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7화 평민, 단검, 그리고 조천자(朝天子) (10)
황제가 드디어 껄껄껄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후 두 사람은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한담을 나누었다. 부자 사이면서 군신 관계에 있는 이 둘은 사실은 대단히 비슷한 사람들이었고, 뼛속까지 냉혈한이었다. 물론 천하, 과거 및 현재, 그리고 모든 일에 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것들은 몇 년 동안 두 사람이 서로 신뢰하고, 경외하고, 인간 세상에서 굳건히 정점을 차지하는 데 있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작은 전각에서는 밤새도록 눈보라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저녁 식사는 최후의 만찬이자 최후의 긴 대화였다.
밤이 깊었다. 등불이 비추는 가운데 어느새 두 사람은 각자 긴 의자에 나누어 앉아 명상하고 휴식을 취했다. 그들 몸에서 흘러넘치고 있는 정기는 조화로웠다. 너무 패도한 나머지 서로 모든 힘을 부수어 버리고 한데 모여 융화를 이룬 거였다.
어느새 날이 밝고 아침 해가 떠올랐다. 밖에 내리던 눈도, 바람도 멎었다. 양탄자를 깐 듯 땅 위에 두툼하게 쌓인 눈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청명한 빛을 반사시켜 황궁 서쪽 모퉁이에 자리 잡은 황폐한 정원을 유난히 밝게 비추었다.
잠에서 깨어난 범한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탁자 위에 있는 북위 천자의 검을 오른손으로 집어 들고 작은 전각문 앞으로 걸어갔다. 범한이 몸을 돌려 의자에 있는 황제 폐하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황제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유난히 맑고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고 냉담해 더는 범인(凡人)의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할 말은 모두 했으니, 이제 두 사람 사이에는 더는 혈육의 정 때문에 주저할 건 없었다.
범한이 오른팔을 들었다. 오른쪽 어깨 상단부터 팔꿈치, 팔목을 지나 오른손에 차분히 들려 있는 검자루까지, 범한은 전혀 흔들림이 없는 무섭도록 안정적인 자세로 황제의 얼굴을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검은 아직 검집 안에 있었지만 벌써부터 음음웅웅, 하는 소리를 내며 용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마치 진원에서 울리던 악기 연주 소리 같기도 했다. 낮고 힘 있는 패도의 정기가 범한의 손아귀를 따라 검신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검이 살아나기라도 한 듯 육안으로도 명확히 보이게 검집 안으로 빛이 퍼져 들어갔다.
웅웅웅……. 검신이 검집 안에서 사력을 다해 발버둥쳤다. 마치 검집을 깨고 나오려는데 그게 여의치 않자 누가 들어도 끔찍할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정작 범한은 검에 얼마나 많은 정기를 주입했기에 이런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한편 황제는 동공이 살짝 축소했다. 그는 양손으로 의자를 짚기는 했어도 아직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 순간, 대종사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알게 된 거였다.
추운 겨울날인데도 범한의 눈썹꼬리 부분에서 땀이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의 말간 얼굴에는 진중하고 결연한 기색이 확연했다. 경국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를 축적한 지 오래된 범한은 계속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손에 쥔 검이 이제 곧 통제를 넘어서려 하고 있어서였다.
* * *
‘퍽!’ 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범한의 오른발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며 문지방 위를 무겁게 밟아서였다. 이어 범한의 오른손이 하늘을 태워버릴 듯한 기세로 앞으로 나아갔다. 범한이 드디어 폭발한 거였다.
검집 틈으로 보인 흰 빛이 갑자기 사라졌다. 작은 전각에서는 순식간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검집 안에서는 분노를 견디지 못한 천자의 검이 몸부림치고 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자의 검은 기이하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화살처럼 천자의 얼굴로 향하고 있었다!
범한의 첫 번째 검 공격은 검집을 씌운 채로 이루어졌다.
검집이 범한의 이레 동안의 고심, 밤새 나눈 긴 대화, 낮고 힘 있는 패도의 정기를 모두 싣고 순식간에 튀어 나갔다. 엄청난 속도였고 마치 연소을이 쏜 화살 같았다. 가볍게 공기를 가르고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순식간에, 그야말로 눈 깜짝 하는 사이 황제의 눈앞으로 갔다.
그런데 이때 공중에 손 하나가 더 나타났다. 그건 대단히 안정적인 손이었고, 일찍이 대동산에서 바람을 놀라게 하고 비를 가른 손이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붉은 먹물이 묻은 붓을 쥐고 있느라 중지 쪽에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다.
이 손이 마치 달그림자 속에서 반딧불을 잡듯, 만 개 천 개의 눈송이 속에서 먼지를 잡듯 검집을 잡았다. 정말 빨라 빛도 그림자도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형태가 있는 검집을 못 잡을 리 없는 거였다.
작은 전각 내 고요함이 잠시 깨져버렸다. 검집에서 웅웅, 하는 소리가 다시 난 거였다. 하지만 이 소리는 금세 툭 멈추어 버렸다.
범한이 오랫동안 세를 축적해 놓았던 검집이 거대한 용처럼 튀어 나갔지만 다른 사람에게 목이 잡혀 순간 숨을 쉴 수 없던 거였다. 그러다 이내 무력하게 고개를 툭 떨구고는 숨이 간들간들한 채 황제 폐하의 손아귀 안에서 뻗어 버렸다.
황제 폐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표정은 유난히 차분했다. 하지만 오늘 본 범한의 경지가 자신의 판단을 상회하고 있다는 건 인정 해야만 했다. 하늘에서 비룡처럼 날아온 검이 뜻밖에도 공간을 뛰어넘어 나타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작은 전각으로 들어오는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싸늘하게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그가 앉아 있던 의자는 어느새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 * *
범한이 전신의 공력을 검집에 넣은 건 그야말로 도박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작은 전각 주변에 관중이 없기는 해도 이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 버렸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몸이 더 빠른 속도로 몸을 띄워 날아오른 거였다.
범한은 거대한 새처럼 날아올랐다. 아니, 새보다 더 가볍게 더 빨리 날아올랐다. 그런 후 광풍을 탄 눈보라처럼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속도로 순식간에 작은 전각문 앞에서 15장 떨어진 거리까지 날아갔다.
바로 이때 하늘에서는 다시 눈송이가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날아가는 동안 범한은 숨을 거의 멈추고 있었다. 고하가 죽기 직전에 남겨준 그 공결에만 의지해 공기 속에서 사방의 한기를 느끼며 세를 따라 흐르듯 날았다.
날아가는 동안 범한은 계산을 해보았다. 황제의 의자에서부터 작은 전각 밖까지 4장 떨어져 있으니, 황제가 자신의 검 공격을 막으려 한다면 분명 그리 빨리 나오지는 못할 거라고 말이다.
사대종사는 이미 범속을 뛰어넘은 성인이었다. 하지만 신선의 경지에 도달한 건 아니어서, 모두 나름의 약점과 강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고하 대사의 최대 약점은 늙은 육신이었다. 한편 섭류운(葉流雲)의 최대 강점은 흘러가는 구름 같은 몸놀림이었다. 이에 지금 이 순간 작은 전각 안에 있는 대종사가 섭류운이라면 범한은 전각 안에 상대방을 남겨 두겠다는 헛된 생각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전각 안에 있는 황제 폐하는 현재 최고의 고수였으며, 정기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정기를 이용해 움직인다 해도 육신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작은 공간 안에서 이동하고 피하려면 귀신과도 같은 기술을 지녀야 했다. 바로 예전에 섭류운이 하늘 가득 빗발치는 쇠뇌의 화살과 직면했을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짧은 시간 안에 작은 전각에서 억지로 빠져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다른 건 신경 쓸 새 없이 곧바로 다음 공격이 들이닥쳐서였다.
양발이 눈밭에서 두 자 정도 미끄러져 길게 두 개의 눈구덩이가 생겨났다. 그런데 범한의 몸이 눈밭으로 떨어지는 순간 검의 빛이 번뜩이며 얼굴 앞에 횡으로 놓였다. 그때 범한은 무릎을 살짝 굽힌 채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차가운 검의 빛이 범한의 수려하고 맑은 얼굴 위에서 반짝일 때였다. 갑자기 큰 불길이 일더니 순식간에 온 전각을 삼켜버리고, 눈 내리는 싸늘한 궁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몇 차례 낮게 깔린 소리가 나더니 무수히 많은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면서 작은 전각을 포위해 버렸다. 그리고 붉게 타오르는 빛이 순식간에 범한 앞을 가로질러 날며 그의 차가운 검을 따스한 붉은 색으로 물들였다.
이렇게나 큰불이 순식간에 이는 건 자연 발화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작은 전각에 범한이 무슨 장치를 해놨을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런데 범한은 좀 실망했다. 불바다 속에서 인기척이 지나가더니 사람 형체 하나가, 그것도 불바다 앞에서 빛을 발하며 서 있어서였다. 사람 형체는 불바다를 등지고 눈밭 위에 서서 범한을 싸늘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황제가 걸치고 있던 용포는 군데군데 까맣게 타 있었다. 황제의 머리카락은 불에 타 흐트러져 있었고, 그의 낯빛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에서 제가 제일 잘 났다는 듯한 모습으로 범한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3처 화약을 황궁에 들여다 놨었구나.”
황제가 실눈을 뜨고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이 활짝 웃으며 검자루를 꽉 움켜쥐며 대꾸했다.
“3년 전 경도에서 반란이 일어 제가 감국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하여 황궁으로 화약을 옮겨다 놓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요.”
황제가 천천히 범한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싸늘하게 말했다.
“이제 보니, 오늘을 위해 네가 준비를…… 무려 3년이나 한 거였구나!”
범한이 황제처럼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화염이 강렬해 보는 데 지장이 있어서였다. 범한이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 말했다.
“저는 단지 이 전각에 어머니의 초상을 두면 그분께서 분명 노할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하여 그럴 바에는 불태워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만약 어제 황제가 작은 전각에서 범한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황제가 곧바로 공격했더라면, 또 그리고 범한과 이 작은 전각에서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범한은 화약을 터뜨릴 수 있는 발화 장치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범한은 문지방을 밟는 순간 확신했다. 황제 아버지가 이 작은 전각을 전쟁을 끝낼 마지막 장소로 선택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이 작은 전각 안에는 섭경미의 초상이 있어서였다. 황제는 이 여인의 초상 앞에서 자신과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은원과 정을 철저하게 끊으려 할 게 분명했다.
범한이 이렇게 확신한 건, 그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경국 황제 폐하의 머릿속을 꽉 쥐고 있어서였다. 그는 황제 폐하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황제는 차갑고 무정한 사람이지만, 스스로는 자신이 어질고 후덕하고 정 많은 사람이라는 위선적인 생각에 싸여 있었다. 물론 범한 역시 위선적인 사람이었다. 즉 이들 부자를 단순하게 표현해 보자면 겉과 속이 다른 좋은 사람인 척하는 연기자. 딱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불이 난 순간 범한은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 그가 3년 전 묻어 둔 화약을 자신의 최대 무기로 선택한 건 어서방에서 진평평이 바퀴 달린 의자로 한 행동 때문에 확신이 생겨서였다. 사방팔방에서 절대 피할 수 없게 급습하면 아무리 대종사라 할지라도 순간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퀴 달린 의자에 달려 있던 총이 쇠 구슬을 발사해 그러한 위력을 발휘했다면, 사방에서 몰아치는 불길도 분명 같은 효력을 발휘할 거라고 판단한 거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황제는 눈밭 위에 여전히 멀쩡히 서 있었다. 아까보다 얼굴색이 조금 창백한 것으로 보아, 불바다 속에서 도망쳐 나올 때 분명 원기를 크게 소모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을 덮은 큰불도 그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불이 너무 느리구나.”
황제가 범한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아무 감정 없이 말했다.
“검이나 써야겠습니다.”
범한이 북위 천자의 검을 쥐고는 이가 훤히 드러나게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