 이곳에서는 십만 명이 열병했었다. 3년 전 경도 반란 때 진씨와 섭씨 두 가문이 군을 이끌고 와 황궁을 호위했는데, 그때도 이곳에 수만의 대군이 집결했었다. 그러니 눈이 많이 내린 가운데 황궁에서 힘겹게 도망 나온 범한 일행만 광장에 덩그러니 있는 건 너무나도 고독하고 불쌍해 보였다.

그런데 이 외로운 대오의 오른쪽 뒤편에서 연달아 잡음이 들려왔다. 황성 각루에서 벌어졌던 산발적인 전투는 이미 끝이 난 것 같았다. 북제에서 경국에 가장 오랫동안 심어 두었던 간자와 자객에 대한 소탕이 금군에 의해 대략 끝난 거였다. 그리고 지금 막 사람 형체 두 개가 각루 쪽 주홍색 황궁 담벼락에서 떨어졌다.

황성은 엄청나게 높았다. 그리고 두 개의 사람 형체는 매우 빠른 속도로 떨어져 곧 눈밭으로 추락해 전신이 골절될 일만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공중에서 크게 고함치는 소리가 나더니 사람 형체 하나가 허리에 차고 있던 곡도를 재빨리 꺼냈다. 그러자 곡도가 황궁 담벼락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건 실제로는 매우 기묘하게 칼로 벽을 내리치는 동작이었다. 이에 매번 칼이 움직일 때마다 새로 보수한 황궁 담벼락에는 깊게 흔적이 남았다.

황성에서 뛰어내린 사람 중 하나는 한 쌍의 곡도를 사용했으며, 뜻밖에도 허공에서 자신의 몸을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실력도 고강했다. 한편 다른 사람은 무공 실력이 눈에 띄게 약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동료의 곡도 사이에 있는 쇠사슬에 들고 있는 칼을 끼워 놓고 있었다.

오르락내리락하기를 불과 몇 차례, 두 사람이 황궁 담벼락 아래로 무겁게 떨어졌다. 그런 후 부상을 입지 않은 덩치가 큰 강자가 동료를 움켜쥔 채 눈밭 중앙을 향해 뛰었다. 이제 보니 그들은 범한 일행과 합류하려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북제에 몇 남지 않은 9등급 고수였다. 그중 한 사람은 고하 대사의 제자이자 북제 황궁의 제일 고수 랑도였고, 다른 한 사람은 하도인이었다.

범한 일행은 이제 막 아득히 펼쳐진 눈밭의 정중앙까지 달려온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영문도 모르게 동료가 늘어나 버려 그들은 순간 당황했다.

북제의 젊은 황제가 범한 일행을 돕기 위해 뜻밖에도 수하로 둔 최고 고수 둘을 경국으로 잠입시킨 거였다. 북제 황제 입장에서는 큰 대가를 감수한 거였다. 그런데 정작 랑도 대인은 이제 막 경도로 들어온 터라 제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경국 황궁 안에 잠입해 있는 간자와 합류해 수성용 쇠뇌로 화살을 날린 후 태극전 앞에서 벌어지는 암살전의 시작과 끝만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영웅이 좌절하면 약해지기 쉽다고 하는데, 이보다 더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무공을 쌓아온 랑도가 경국 황제에게 칼도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금군에게 쫓겨 황성에서 뛰어 내리다니. 그리고 함께 온 하도인은 다리가 다쳐 그에게 들려 있는 중이고 말이다.

* * *

“그만 뜁시다.”

줄곧 그림자에게 들려 있던 범한이 자신들과 합류하러 다가오는 랑도를 바라보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범한의 동공이 살짝 수축했다. 속으로 놀라기도 했지만 황당해서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왜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어나길 바라는 일에 다 참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검려 제자든, 랑도든, 이들의 출현으로 범한의 마음을 싸늘하게 식기 시작했다. 범한은 오랫동안 계획을 짰고, 계획을 실행할 방법을 오랫동안 강구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원칙이 무너져버려 슬프고 처량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범한을 더 슬프고 처량하게 만든 건 이 광장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었다. 일행은 설원이 된 광장 정중앙에 모여 있었다. 이곳은 전방 민가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었고, 오른쪽 세 갈래 길 입구와도 가까웠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양쪽에서 모두 알 수 없는 위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범한은 다시 한번 황제 아버지에게 당해 철저하게 패한 거였다. 그리고 검려 제자와 랑도의 출현으로 마지막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남겨 놓은 변명거리도 모두 사라진 거였다. 범한은 황제 폐하가 황궁에서 이미 자신들을 죽이라는 황명을 내린 것도, 자신의 심리전이 결국에는 실패하리란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옅게 피로가 스쳐지나갔다.

그림자가 조용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자 눈보라 속에서 해당타타가 입가의 피를 닦아내더니 눈밭에서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범한에게 살며시 웃으며 다가왔다. 그리고 몸을 숙이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을 붙였다.

“내가 일찌감치 말했잖아요. 안지의 그런 우유부단한 태도로는 이도 저도 안 된다고요. 그건 정말 유치한 생각이라고 말이에요.”

“나는 단지 죽게 될 사람을 최소화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더군다나 결국에는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니까요.”

범한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눈 위에 앉아 있다 보니 엉덩이 밑에서 전해져 오는 빙설의 차가움이나 느꼈다.

“만약 내가 뻔뻔함이 극에 달한 인간이라면 만(萬) 명이 내게 절을 하도록 했을 거예요. 한데 나는 그렇게는 못 해요. 그게 아니라면 내가 오늘 황궁에서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겠어요?”

그러자 왕 십삼랑이 피와 살이 엉겨 붙은 팔을 늘어뜨린 채 범한 곁으로 다가와 갈라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적어도 대인은 시도는 해봤잖아요. 패하기는 했으나,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살짝 틀어 눈밭 위에 핏물이 고인 침을 뱉고는 숨을 헐떡이며 대꾸했다.

“그래도 죽는 건 정말 두려운데 어쩌겠나.”

말은 이렇게 했지만 범한의 눈동자에서는 평소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평안함과 안락함의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온 걸 그리 반기지 않는군요.”

랑도가 범한 곁으로 다가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단순히 대인의 개인적 원한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우리들에게도 개인적인 원한을 푸는 일이었습니다. 하여 내가 예까지 온 건 대인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일로……. 물론 원래 살인이란 것과 무공 수행 간에는 큰 관련이 없다는 걸 오늘 처음 알게 되었네요. 또한 이번 일에서 나는 무능하게 비춰졌고요.”

랑도가 자신의 사매인 해당타타를 잠시 바라본 후 다시 범한을 향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만약 타타가 여러분의 계획을 나에게 말해줬더라면, 어쩌면 오늘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습니다.”

“아, 네. 어쩌면 결과는 일찌감치 정해져 있던 것일 수도 있으니, 정해진 운명을 믿어야겠지요…… 하나 이따가 대인께서 나를 업고 빠져나가 주신다면, 대인이 무능하다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범한이 랑도를 향해 치아를 드러내고 처참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새하얗고 드넓고 조용한 눈밭 정중앙에 천하에서 가장 강한 실력을 지닌 자객들이 한데 모여 한담이나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마치 경국의 강력하고 가공할만한 국가 기관에게 포위되어 공격당하면 아무도 도망갈 수 없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했다.

황성 위에서 무수히 많은 금군이 여러 겹의 검은 띠를 이루었다. 그리고 활을 들고 성 아래 눈밭에 있는 자객들을 싸늘하게 주시하며 언제든 화살을 쏠 준비를 했다. 정중앙에 서 있는 궁전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눈밭에 있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그는 작은 범 대인이 왜 지금 이 순간에 저렇게 웃는지 이해가 안 가 마음이 좀 무거웠다.

범한 일행의 대화가 시작되었을 무렵 황성 앞 광장에도 일찌감치 국면 변화가 일었다. 평범해 보였던 민가 사이에서,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쇠뇌와 활이 빽빽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광장 중앙에 있는 사람을 향해 차가운 빛을 번쩍이는 화살이 장전되었다.

한편 가장 가까이 있는 세 갈래 길 입구에서는 우레와 같은 말발굽 소리가 서서히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철갑 갑옷을 입은 2천여 명의 정예 기마병이 이용할 수 있는 통로란 통로는 모두 봉쇄해 버렸다.

그런데 만 개의 화살이 겨누고 있는데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철갑 기마병이 몰려왔는데 어찌 맨몸으로 막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의 모든 것이 이미 막다른 길로 몰려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상황을 타개하고, 사신의 도착 시간을 지연시켜 변수는 나타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세 갈래 길에 있는 위풍당당한 기마병을, 기마대 맨 앞에서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있는 섭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민가 2층에 삼엄하게 포진해 있는 무시무시한 화살들과 민가에서 나와 점점 설원 정중앙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수십 명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수십 명의 사람들은 삿갓을 썼고 한없이 냉랭 보였다. 열정적 내면을 가진 고행자들이었다. 이에 범한은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과거 범한의 계획에 따라 1 황자가 이끄는 금군은 민가 쪽에서 제거 작업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감찰원 각 처와 흑기가 가담한 가운데 정양문 앞으로 난 길부터 세 갈래 길까지 반란군의 기마대를 처치했었다. 그 결과 진항이 황성 앞에서 창에 찔려 목숨을 잃었고 이로써 진씨 가문은 대가 끊기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황제 폐하는 범한이 3년 전에 한 것과 똑같이 활로를 막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세상일이란 게 돌고 도는 것 같기도 하고, 또한 모든 게 하늘이 정한 인과응보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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