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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41화 (1,041/1,108)

1041화 창산의 눈, 검에 낀 성에 (4) - 눈 깜짝할 사이

한동안 고요했던 황궁에 어느새 아침이 찾아와 내관들은 나와 눈을 쓸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허공을 스치고 지나가는 회색의 정체를 곁눈으로 보고는 순간 자신의 눈이 잘못된 줄로만 알았다. 왜냐하면 세상에 그리 빨리 날아가는 사람은 없어서였다.

범한은 음침하고 조용한 황성 안을 자유자재로 날았다. 그러다 7, 8장(丈) 간격으로 처마 위 또는 담벼락 위에서 잠시 점으로 변한 후 다시 조금도 막힘없는 다른 궁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범한의 이와 같은 몸놀림과 속도는 그동안 인간계에서는 볼 수 없는 거였다.

굵은 땀방울 하나가 범한의 목덜미를 타고 등줄기로 흘러내렸다. 그는 전력을 다해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기술을 구사하고 있었지만 정기는 그다지 많이 소모하고 있지 않았다. 천지간의 세를 빌려 천지간으로 들어갔으니, 그로써 천지간의 오묘함을 얻은 거였다. 이에 허공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가듯 날고 있었지만 범한은 마음이 평화로웠다. 그리고 그사이 체내에서 정기가 순환하는 두 개의 길 역시 따뜻해지기 시작해 황제 폐하의 위압 때문에 생긴 상처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그 무명(無名: 이름 없는)의 법술이 천지와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충분히 역량을 발휘해 범한을 더 빨리 회복시켜주고 더 좋은 상태가 되도록 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발끝으로 처마 위 석수(石獸)의 머리를 밟고 지나갔지만 석수 입안에 들어 있는 방울이 놀라 울리는 일은 없었다. 범한은 이렇게 황궁 위 허공을 날며 대지와 황궁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굽어보았다. 그러자 그에게 문득 신선이 되어 떠돌다 보니 창생이 하찮게 느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나 물을 끓이고 눈을 쓰는 사람 중 누구 하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자 범한은 그것 때문에도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범한의 등줄기에서는 여전히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범한은 이 조화로운 경지에 온 정신을 쏟고 있느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힘을 숨긴 강대한 위력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건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마치 천천히 다가오고 있지만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죽음의 신의 발걸음처럼 말이다.

범한은 자신이 이 정도로 속도를 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뒤에서 쫓아오는 황제 폐하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범한의 양쪽 동공이 살짝 수축되었다. 그리고 그가 남쪽 저 멀리 높이 솟은 황성 쪽으로, 그것도 황성 아래에 있는 문을 향해 날아갔다.

범한은 황궁 서북쪽 모퉁이에 자리 집은 황폐한 정원에서 가볍게 벗어난 후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북궁 문이나 황궁 담벼락을 넘어갈 수 있었는데도 그리하지 않다니 말이다.

그가 황궁 안에서 황제와 오랫동안 담판을 한 건 당연히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다. 바로 이들 부자가 현재 상황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서였다. 일단 범한은 황제 폐하께 이번 싸움은 두 사람만의 전쟁이 될 거라 약속한 터였다. 그리고 황제는 대경국의 천추만대를 위해 오로지 범한에게만 위력을 행사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범한이 도망치면 적어도 천하는 여러 해 동안 별 탈이 없을 것이다. 천하 각지에 숨어 있는 패 때문에 범한이 죽기 전에는 황제는 아들 부하에게 손을 쓸 수 없는 거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천자의 말은 사두마차도 따라잡지 못한다.’라는 말에 담긴 뜻이었다.

하지만 황제 입장에서는 자신의 제국 안에 자신을 위협할 세력이 남아 있는 걸 윤허할 리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어떻게든 오늘 범한을 죽이려 했다.

그런데…… 범한은 궁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물론 황궁은 사방팔방으로 막혀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9등급 강자도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주홍색의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과거 오죽 아저씨가 늙은 홍 태감을 유인해 출궁한 것만 봐도 인간 세상 정점에 오른 강자에게 이 황궁 담벼락은 절대 천연 요새가 될 수 없음이 증명된 거였다. 더욱이 범한은 어려서부터 빠르게 날아가는 기술을 익히려 무진장 노력한 인물이지 않던가.

범한은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눈 내리는 깊고 그윽한 황궁 안에서 계속 남쪽으로만 이동했다. 이에 수방궁, 함광전을 지나 낡은 동궁과 광신궁까지 지났다. 그사이 범한은 많은 사람을 보았지만, 황궁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도 범한을 발견하지 못했다.

범한은 정궁 세 곳, 별궁 여섯 곳을 지나 72명의 여인들을 본 후 드디어 황성 안에서 가장 높은 태극전 위로 올라섰다.

지금껏 우뚝 솟은 대전 위로 올라가 본 사람이 없었다. 개국해 황궁을 건설하느라 이 위로 올라와 작업한 장인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로는 이 대전을 건설할 때 두 사람이 미끄러져 죽었으며, 이 일로 북위 조정에서는 천일도 사람을 청해 원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오늘 태극전의 황색 유리 기와에는 두껍게 눈이 쌓여 두 가지 색이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매우 아름다운 옷감처럼 보여 훼손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범한에게는 눈을 감상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이에 그는 태극전 중앙의 높이 솟은 곳을 향해 날아갔다. 발아래는 정말로 많이 미끄러웠지만 범한은 그 정도로는 몸이 기우뚱하지 않았다.

범한이 가볍게 위로 올라가 태극전 중앙에 높이 솟은 용골(龍骨)을 발끝으로 밟고 섰다. 그런데 바람을 맞아가며 서 있던 터라, 정면으로 눈보라를 맞게 된 범한의 옷자락에서는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지금 범한은 황궁의 제일 높은 곳에 서 있었다. 그래서 정면에 웅장한 황성 정문도, 주변의 황궁 담벼락도 범한에게는 모두 낮아 보였다. 심지어 이곳에서는 경도성이 절반이나 보였는데, 지금 경도성은 몽롱하니 눈보라에 빠져 있었다.

약약이는 출궁 후 지금 어디 있는 걸까? 완아가 사람들을 데리고 경도를 떠났을까? 범한은 황궁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저 멀리 겹겹이 들어서 있는 경도 민가의 지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에서 밝은 황색의 형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범한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눈동자에서는 너무나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왜냐하면 줄곧 기다리고 있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서였다. 기다리는 내내 아무런 변화도 없고, 황궁은 여전히 조용하기만 했다. 특히나 이 웅장한 대전 위쪽에는, 그와 뒤쪽에 있는 황제 폐하를 제외하면, 눈보라밖에 없었다.

범한이 태극전 유리기와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물론 눈보라를 맞으며 꼭대기에서 대전을 치르면 분명 멋지기도 하겠거니와 한껏 존엄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사람은 존엄하게 살 수는 있어도 존엄하게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회색 형체와 밝은 황색의 형체가 태극전 앞 두툼하게 쌓인 눈밭으로 거의 동시에 내려와 멈추어 섰다.

황제는 태극전 근처 긴 복도 앞에 섰다. 그래서 그의 뒤에는 그윽하고 깊은 정전(正殿)의 문이 있었다. 과거 그는 이 궁에서 군신들과 만나 천하 백성들의 생사에 대해 무수히 많이 논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홀로 이곳에 서 있었다.

범한은 태극전 앞에 있는 광장 중앙에 섰다. 그의 주변에는 온통 두툼하게 깔린 눈뿐이었다. 범한이 저 멀리 맞은편에 있는 육중한 황성 성문을 향해 실눈을 떴다. 그가 저 황궁 문을 뚫고 나가기에는 버거울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튼 범한은 천천히 몸을 돌려 황제를 향해 입을 뗐다.

“사실 어떤 일이든 갈 데까지 가면, 결국에는 둘 다 야수가 되어 서로를 물어뜯게 되지요.”

황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냉담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그건 마치 죽은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군왕과 신하 두 사람은 이제야 세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공중 추격을 멈추고 차분하게 궁 앞에 서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낸 거였다.

태극전 밖에서 눈을 쓸던 내관이, 긴 복도를 조용히 걷고 있던 궁녀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칼을 쥐고 서 있는 호위병이 모두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모두 영문 모를 두려움 때문에 눈밭에 있는 황제 폐하와 작은 범 대인을 바라보며 한동안 입도 뻥끗 못 했다.

범한은 조용히 황제 폐하를 바라보며 속으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해서였다. 서북쪽의 황폐한 정원에서 황궁 남성 쪽으로 오는 동안 황제 폐하에게는 자신을 바짝 따라붙어 죽이거나 붙잡을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런데 황제 폐하는 전혀 그러지 않은 거였다.

대체 왜 그런 거지?

이맛살을 아주 살짝 찌푸리고 있는 황제 폐하도 분명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다. ‘범한이 황궁 밖으로 도망가지 않고 남쪽으로만 이동했는데, 대체 왜 그런 거지?’라고 말이다.

범한은 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태극전 위에서 황제 폐하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가 바라던 첫 번째 변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변수는? 범한이 얼마나 실력을 갖추었든, 또 황제가 얼마나 정확히 꿰뚫고 있든 두 번째 변수는 범한도 모르는 거였다.

그건 마치 과거 현공 사당의 신선국처럼 우연(偶然)이 맞물리고 모여서 일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두 상황 안에서 목적에 맞게 행동해도 결국에는 통제하지 못해 생겨나는 변수였다.

이에 범한은 본인도 모르는 변수가 분명 발생할 거라 굳게 믿었다. 왜냐하면 과거 현공 사당 일에 모든 세력이 출동했었지만, 경국의 최대 적인 북제 조정은 지금까지 침묵을 유지하였기 때문이었다.

북제는 북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나라였다. 그러니 숨은 우환거리로 취급하는 경국, 경도, 황궁에 설마 아무런 짓도 해놓지 않았다고? 범한은 그럴 리 없다고, 북제에서 분명 경도 황궁에 비장의 패를 숨겨 놓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경국에서 제왕과 신하 관계에 있는 부자가 서로 반목하고 피 튀기게 싸우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북제 젊은 황제가 숨겨 놓은 비장의 패가 움직일 절호의 시기였다!

* * *

전투 개시를 알리는 것 같은 북소리가 울렸다. 둥, 하는 낮은 소리에 마치 큰 전쟁이 발발이라도 한 듯 수만 개의 활시위가 일제히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사실 그건 황성 각루에 있는 거대한 수성용 쇠뇌에서 나는 소리였다. 쇠뇌틀에 있는 용수철이 침울할 정도로 고요한 이때 가동된 거였다.

강대한 용수철이 작동하자 아이 팔뚝 굵기만 한 강철 화살이 검은색 번개가 되어 순식간에 황성 각루의 공기를 갈랐다. 그리고 폭발적인 힘으로 공기를 진동시켜 태극전 앞에서 휘날리고 있는 눈송이들을 헤치고 고속으로 회전하며 길을 열고는 태극전 앞에 있는 밝은 황색의 형체에게 향했다.

수성용 쇠뇌의 기단이 어떻게 방향을 틀어 황궁 쪽을 향하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더욱이 북제 사람이 어떻게 경국 황성의 금군 대오에 침투해 쥐도 새도 모르게 각루를 통제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범한이 아는 거라고는 북제의 비장의 패가 드디어 움직였으니 이제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이에 범한은 사납게 소리를 치며 기운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검을 쥔 그가 몸이 바위처럼 무거워져다가 폭포수 물처럼 튀어 올라 ‘슈욱’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거대한 쇠뇌의 화살을 따라 황제에게로 향했다.

강력한 쇠뇌가 가까이 다가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 먼 거리였다. 그리고 대종사 경지에 있는 황제 폐하는 소맷자락을 털며 뒤로 물러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경천동지할 수성용 쇠뇌의 화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강력한 공력으로 거리를 시간과 맞바꾸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범한의 곁눈으로 긴 복도 쪽 상황이 들어왔을 때였다. 무릎을 꿇고 벌벌 떨고 있던 궁녀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눈동자에 싸늘한 가운을 번뜩였다.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에서 긴 침을 꺼내 들고는 경국 황제의 뒤를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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