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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36화 (1,036/1,108)

1036화 평민, 단검, 그리고 조천자(朝天子) (9)

범한이 앞으로 나가 누이의 마른 어깨를 살포시 감쌌다. 그리고 누이를 잠시 품에 안고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후 더 얌전히 있거라. 아버님 어머님께도 더 많이 효도하고.”

이 말을 하는 동안 범한은 시간이 거슬러 올라간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 빙설 같은 여인이 마치 아주 오래전 담주에서 만난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어린 여자애처럼 느껴졌다.

범약약이 “응.”하고 대답하고는 물러났다. 그녀는 황제 폐하께서 오늘 왜 자신을 풀어준 건지 알고 있었다. 분명 오라버니와 황제 폐하 사이에 모종의 협의를 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범약약은 그 누구보다 오라버니의 가르침과 계획을 믿고 따르던 터였다. 이에 그녀는 아예 질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차분하고 조용히 범한이 시키는 대로 했다.

작은 전각 내부가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요 태감이 난처한 기색으로 아뢰어 그 고요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3 황자 마마가 왔습니다. 지금 전각 밖에 있는데 소인으로서는 막을 수 없었사옵니다.”

황제와 범한이 동시에 깜짝 놀랐다. 3 황자가 지금 이 시각에 그것도 여기까지 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수방궁에서도 이 소년을 막지 않았다니, 그건 더 의외였다.

3 황자가 안으로 들어와 황제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후 다시 범한에게도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뜸 들이듯 입을 열었다.

“부황을 뵈옵니다. 스승님을 뵈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3 황자는 이 말을 끝으로 곧장 몸을 돌려 돌아갔다. 뜻밖에도 버르장머리 없이 황제와 범한 두 사람만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어 놓고 떠나 버렸다. 물론 두 사람은 조금 전 셋째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이 아이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것도 보았다. 전각 밖에서 이미 한 차례 운 것 같았다.

황제가 텅 빈 땅바닥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껏 복잡한 표정으로 웃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약간의 담담한 상실감과 어떻게 해도 감출 수 없는 약간의 기쁜 마음이 들어 있었다. 오늘 이승평이 여기까지 온 건 당연히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범한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보여준 정감과 기백은 황제가 갖추어야 할 성정에 부합하는 거였다.

“괜찮지 않습니까?”

범한이 물었다.

“잘 가르쳤구나. 이 역시 짐이 너를 좋아했던 점 중 하나란다. 네가 그들에게 어떻게 잘 대해주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하나 조정 대신이든, 네 부하든, 심지어는 짐의 아들들까지도 모두 네 곁에 서기를 바라는 것 같구나.”

황제가 말했다.

그러자 범한이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다가 대답했다.

“그건 아마도 제가 그들을 평등하게 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 태감이 작은 전각 안으로 들어와 3차 보고를 했다.

“궁 밖에서 누군가가 작은 범 대인에게 필요한 문서와…… 검 한 자루를 보내왔사옵니다.”

북위 천자의 검이 차분하게 범한 앞에 있는 탁자에 놓였다. 그리고 문서는 감찰원의 옛 부서에서 오늘 쓴 하종위파의 죄상으로 훗날 황제가 조칙을 내릴 때 참고할 자료였다.

요 태감이 황제 앞에 서서 오늘 궁 밖의 동정에 대해 차분히 아뢰었다. 궁정에서는 경도에 적지 않은 밀정을 깔아 둔 상태였다. 하지만 오늘 경도에서 인 풍파로 어떤 소란이 발생할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궁 밖에서는 도찰원의 어사들이 눈밭에 꿇어앉아 계속 곡소리를 내며 황제 폐하께 범한이란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을 엄벌하라고 요구하는 중이었다. 범한은 살인광에 악귀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가 오늘 경도에서 죽인 건 하종위파 내 중견 인사들뿐이라 케케묵은 생각을 지닌 어사 대부들은 아직 멀쩡히 잘 살아 있던 거였다.

어사 대부 외에도 경도의 각 부와 사(寺)에 있는 문관들 역시 암암리에 소통을 시작해 황궁에 압력을 행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는 모두 조정 내 각 체계가 오늘 일어난 도륙 때문에 깜짝 놀라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낀 탓이었다. 이에 이들도 어떻게든 들고 일어나려 한 것이었다.

범한이 문하 중서에서 황궁으로 들어가자 조정 대신들은 일단 황성 밖에서 황제 폐하의 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하루가 거의 다 끝나고 밤으로 접어들었는데도 황궁 안에서 아무런 조짐이 보이지 않자 대신들은 분노와 두려움에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범한이 저지른 살육으로 이렇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건만, 황제 폐하께서는 여전히 부자간의 의를 생각해 처벌할 생각이 없으시단 말인가?!’

이렇게 황궁 안은 조용했고 대신들은 걱정이나 하고 있었다. 이에 어사 대부들이 다시 황성 앞에 모여 머리를 조아린 거였다.

비바람이 불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의 압박하는 힘이 어마어마하면 산도 넘어가고, 호숫물에서도 파도가 일기 마련인 것을.

* * *

요 태감의 보고 때문에 작은 전각 안의 분위기가 바뀌지는 않았다. 황제든 범한이든 둘 다 조정의 압박은 안중에도 두지 않아서였다. 더욱이 오늘 밤이 지나면, 이들 부자 중 단 한 사람만 천하에 대고 무언가를 말해줄 수 있었다.

황제가 웃음을 짓고는 술잔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그런 후 하나 둘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화제를 꺼냈다.

“너는 지금 죽은 거나 마찬가진데, 살아 있다고 해서 수하로 있는 저 미치광이들을 단속할 수 있다는 것이냐? 그리 못할 터인데, 짐이 무엇 하러 그들에게 활로를 열어줘야 하는 것이냐?”

“폐하께서 필히 저를 가지고 이번 일을 하시면 그들을 단속하실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천하에 폐하께서 원치 않던 모습의 혼란이 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손가락으로 술잔을 살짝 굴리며 두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하면 짐이 너를 죽이고도 너에게 윤허한 걸 이행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런 걱정은 하지 않는 것이냐?”

그러자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잠시 아무 말 않고 있다가 차분하게 입을 뗐다.

“천자의 말은 사두마차도 따라잡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역주: 남아일언 중천금이란 말을 할 때 중국에서는 ‘중천금’에 해당하는 말을 ‘사두마차도 따라잡지 못한다’라고 표현한다.)

“사두마차라…… 말 한 필이 끄는 마차도 아니고.”

황제가 잠시 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네 필의 말이라니. 그 이상한 말은 네 어미도 예전에 쓴 적 있어 내 기억을 하고 있단다. 한데 너도 알고 있을 줄이야.”

황제가 탄식을 해고는 말을 이어 갔다.

“오늘 짐이 대면하고 있는 게 네가 아닌 너의 어미라면…… 그녀에게도 공평하게 싸울 자격을 줄 수는 없구나.”

그러자 범한이 비웃었다.

“과거에도 그분을 공평하게 대해주시지 않은 건 확실하니까요.”

황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냉랭하게 말했다.

“짐이 네 어미에게 그런 자격을 주지 않은 건 그녀가 절대 천하를 가지고 짐을 위협할 리 없어서였다. 왜냐하면 천하를 패로 삼으면, 천하 만민을 도박에 끌어들이는 거라 그녀는 내키지 않아 할 거거든…… 하나 짐은 그렇지 않다.”

“저는 기꺼이 천하 만민의 생사를 가지고 황제 폐하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짐이 네 어미에게 그런 자격을 주지 않은 건 그녀가 절대 천하를 가지고 짐을 위협할 리 없어서였다. 왜냐하면 천하를 패로 삼으면, 천하 만민을 도박에 끌어들이는 거라 그녀는 내키지 않아 할 거거든…… 하나 짐은 그렇지 않다.”

범한이 차분하게 대답하고는 말을 이어 갔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했던 다른 점입니다.”

그러자 황제가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하여 짐은 아직도 모르겠구나. 너는 이 나라를 사랑하고 만백성을 아끼는데 어찌 나라와 백성들을 가지고 짐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이냐?”

“왜냐하면 저는 제 곁에 있는 사람부터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를 대자면, 제가 원래 후안무치한데 죽는 건 겁내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하여 정말로 막다른 길에 몰리면, 당연히 그 막다른 길은 저만 위협으로 몰아넣은 게 아닐 터이니…… 저는 필요하다면 온 천하와 황제 폐하의 원대한 뜻도 같이 끌고 무덤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줄곧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데 그 사람이 결국에는 돌아오지 않아 달리 방법이 없기에, 하는 수 없이 제가 직접 목숨 걸고 나선 것이지요.”

‘목숨 걸고 나선 것’이라니. 그야말로 처참하고도 무력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런데 황제의 눈동자는 점점 반짝이기 시작했다. 범한이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 똑똑히 알고 있어서였다. 황제는 현 천하에서 자신의 생명과 통치력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해 전 태평 별원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던 후로는 줄곧 그 사람의 존재를 은근히 경계했다. 심지어는 신묘가 파견한 최후의 사자까지 범씨 가문 저택 옆으로 난 골목길로 보낸 터였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오죽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가 돌아오지 않았구나.”

황제가 눈동자에서 반짝이던 빛을 거둬들이며 느긋하게 말을 이어 갔다.

“3년이구나.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신묘로 가야만 했지. 한데 정말로 신묘로 돌아간 거라면 무엇 하러 다시 나오겠느냐?”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사실을 슬프게 받아들였다. 만약 오죽이 아직 이 대륙에 남아 있다면, 자신이 황제 앞에서 이리 수동적으로 행동하지도 심지어는 물불 안 가리는 식으로 위협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옛날에 신묘에게 어떻게 황제 폐하 뒤에 서도록 하신 것입니까?”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황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는 속에 품고 있던 몇 가지 큰 의문 중 하나였다.

“짐은 신묘에 가본 적은 없으나, 네 어미와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안 게 있었다. 신묘는 갈수록 황폐하고 쇠락해 가는 곳일 뿐이었지. 또한 신묘는 그동안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건 사실이었다.”

황제가 입가에 옅게 비웃음을 담고 말을 이어 갔다.

“그렇다 할지라도 신묘는 줄곧 이 대륙에 몰래 영향을 미쳐왔지. 한데 안타깝게도 짐은 인간 세상 사람이라 그들도 짐에게는 어찌하지 못했단다. 반면 네 어머니와 오죽은 신묘 사람이라…… 이런 차이점만으로도 충분한 거였다. 하여 자연스레 짐이 그 점을 이용한 거였다”

범한이 탄식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황제 아버지의 강대한 의지에 절로 감탄한 거였다. 세상 만인이 경배한 신묘가 황제 눈에는 고작 날카로운 칼날일 뿐이었다니.

“과거 북벌을 할 때 짐의 체내 경맥이 모두 산산조각이 났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고, 냄새도 맡을 수 없어 그저 산송장일 뿐이었어. 하나 영혼만큼은 그 산산조각이 난 껍데기 속에 숨어서 도망가지도 벗어나려 하지도 않았다.”

황제가 느닷없이 과거의 일에 대해 냉랭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한도 끝도 없는 암흑 속에서 홀로 고통을 견뎌내다가, 선명한 고통 때문에 결국 결심하기에 이르렀지.”

황제의 말을 따라 순간 전각 안에 있던 모든 등불이 어두워지면서 마치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어둠의 바다에 빠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 자신과 내가 느낄 수 있는 고독감을 빼면 진짜는 없는 것이었어.”

황제가 말을 이어 갔다.

“하여 짐은 나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은 믿지 않기로 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더는 가족이며 친구가 필요 없어진 거였다.”

“짐이 어둠 속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본 사람이 진평평과 영아(寧兒: 훗날 영 재인)였다.”

황제가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뜨고는 말을 이어 갔다.

“하여 그들은 짐이 가장 믿는 사람들이니, 네가 영아의 안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한데 진평평이 배반을 할 줄이야…… 그것도 짐을.”

황제가 눈을 더 가느다랗게 떴다. 그러자 눈동자에서 싸늘한 빛이 번득였다. 황제가 분노와 슬픔이 은근히 담긴 말투로 조소를 날렸다.

“짐이 사람 하나를 잘못 믿어 오늘 같은 일이 터진 거야.”

“너는 암흑 속에서 깨어나는 고통을 겪어 보지 않았으니, 짐이 한 말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게다.”

“저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범한은 고개만 가로로 내저을 뿐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건 아주 오래전 일로, 저쪽 세계에서 겪은 일을 의미하는 거였다.

“하오나 저는 폐하처럼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여 성격이 운명을 결정한 것이지요.”

범한이 갑자기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말을 이어 갔다.

“만약…… 이 세상에 섭경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폐하, 지금 경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더 멋진 곳이 되어 있었을까요?”

황제의 양 눈동자에서 점점 싸늘한 기운이 차올랐다. 이에 그가 범한을 주시하는 눈에 잠시 노기를 담았다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네 어미가 없었다면 현 경국이 어떤 모습이었을 지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말자꾸나. 네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 북위는 부패가 극에 달해 짐이 통치하는 대경국만 못했고, 또한 현 북제와 비교해도 십만 팔천 리는 뒤진다는 점이다. 그 당시 북위 조정은 부패하기는 했어도 여전히 거대한 곳이었다. 네 어미가 이 세상으로 와 그 거대한 산이 박살이 난 건데……. 한데 왜 북위의 유민은 이전 왕조를 그리워하지 않는 거지? 왜 짐이 세운 이 강산에서는 옛 고국을 그리며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꾀하는 사람이 없는 걸까?”

이에 범한이 웃으며 대꾸했다.

“생각하기 귀찮습니다. 양친 모두 대단한 분이시면, 저 같은 아들 입장에서는 그다지 멋진 일이 아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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