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8화 창산의 눈, 검에 낀 성에 (1)
공격을 시작했으니 이제는 물러날 수 없었다. 이에 범한의 두 눈은 갈수록 반짝였고, 머릿속에는 잡념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범한에게 남은 거라고는 한껏 왕성해진 투지와 내몰려 절정으로 치달은 상태뿐이었다. 그리고 북위 천자의 검까지 손에 쥐자 천하에 한번 쳐들어가 보자는 웅지(雄志)와 야망이 생겨 버렸다. 물론 지금 이 순간 범한에게는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대종사 황제가 바로 천하였다.
깃털을 닮은 커다란 눈송이가 싸늘한 궁 안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살짝 어두컴컴한 곳에서 검의 빛이 네 차례 번쩍이더니, 공중에 명확한 형태를 알 수 없는 괴이한 흔적, 네 개가 나타났다. 모든 흔적에는 항상 무시무시한 검의 빛이 있었다. 그런데 검이 네 번 지나가는 동안 어느 게 먼저 나타난 것이고, 어느 게 나중에 나타난 것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다.
네 차례 나타난 검의 빛은 각각 다른 살의(殺意)를 담고 있었지만 검의 기세만큼은 마음껏 방출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또 천지간 눈보라와 한데 얽혀서 제 흔적을 지워 미묘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건 순식간에 일어났다. 일단 범한이 순식간에 황제 앞까지 날아온 거였다. 그런 후 오른팔 소매에서 훅훅, 하는 소리를 내며 옷 밑에 있는 모든 근육의 힘을 맹렬히 폭발시켜 전광석화처럼 검을 찔렀다 거두기를 네 번 반복한 거였다.
네 번의 검의(劍意)가 하늘과 땅도 모르게 다가와 하늘에서 날리는 눈송이들을 네 번 꿰뚫었다. 그런 후 황제 폐하의 머리카락 근처, 옷소매 옆, 신발 앞, 용포 바깥쪽……이렇게 네 곳의 허공을 찔렀다.
검이 순식간에 허공 네 곳을 찌른 거였다. 특히나 마지막 공격은 황제 폐하의 하복부로부터 고작 한 치 떨어진 곳까지 들어갔다. 그런데 그 남은 한 치는 무려 만 개의 강물과 천 개의 산을 건너고 지나는 것과 맞먹는 거리였다. 이에 한 치 앞에서 검은 기세가 다 해 말라붙은 폭포가 되어 더는 흘러넘치지도 다가서지도 못했다.
눈밭 위에 서 있는 황제 폐하가 넓은 소매를 살짝 펄럭였다. 겨울날 어두컴컴하고 추운 황궁을 밝힌 네 차례의 검 공격을 향해 황제가 지극히 자연스럽고 멋스럽게 춤을 추듯 그리고 대충 넘기듯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오묘함이 극에 달해 있던 이 동작은 범한이 오랫동안 힘을 축적해 전광석화처럼 펼친 네 차례의 검 공격을 그대로 떨쳐버렸다.
* * *
오로지 전진만 하는 사고검(四顧劍) 검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범한은 순식간에 검을 네 차례나 휘둘렀다. 더욱이 그 안에는 천일도와 천지의 기운까지 들어 있었다. 그래야 눈보라의 엄호도 받고 또한 내리는 눈의 세에도 기대어 전광석화처럼, 그리고 부드럽게 날리는 눈처럼 경국 황제의 몸으로 공격해 들어갈 수 있어서였다. 또한 그렇게 해야 황제를 압박해 그가 초반에 우레와 같은 반격을 펼칠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어서였다.
이 네 차례의 검 공격에는 동이성 검려의 냉혈하고 맹렬한 검의(劍義)보다는 친근한 기세가 들어 있었다. 그렇기에 범한은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얻은 거였다. 하지만 천일도의 정묘(精妙)한 기세를 심후하게 담았음에도 네 차례의 검 공격은 황제에게 상처조차 입히지 못했다. 심지어는 상대방을 뒤로 한 발짝 물러서게 만들지도 못했다. 상대방은 조금 전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안정적이고 냉정하게 제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대종사의 경지이니 확실히 평범한 사람이 건드릴 수 있는 수준은 아닌 거였다. 그러니 천지의 세를 빌려 순식간에 곧장 앞으로 다가가 네 차례 검 공격을 펼쳤음에도 황제 폐하는 뜻밖에도 가볍게 물리쳐 버린 거였다.
북위 천자 검의 끝부분이 밝은 황색의 용포 앞에서 쉼 없이 우우, 하고 울었다. 절망감과 패배감에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온 힘을 다해 발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에 검신 위로 내리고 있던 눈송이가 여기저기 흩어지기 시작했다.
손에 들려 있는 검과 달리 범한은 실망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차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짝이던 눈은 어느새 빛을 거둬들인 터였고, 죽음과도 같은 적막감이 감도는 검은 눈동자에는 오로지 살의만 담겨 있었다.
범한의 양 눈은 거대한 푸른 나무를 자른 살기충천한 사고검의 눈을 닮아 있었다. 그래서 오로지 냉담함만 있을 뿐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범한의 손에 있는 검은 지금 이 순간 사물(死物)이 되어 성인(聖人)이 아닌 자는 써서는 안 되는 흉기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죽음처럼 다가온 추위로 인해 검 위에서 사방으로 흩어지던 눈송이는 순식간에 서리로, 그것도 거울 같은 얇은 막의 성에가 되어 있었다.
오른쪽 어깨를 덮고 있던 옷이 갑자기 찢어지면서 순식간에 파박, 하는 소리가 짧게 연달아 났다. 범한의 체내에 있는 두 개의 길이 빠르게 운행하면서 기운이 서로 충돌하고 발버둥 쳐 어깨에 있는 혈관(血關)을 뚫고 양명맥(陽明脈)을 거쳐 곧바로 팔꿈치로, 다시 손목을 거쳐 다시 검자루가 있는 곳까지 이동해서였다.
범한이 오른팔을 내던져 버리듯 맹렬하게 뻗어 대벽관의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 같은 검세가 다시 살길을 찾은 거였다. 그러자 검도 순식간에 한 자 정도 더 나아가 곧바로 경국 황제의 용포를 향해 나아갔다!
그야말로 진정한 일검(一劍)이었다. 사고검이 임종 직전에 범한에게 알려준 모든 감정을 끊어 낸 오로지 전진만 하는 바로 그 검이었다. 일고 하면 성을 무너뜨리고, 이고 하면 나라를 무너뜨리고, 삼고 하면 사람의 마음이 무너뜨리고, 사고 하면 천하 온 계책을 돌아봐 천하를 위하는 게 아니어도 군왕을 시해할 수 있는 바로 그 검이었다!
싸늘한 궁 안에 눈보라가 휘날리는 가운데 북위 천자의 검은 지극히 차가운 눈[雪]의 검이 되어 결연한 자세로, 퇴로를 마련하지도, 돌아갈 여지도 남기지 않은 채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갔다.
* * *
끔찍한 마찰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 들리다 만 소리였지만, 범한의 귀에는 마치 수년간 울리다가 이제야 멎은 소리처럼 들렸다.
관리가 잘 된 백옥을 닮은 새싹 같은 손가락 두 개가 북위 천자의 검을 냉혹하지만 안정적으로 잡고 있었다. 마찰음은 손가락 두 개와 그 사이에 있는 검신이 만들어낸 소리였다. 이에 검신 위에 낀 성에 절반은 손가락 사이에서 사라져버렸고, 이에 손가락 사이에 있는 검신에서는 엷게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황제 폐하는 대종사이기는 해도 범한의 이번 검 공격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검이 너무나도 냉담하게 그리고 과할 정도로 사납게 피를 갈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전체 검신 길이의 무려 절반이나 되는 거리를 이동하면서까지 말이다.
이에 황제는 결국에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몸과 북위 천자 검의 끝부분은 여전히 한 치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범한은 이번에도 이 한 치를 돌파해 황제 폐하의 용포에 닿는 데 실패한 거였다.
황제는 수염 근처에 와 있는 아들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턱수염에 성에가 끼어 있어 그는 유난히 무서워 보였다.
북위 천자의 검을 잡고 있는 손가락 관절이 살짝 창백해졌다. 그리고 이어 지극히 성대한, 그것도 천 개의 호수, 천 개의 강(江), 천 개의 하(河: 중국에서는 강을 이를 때 북쪽 지역에서는 하, 남쪽 지역에서는 강이라고 부른다.)에 달하는 웅장한 패도 정기가 두 손가락 사이에서 쏟아져 나왔다.
황제가 손가락 두 개를 살짝 비틀었다. 그러자 예리한 북위 천자의 검이 밀가루 반죽처럼 구부러졌다. 그런데 북위 천자의 검도 과거 황실의 보물이다 보니, 무시무시한 대종사의 억압에도 부러지지는 않았다.
범한은 황제 폐하와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한쪽 무릎은 굽힌 채 다른 한쪽 무릎은 바닥 쪽으로 내린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오른쪽 다리를 뒤쪽으로 조금 이동시켜 몸을 낮추고 있었는데 지극히 완벽하게 자세를 잡아 공격당할 만한 허점은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의 손안에 있는 북위 천자의 검은 결국에는 사고검은 아니었다. 또한 범한의 신체 일부도 아닌 그저 범한의 몸과 이어져 있는 것이었다. 이에 범한은 원래는 멋지게 큰 대(大)자 모양의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했지만 갑자기 쓸모없는 획들이 추가되고 말았다.
북위 천자의 검으로부터 광폭한 정기가 큰 강물처럼 흘러넘치자 범한의 손아귀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범한은 검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은 심지(心志)를 겨루고 다시 의지를 겨루는 상태로 적에게 세를 빼앗겨서는 안 되어서였다. 이에 범한의 눈에 담긴 냉담함은 갈수록 짙어졌고, 체내 정기는 거칠게 분출되었다.
범한은 용감하게도 검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손가락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한스럽게 굽어 있던 북위 천자의 검이 번개가 번쩍하듯 튕겼다. 그리고 채찍이 회전하듯 찌를 듯한 기세로 범한의 얼굴로 향했다. 이에 범한의 동공에도 반짝이는 검의 빛이 똑똑히 들어왔다.
검이 튕겨 나가자 검에 절반 정도 남아 있던 성에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검신 위에서 폭발해 무수히 많은 얼음 가루가 되면서 황제와 범한을 갈라놓았다.
범한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리고 서둘러 손아귀에 힘을 빼고 전광석화처럼 손목을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어 검자루를 반대로 잡았다. 그사이 발로는 눈밭 위에서 여덟 걸음 비틀거리다 뒷발로 황금 처마를 찬 후 고개를 들면서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고개를 드는 순간 앞서 생각해 두었던 완벽하고 사나운 방어 동작은 아까 깨진 눈 때문에 흐트러져 엉망이 되고 말았다.
한편 황제 폐하는 바람처럼 ‘휘익-’ 하는 소리를 내며 곧장 범한을 덮쳤다. 그리고 전혀 특이한 것 없어 보이는 평범하고 간단한 동작으로 범한의 가슴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 * *
으윽,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가볍게 내리친 것 같지만 실은 강력한 주먹에 범한이 하늘에서 내리고 있는 눈송이처럼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가 처량하고 무력하게 이런저런 모양으로 공중에서 일고여덟 차례 빙글빙글 돌며 황폐한 눈밭 위를 수십 장가량 날았다. 그리고 결국에는 멀리 떨어진 눈밭에서 처참하게 떨어져 쳐버렸다.
눈이 크게 일고, 죽은 풀 수십 뿌리가 짓이겨졌다. 그리고 범한은 가슴을 움켜쥐고 피를 토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독하게 서서 저 멀리 있는 황제 폐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그 누구도 공중에서 무언가의 도움을 받아 수십 장을 날아갈 수는 없다. 물론 황제 폐하의 왕도의 살권(殺拳)을 맞은 것이기는 했다. 하지만 저항할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 이 강력한 힘도 사람 하나를 수십 장 날아가도록 만들 수는 없는 거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은 중량이 있기 때문에 정말로 눈송이처럼 가벼워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전에 대동산에서 사고검이 경국 황제의 주먹에 날아 날아가기는 했지만, 그때 그는 대동산 경묘에 있는 바위처럼 굴러 처참하기 짝이 없게 그 종과 부딪혔다.
그러니 그 누구도 조금 전 범한처럼 공중에서 멀리, 그것도 정말 눈송이처럼 날 수는 없다.
경국 황제가 손에 쥐고 있는 관원(官員)용 장화를 냉랭하게 쓱 바라보았다. 그러다 장화 발끝에 뾰족하게 나와 차가운 빛을 내는 것 때문에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범한이 주먹으로 가슴을 맞고 날아오를 때였다. 뜻밖에도 범한이 목숨으로 목숨을 맞바꿀 작정으로 옷 밑에서 한쪽 발을 찬 거였다. 그리고 장화 끝에 나와 있던 금속 물체에는 당연히 독이 발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