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3화 창산의 눈, 검에 낀 성에 (6) - 눈 깜짝할 사이
왕 십삼랑은 장렬하기가 천하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그런 그가 이번에 어느 때보다도 장렬한 검 공격을 펼쳤다. 이를 과거 현공 사당에서 하얀색 옷을 입고 태양에서 뛰쳐나왔던 사고검의 검 공격과 비교하면, 작열하는 느낌은 3할, 광명정대한 느낌은 3할 정도가 더 많았다. 분명 뒤에서 몰래 습격한 것임에도 왕 십삼랑의 공격은 기어코 광명정대한 느낌을 담고 있던 거였다!
순수하고 바른 검심(劍心)을 지닌 검려 마지막 제자는 사고검의 진수를 모두 물려받은 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범한과 사고검의 대화를 통해 패도의 정기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런 그가 평생 갈고 닦은 무공을 이번 검 공격에 담았으니, 어찌 맹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범한에게 이번 검 공격이 들어왔다면 범한은 분명 다쳤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뒤쪽에 자리 잡은 고요한 대전에서 갑자기 9등급 상의 강자가 나타난 걸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일지대산(一指大山)으로 범한을 압도해 넘어뜨린 후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리고 돌아서지도 않은 채 곧바로 뒤쪽을 향해 소맷자락이나 툭 털었다.
경국 황제는 이번 생에 주먹 한 방, 손가락 하나, 소맷자락 툭 털기만으로도 인간 세상의 정점에 서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건 아무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였다. 하지만 오늘 황제의 소매 털기는 산과 강을 삼켜버리지 못했고, 도리어 휘몰아치는 바람에 구름이 흩어지듯 왕 십삼랑의 장렬한 검 공격에 말려 들어가 힘을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도 결국에는 신이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황제 폐하는 전성기 때의 황제 폐하가 아니었다. 그리고 요 몇 년 동안 늙고, 병들고, 다치고, 외롭게 지내면서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이미 자발적으로 또 비자발적으로 최고의 위치에서 내려 온 상태였다.
왕 십삼랑이 내지른 소리는 여전히 텅 빈 황궁 안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북위 천자의 검은 마구 빛을 발하며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힘이 요동치는 경국 황제의 소맷자락을 뚫고 황제의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며 베어버렸다.
그런데 황제는 소맷자락을 털 때 몸을 살짝 틀었다. 이에 왕 십삼랑이 흉포하고 맹렬한 검 공격을 펼쳤음에도 황제는 검에 스쳐 살짝 벤 게 전부였다.
반면 소맷자락 안에 있던 황제의 손은 황금용이 구름 속에서 길을 찾듯 정말 기묘한 방법으로 어느새 왕 십삼랑의 손목을 잡아채 버렸다.
이에 왕 십삼랑이 손목을 흔들었다. 그러자 손에 들린 북위 천자의 검이 영험한 뱀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불가능한 각도임에도 경국 황제의 턱을 찔러 버렸다. 경국 황제가 윽,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어깨를 뒤쪽으로 빼 왕 십삼랑의 가슴팍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그러자 쩌걱, 하는 소리가 수차례 울렸고 왕 십삼랑이 미친 듯이 피를 뿜었다. 그의 늑골이 여러 곳 부러졌을 수도 있는 거였다.
왕 십삼랑은 엄청난 힘에 자신의 몸이 빠개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죽기 살기로 손을 뒤로 돌려 황제의 오른손을 단단히 움켜쥐고는 눈이 더 시뻘게지도록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 * *
이 중요한 순간에 꽃 한 송이가 왕 십삼랑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여기에 아예 없었다는 듯 상큼하고 자연스럽게 툭 튀어나왔다. 그런 후 마치 여행객이 뜨끈한 물을 갈망하듯, 눈보라 속에서 핀 꽃나무가 따스함을 필요로 하듯 자연스럽게 황제의 다른 손을, 그러니까 왼손을 붙들어 버렸다.
해당타타가 온 거였다. 그녀는 북제의 성녀이자 현재 천일도의 지도자였다. 다시 말해, 안정적 위치에 있는 연약한 여인이 경국 황제에게 찰싹 붙어 버린 거였다. 그러자 경국 황제의 소맷자락에 붙은 구름 한 점, 꽃 한 송이는 털어도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계속해서 상대방을 귀찮고 두렵게 만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막상 공격에 나선 해당타타는 경국 황제의 급소를 노리지는 않았다. 오로지 온몸과 공력을 이용해 경국 황제의 왼손에만 딱 붙어 있을 뿐이었다.
경국 황제의 눈동자는 유난히 싸늘하고 차분했다. 하지만 원래 마른 그의 양 뺨은 더 수척해지고, 두 눈은 더 움푹 들어가고, 얼굴은 더 창백해진 것만 같았다. 황제는 자신의 양손을 잡고 늘어진 젊은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바로 이미 죽은 두 놈이 자신과 대적시키기 위해 남겨 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황제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단지 종소리를 닮은 울림소리만 건장해 보이지 않는 가슴에서 울리기 시작했을 뿐…….
웅장한 정기가 순식간에 9등급 상 강자인 두 청년의 체내에 침투했다. 그러자 숨 한 번 쉬는 사이 왕 십삼랑의 오른쪽 팔이 타들어 가듯 말라붙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 코, 입, 귀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물론 해당타타도 멀쩡할 리 없었다. 그녀는 입으로 피를 토해내는 걸 시작으로 극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고, 이에 언제든 황제에게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자 태극전 앞에 쌓인 눈도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갔다. 한편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범한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처럼 무기력하게 눈밭에 누워 있었다. 이에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을 도와줄 사람이 더는 없어 보였다. 이 두 사람은 일찌감치 대종사들에게 그들의 경지로 들어갈 가능성이 가장 큰 젊은이들로 인정받았었다. 그런데 설마 이 대륙에 하나 남아 있는 대종사의 손에 죽어야 하는 걸까?
황제에게 순간 경계심이 일었다. 그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줄곧 모든 걸 경계해 왔다. 또한 그는 자신이 대종사의 경지에 있다고 해서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 생각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사고검도 아니기 때문에 범한의 조력자들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경국 황제는 지금까지, 그리고 아까 태극전 위에서도 자신이 가장 경계하는 변수가 일어날 징조는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경계심 때문에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붉게 물든 눈밭을 계속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눈빛이 닿은 곳은 눈이 빠르게 녹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론 이는 황제가 눈빛으로 녹인 건 아니었다. 분명 아까 범한이 손가락 끝에서 검의 기운을 쏟아낸 순간부터 녹기 시작한 거였다.
그런데 이 모든 건 지극히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국 황제가 손가락으로 범한에게 상처를 입히고, 양팔에 두 청년 강자가 달라붙었을 때부터 눈은 녹고 있었다.
눈밭 아래에는 하얀색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천하제일 자객이자, 영원히 어둠 속을 걷는 왕이었다. 그는 검으로 얼마나 많은 수급을 거둬들였는지 모를 감찰원 6처 수뇌이자, 동이성 검려의 진정한 첫 번째 제자이며, 바퀴 달린 의자 옆을 지키던 그림자였다. 그런데 그가 이번 생에 하얀색 옷을 입은 건 딱 두 번이었다.
첫 번째는 현공 사당에서 햇빛을 맞으며 뛰어들었을 때였다. 그때의 그는 몸에 황금색을 드리우고 있어 마치 인간 세계로 쫓겨 내려온 신선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오늘이었다. 눈 속에서 나온 그는 온통 새하얀 색으로 뒤덮여 있어 마치 성인(聖人) 같았다.
그림자가 두 차례 하얀색 옷을 입고 공격에 나섰는데, 그때마다 상대가 천하 최강자인 경국 황제인 거였다. 이에 그림자는 오늘 유사 이래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음험한 공격 방법을 택했다.
범한과 왕 십삼랑과는 다르게 그의 검(劍)은 하얀색인 것 같았지만 아무런 광택이 나지 않았다. 이에 소박하고 화려해 보이지 않는 검은 그야말로 암담해 보였다.
그의 검 공격도 소박하니 특별히 움직임이 빠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단히 안정적이었다. 각도 선택이 이상하리만큼 괴이했으나, 검신의 경사 각도와 검을 돌리는 게 모두 계산된 방향에 따라 움직이는지 뻗을 때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이번 검 공격은 너무 기묘했다. 그는 경국 황제의 안면, 안와, 목, 하복부처럼…… 치명적인 곳이 아닌, 그렇다고 발끝, 무릎, 옆구리처럼 평범하지 않은 곳도 아닌, 경국 황제의 좌측 허벅지를 노렸다.
* * *
‘푸슉!’ 하는 소리가 났다. 강력한 황제 폐하도 이번만큼은 그림자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거였다. 살짝 하얀 검 끝이 황제의 허벅지를 가볍게 찔렀는데 그곳에서는 피 꽃이 강렬하게 피어났다.
그림자는 자객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살인을 하는 거였다. 이에 그에게는 죽이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허벅지 부상은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다. 하지만 허벅지에 있는 혈관은 일단 파열되면 그곳에서 피가 다섯 자 높이까지 분출해 살아날 사람이 없다는 걸 그림자는 알고 있었다.
다만 이번 검 공격은 황제의 허벅다리를 얕게 찌르고 만 것이라 이 강자를 죽이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왜냐하면 그곳의 혈관이 파열되지도 않았을뿐더러 눈 속에 엎드려 있던 그림자가 오로지 도축에만 관심 있는 백정처럼 안정적인 속도로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공격해나가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의 얼굴이 세상에 흩뿌려져 있는 눈보다도 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온통 하얀색 옷을 입은 그림자가 검을 빼 드는 순간, 사실 이미 후퇴하고 있었다. 양손에 달라붙어 있는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까지 데리고 눈 위에서 미끄러지듯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얀색 옷의 그림자는 찌르기 공격에 성공한 거였다.
순간 고통이 밀려오자 황제의 동공이 살짝 수축했다. 그리고 그는 눈보라 속에서 곧바로 용으로 변해 주변에 있는 눈송이를, 모든 사람을, 모든 검의를, 모든 저항을 뭉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데 뭉쳐지게 된 사람들이 태극전 앞 눈밭에서 나부끼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빠르게 춤추었다. 그것도 몇몇 모호하게 보이는 사람 형체를 따라 춤을 추었다. 그리고 허공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둥글게 횡으로 날며 점점 무수히 많은 선을 만들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민가 규방에서 볼 수 있는 둥글게 말아 놓은 털실이나, 강남의 봄누에가 토해낸 고치를 닮은 공 같은 것이 점점 그 안에 있는 위태로운 사람들의 형체를 가려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새하얀 눈으로 만들어진 공은 정지해 있지 않고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눈밭 뒤쪽에 있는 태극전을 향해 후퇴했다. 안에 있는 몇몇 강자들이 어떤 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빠르게 회전하는 눈은 실처럼 변해 강한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까 왕 십삼랑과 해당타타는 태극전 안에서 나올 때 두 짝으로 된 여닫이문을 열고 나왔다. 이에 태극전 그림자를 보면 마치 거대한 괴수가 입을 벌리고 거대한 눈공[雪球]을 시커먼 어둠 속으로 꿀꺽 집어삼켜 버릴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은 활짝 열려 있지 않고 살짝만 벌려진 상태였다. 이에 태극전 정문까지 온 눈공은 문보다 크기가 훨씬 커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반복적인 무늬가 있는 나무 문이 순식간에 눈공의 둥그런 기세에 담긴 살의에 전의를 상실해 버려서였다. 그러자 문에 깊은 상흔들이 한꺼번에 생겨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문은 썩은 나무처럼 부서져 내렸다.
이렇게 조용히 모든 걸 부수어 버리려면 아마도 만 년이란 시간은 걸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희뿌연 눈의 실로 만들어진 공이 그에 맞먹는 강력한 효과를 낸 거였다. 본래 부드럽고 약한 눈송이가 고속으로 회전하며 무수히 많은 날카로운 강철 칼날로 변해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걸 부숴버린 거였다.
물론 이와 같은 가공할만한 효과는 당연히 그 공간 안에 들어가 있는 대종사가 최고 경지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