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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40화 (1,040/1,108)

1040화 창산의 눈, 검에 낀 성에 (3) - 눈 깜짝할 사이

눈보라 속에서 범한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차분하게 호흡하고 있었다. 살짝 떨리는 양손 손바닥을 하늘을 향하게 하고 천지간에 있는 이름도 형체도 모르는 원기를 모든 근육과 모공을 통해 탐욕적으로 흡수했다. 이에 그의 옷 위에는 옅은 빛이 한 겹 둘려 있었다.

범한은 이 맑고 차갑고 또 펄떡이는 듯한 원기의 파동이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찌 생겨난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동해 바닷가에서 처음으로 이것의 존재를 감지한 후 작은 책자에 들어 있는 알 수 없는 내용 속에서 호흡심념법(呼吸心念法)을 발견하고는 천지간에 존재하는 원기를 체내로 흡입해 정기로 바꿀 수 있게 된 것만 같았다.

아까 한 차례 검 공격과 세 초식을 펼친 후 충격을 받아 날아오른 범한은 체내에 가득 차 있던 패도의 정기가 순식간에 쇠약해진 느낌이었다. 이에 위기에 봉착한 범한은 더는 숨기지 못하고 황제 앞에서 대놓고 다시 운기조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황제의 상태가 아무리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했고, 마음이 약해져 있고, 늙었다고는 해도 대종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서였다.

황제는 손놀림, 발놀림만으로도 현장 내 기세를 주도했다. 그래서 범한은 온 힘을 다해 대응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순식간에 단전이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까지 간 거였다. 이에 지금 범한은 천지간의 원기를 탐욕적으로 흡입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현재 눈보라 속에 든 원기는 파동이 미약했고, 감지해낼 수 있는 원기 인자가 너무나 희박해 지금 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물론 정기 양을 되돌리는 속도를 조금 더 향상시키고, 억지로라도 눈밭에 더 서 있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대종사와의 일전을 치르는 데 과연 이 정도로 도움이 될까?

이 대륙의 강자에게 해외 법술은 별 볼 일 없는 계륵일 뿐이다. 하지만 고하 대사는 법술을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이에 기꺼이 인육까지 먹은 대종사는 인생 후반기에는 법술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기연이 닿아 그 작은 책자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 책자와 관련해 돌파구를 찾지 못했고, 결국 법술은 기껏해야 보조 수단 정도로만 이용했다.

그건 오늘 범한이 처한 상황과 같은 거였다. 고하는 호흡과 명상으로 원기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그에게 만 경의 진흙탕 안에서 호흡할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난 거다. 호흡하는데도 진흙과 더럽고 탁한 물 때문에 산소는 얼마 흡입하지 못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 * *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눈보라 속에서 황색 용포를 입은 형체가 저쪽에서 결연한 모습으로 서서히 눈을 밟고 다가오고 있어서다. 저곳의 눈송이가 이곳 눈송이보다 훨씬 작아 보일 정도로 두 사람은 수십 장에 달하는 꽤 먼 거리를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경국 황제와 범한에게 거리 차가 천지간이든 지척이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범한은 양 눈에 기쁨도 분노도 없는 오로지 차분함만 담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변형된 북위 천자의 검을 눈가에 수평으로 들고 싸늘한 빛을 크게 번뜩이고 있었다. 체내에서는 크고 작은 두 개의 길이 횡경막 부근을 살짝 스치듯 지나가 허리 뒤쪽 설산(雪山)을 자극해 빛을 번쩍이게 했다.

그러자 환생 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성실하게 축적해 둔 웅장한 정기에서 설산(雪山: 여기에서는 눈 덮인 산이란 뜻)에 작열하는 태양이 비춘 것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정기가 순식간에 눈이 녹듯 녹아내려 시냇물처럼 여러 갈래로 졸졸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양이 많아져 작은 하천, 큰 강을 이루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넓고 굵은 범한의 경맥을 타고 사지 말단 곳곳으로 빠르게 흘러가 범한의 정신력과 육체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발아래 있는 눈에서 순식간에 연꽃 한 송이가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그리고 범한의 몸이 비스듬히 스치듯 지나갔다. 그런데 이는 전혀 힘을 들인 동작이 아닌데도 유달리 사나웠고, 더군다나 그가 든 검에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기운까지 실려 있었다.

눈 내리는 하늘에 순간 번개 치듯 검이 번뜩이며 어두컴컴한 천지를 그리고 모든 눈송이를 비추었다. 그건 깃털 같은 눈송이의 가장자리까지 똑똑히 보이도록 해줄 만큼 강렬하게 밝은 빛이었다.

범한은 검 공격 이후 황제에게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러자 동이성 검려에서 전수 받은 사고검 검법이 드디어 체내 두 개의 정기와 경공술의 보호 아래 범한과 완벽하게 융합해 제대로 된 경지에 이른 거였다. 그래서 이번 일검(一劍)은 과거 동이성 성주부에서 그림자가 사고검을 찌를 때와 같은 빛이 번뜩인 거였다.

* * *

‘칵!’하는 듣기 싫은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허공에 있던 범한이 갑자기 땅바닥으로 참담하게 떨어지는가 싶더니 횡으로 몸을 튼 후 무겁게 눈밭 위로 떨어졌다. 그런데 이때 아까 범한이 발길질로 만들어낸 눈 연꽃은 아직 공중에서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범한이 몸을 날렸다가 땅바닥으로 떨어지기까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움직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범한이 멋지게 날아올라 원하는 데로 검을 휘두른 거였다. 이는 맹렬하면서도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물러나는 건 더 빨랐던 거다. 그야말로 낭패가 되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말이다.

한편 황제는 허공에 곧게 뻗었던 주먹을 천천히 거두었다. 안정적이면서도 패도한 기운이 한껏 실린 주먹이었다. 황제가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고 눈밭 위로 떨어진 범한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범한이 검 공격을 펼치자 황제는 그것을 피하려 했다. 이에 이번 주먹은 충분히 세지 않았다. 물론 조금 전 주먹 공격은 상대를 직접 강타한 건 아니어서 범한이 죽을 리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범한은 죽이려 해도 죽지 않는 바퀴벌레처럼 기어코 힘겹게 기며 눈밭에서 일어났다. 그의 입가에는 추위로 응고된 핏자국이 있었다. 범한이 아무런 감정도 동요도 없는 황제의 눈동자를 냉랭하게 주시하다가 피를 왈칵 토했다.

세상의 모든 만능법(萬能法)은 그러니까 속도, 기술, 이동을 막론한 모든 무공의 외연은 모두 모두 정기를 기반으로 한 기초 위에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정기의 양이 부족해졌는데 어떻게 여전히 번개처럼 빨리 움직일 수 있는 거며, 또한 어떻게 천지간의 오묘함이 담긴 기술과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

정기는 무학의 기본이지만, 범한은 그 자체가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였다. 그는 체내에 남들과 다른 경맥을 갖고 있었고, 수련법도 독특해 정기 역시 남달리 대단히 웅장하고 패기가 넘쳤다.

그런데…… 황제는 평범함과 훨씬 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체내 경맥이 범한처럼 넓고 특수하지 않았다. 대신 몸 안에 경맥이란 게 없어 몸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기를 운기시키는 통로였다! 그러므로 황제가 수련한 패도 공결은 더 강하고 사나웠으며, 정기를 폭발시키면 자연스럽게 왕도(王道)의 정기가 되는 거였다.

그렇다면 경국 황제는 기능이 향상된 범한인 거였다. 즉, 범한이 작은 괴물이라면, 황제 폐하는 커다란 괴물이었다. 그런데도 범한이 절정에 달한 정기의 양과 자신의 실력으로 황제 폐하와 정면으로 맞섰으니, 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지극히 용감한 행동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황당한 선택이었다.

예전에도 언급했지만, 지금 이 대륙서 개인의 무공 실력과 권세를 놓고 따져봤을 때 범한은 최강자에 속하는 몇 명 중 하나였다. 아니, 실제로는 그는 이미 천하 제2인자가 되었으며, 이 점은 범한도 인정한 바였다.

그런데 오늘 범한은 천하제일의 강자와, 그것도 하늘 아래 땅 위에서 가장 강한 사람과 맞서고 있는 거였다!

* * *

범한의 차분한 눈동자에는 좌절감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눈보라 너머에서 점점 다가오고 있는 황제 폐하를 주시하고 있었다. 범한은 황제 폐하가 다가올수록 그 괴상한 법문에 기댄 몸놀림으로 우세를 점하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선혈이 입가에서 흘러내려 옷자락을 적셨다. 그리고 살을 에는 듯한 이 궁의 분위기 때문에 피는 금세 성에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검은 눈동자가 살짝 수축되더니, 범한이 북위 천자의 검을 거꾸로 쥐고 팔목 앞에 횡으로 놓고는 잔뜩 경계했다. 그리고 팔목에 묶어 둔 천으로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닦은 후 혀로 다시 입술을 쓱쓱 핥고는 갈라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기분 좋은데.”

그렇다. 범한은 어려서부터 감찰원의 돌봄을 받으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감찰원을 맡기 위해 준비했으며, 이에 뼛속부터 피부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찰원의 음험하고 어두운 숨결에 물들어 있었다. 또한 범한은 이번 생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풍파를 겪고 강한 적을 만났으며 그때마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약화시킬 방법을 찾아냈다. 심지어는 떳떳하지 못한 비열한 수단까지 동원해 최후의 승리를 거머쥘 방법을 모색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직접 손에 검을 쥐고 강대한 적과 피 끓는 전투를 치러본 적은 없었다.

범한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황제를 바라보며 천지간에 가득 찬 위압감이 시시각각 자신을 압박해 오는 걸 느꼈다. 범한의 말갛고 수려한 얼굴에 결연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이 긴장된 순간에 그는 3년 전 북쪽 원시 산림 절벽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연소을이 장궁을 들고 자신을 향해 냉혹하게 다가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범한은 초원에서 용감하게 벌떡 일어난 것처럼 오늘도 용감하게 일어났다. 그런 후 눈보라 속 황제 폐하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눈보라가 얼굴을 덮치는 가운데 범한이 오른팔을 휘두르고 양발을 눈밭 위에서 굴렀다. 그리고 눈을 밟고 잽싸게 뛰어오른 사향고양이처럼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 * *

도망간 건가? 황제는 아들이 회색의 그림자로 변해 눈보라의 기세를 타고 황폐한 정원과 황궁 담벼락을 지나 황궁 정남쪽으로 재빨리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황제가 이맛살을 아주 살짝 찌푸리며 입가에 복잡한 심경이 담긴 냉소를 지었다. 그런 후 용포 소맷자락을 툭 떨 듯 흔들고는 밝은 황색의 모호한 형체가 되어 순식간에 범한을 따라 사라졌다.

이 차가운 황궁 허공에서 범한은 양손을 아래로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눈보라의 기세를 따라 빠르게 날았다. 그리고 그렇게 황궁의 처마 위에서, 담벼락 위에서 회색의 그림자로 변해버렸다.

황폐한 궁 정원에서 조금 전까지 목숨 걸고 싸우는 어린 사자인 양 행동해 놓고 결국 몸을 돌려 도망간 거였다. 범한은 황제 폐하 곁에서 도망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눈보라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굴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황제 아버지는 대종사이고, 큰 괴물이니,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싸워 이길 수 없는 놈에게서 도망치는 건 정상적인 반응인 거다. 그리고 분명 싸워서 이기지 못할 걸 알고 있는데도 굳이 남아 목숨 걸고 싸우는 건 바보짓이다.

범한은 옷을 통해 눈보라의 미묘한 흐름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범한은 미묘한 자세로 날고 있었다. 마치 추위에 강한 새가 공중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시시각각 바꾸며 자유 비행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비행하고 있음에도 속도를 줄일 기미는 전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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