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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34화 (1,034/1,108)

1034화 평민, 단검, 그리고 조천자(朝天子) (7)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든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대의를 인생 준칙으로 삼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도덕을 지상(至上)으로 삼는 성인(聖人)도 아니지요. 저는 뼛속 깊이 여전히 자기애와 자기 존중만 있고 다른 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지요.”

“그건 제 뼛속에 숨어 있었고, 저에게 20여 년 동안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범한이 황제를 주시한 채 대단히 진지한 모습으로 말을 이어 갔다.

“저는 평생 마음껏 힘을 휘두르면서, 방자하게, 후회 없이 제 본성에 따라 살려 했습니다. 그것이 이치라 생각하고 삶에 만족하려 하였지요. 한데 그렇게 살면 제 뼛속 깊이 묻혀 있던 것들 때문에 저는 평생 이치를 따르며 산다는 만족감은 얻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휘황찬란한 권세를 쥐면 사람은 눈을 감고 귀를 닫습니다. 하오나 저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과 이번 가을에 발생한 일에 대해 아예 모른 척하고 못 들은 척할 수는 없었습니다.”

범한이 얼굴에 옅게 슬픔을 드리우며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진평평이 경도로 돌아온 건 황제 폐하께 한 가지를 묻기 위해서였으나, 저는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그 일들이 불공평하다는 점과 그 불공평한 일들이 저를 사랑해주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어났다는 사실만 알기 때문입니다. 하여 만약 세상에 제가 없다면, 또한 오늘 이렇게 용감하게 황제 폐하 앞에 와 있는 제가 없다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어떻게 공평함을 호소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이 세계 때문에 잊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받은 불공평함은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구제되어야 합니다.”

범한이 황제 폐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하여 그건 황제 폐하께서 책임지셔야 할 일이며, 저에게는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황제는 범한이 속마음을 털어놓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후 냉기가 쌩쌩 돌게 천천히 물었다.

“너는 왜 그때 짐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는 것이냐? 왜 짐에게는 묻지 않는 게냐? 설마 짐에게는 고충이 없는 줄 아느냐?”

“정왕부, 그러니까 과거 성왕부에 모친이 황제 폐하께 사적으로 남긴 상주문 류의 글들이 아직도 있었습니다.”

범한이 한동안 침묵한 후 말을 이어 갔다.

“하여 제가 무언가를 물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과거의 일이 어찌하여 발생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또한 어머니의 죽음이 이 대륙에 그리고 억만의 백성에게 대체 잘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에 대해서는 저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말을 마친 범한이 잠시 웃었다. 그것도 살짝 곤란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 사실 그 일은 천하와는 상관없는 정의에 관한 문제입니다. 또한 공적인 원한과는 관련 없는 단순한…… 사적 원한이지요.”

“거참 대단한 사적 원한이구나.”

황제도 피식 웃고는 양손으로 뒷짐을 졌다. 고독하게 눈보라를 맞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이 적막해 보였다.

“그녀만 너의 모친이고, 설마 짐은 너의 부친이 아니란 게냐?”

범한의 몸이 살짝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차분하게 다음과 같이 말을 돌렸다.

“황제 폐하께서는 가슴에 원대한 위업을 품고 스스로 바르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고 계시지요. 하오나 제 생각으로는 아무리 위대하고 영광된 정확한 목표라 할지라도 비열한 수단을 동원한다면, 실은 존경받을 가치는 없는 겁니다.”

황제의 입가에서 살짝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황제가 두려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범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면 오늘 네가 경도 곳곳에서 살인하고 다닌 건 설마 대단히 정당한 수단을 쓴 것이냐”

범한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제 목표는 수십 년 전 사건을 끝내는 것뿐입니다. 제 머리에 평생 드리워져 있던 제일 큰 그림자를 없애버리는 것이지요. 모든 건 다 저 자신만을 놓고 생각한 겁니다. 하여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것은 사적인 원한이므로 애당초 위대하고 영광된 정확한 의미 따위는 없는 것이지요. 하면 기왕 이렇게 된 거 비열한 수단을 쓴다 한들 뭐가 대수겠습니까?”

범한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복잡한 눈빛으로, 그것도 살짝 개탄스럽고 또 살짝 감탄하는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이 방면에서 저는 황제 폐하를 더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황제 폐하와 저에게 좋은 사람이란 말은 사치스러운 형용사일 뿐이지요……. 하오나 바로 그러하기에 저는 어머니처럼 영문도 모르고 멍하니 있다가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폐하께 하나 정도는 묻고 죽고 싶습니다.”

이는 범한이 자신은 섭경미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세상일이란 건 수시로 바뀌기에 기묘하지 않던가. 이 세계에서 열심히 위로 올라가고 있던 범한은 결국 서서히 섭경미의 길로 접어들어 버렸다. 왜냐하면 시차를 두고 이 세계에 떨어졌지만 이들 따스한 영혼은 황권을 향한 태생적인 경외심이 없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 내면에는 용좌 앞에서도 꼿꼿하게 서 있으려는 욕망이 있던 거였다.

황제가 범한을 향해 무언가 이상한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게 아주 오랜만에 다시 그녀를 본 느낌이 들어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범한이 차분한 듯하면서도 구구절절 비난을 쏟아내고 있는데도 황제는 화를 내지도, 우울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다른 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옛날에 태평 별원에서 일이 터졌을 때 짐은 네가 살아남을 거란 기대를 하지 못했다.”

범한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태평 별원에서 살인사건이 났을 때, 섭경미는 자신을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범한은 가장 연약한 상태의 영아일 뿐이었다. 그러니 황후 일족의 미친 듯한 추격과 진씨 가문 대군의 냉혹한 감시하에서 살아남을 거라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또한 그때 황제는 비열하고 냉혈하게 계획을 세운 자였으니 자신의 생사 따위는 냉정하게 무시했을 게 뻔했다.

만약 범씨 가문에서 목숨을 걸지 않았더라면? 만약 오죽 아저씨가 서둘러 돌아오지 않았다면? 또 만약 진평평이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북쪽 변방에서 시간을 앞당겨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지금 경국에 어찌 범한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한데 너는 결국에는 살아남았고, 더군다나 유모가 있는 곳으로 보내졌지. 짐은 놀라고 믿어지지 않았는데도 속으로는 안도했었단다. 너는 짐의 골육이었으니까 말이다.”

황제가 범한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평평은 그때부터 짐을 의심하기 시작한 거였어. 그게 아니라면, 오씨의 요구를 받아들여 너를 담주로 보냈을 리 없겠지. 진평평은 짐이 이 세상에서 황태후 마마와 유모를 모두 어머니로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직접 지켜봐야 너를 받아들일 거란 것도 알고 있던 거야.”

“그 상태가 지속되었으면 좋았으련만. 짐은 경도에 있고 너는 담주에 있고. 명절이 되면 짐에게도 저 먼 담주 바닷가에 사생아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너에게 선물을 보내주기 위해 범씨 가문에게 상을 내리고 말이다.”

황제의 머리카락에 눈송이가 달라붙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게 눈인지 머리카락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황제는 점점 노인처럼 변해갔다.

“하나 진평평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네가 네 살 때 비개를 보내는 것도 모자라 암암리에 감찰원 밀정 여럿을 유모가 부릴 사람으로 보냈으니까 말이다. 그 일은 진평평이 입궁해 짐에게 말해준 거란다. 그때 짐은 그가 부질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마치 과거 십여 년간의 일이 떠올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네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 자객이 너를 찾아갔지.”

황제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그때 너는 담주에 있었으니 분명 몰랐을 게다. 담주 소식은 감찰원을 통해 진평평 책상 위로 보내졌단다. 늙은 절름발이는 시시때때로 입궁했고, 감찰원 업무를 볼 때보다 더 열정적으로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짐에게 알려주었지.”

“네가 담주에서 여종에게 집적거린 일, 담주에서 지붕 위에 올라가 야단법석을 떨어댄 일, 직접 주방에 들어가 유모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기 시작한 일, 네가 이상하리만치 패도한 정기를 수련했다는 사실까지…….”

황제의 얼굴이 괴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너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짐은 다 알고 있었단다. 심지어는 경도에 있는 아들들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지. 하여 네가 담주에 있기는 했어도 짐에게는 네가 곁에 있는 것만 같았단다.”

“그러다가 네가 경도로, 짐의 곁으로, 태평 별장 밖 찻집으로까지 온 거야.”

황제가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얼굴에 있던 웃음을 차츰 거두어들였다.

“너는 감찰원에 들어갔고, 현공 사당 위로 올라왔고, 짐과 함께 작은 전각에도 들어갔고, 또한 짐에 의해 강남으로 가게 되었지. 하여 짐은 네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것도 가장 좋아하는 아들이란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과거 네 어미가 좋아하면 길들이게 된다고 말했단다. 짐은 너의 존재에 길들었던 게다. 그것도 네가 어렸을 때부터 말이다.”

황제가 고개를 들어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구를 향해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한데 짐이 가장 좋아하는 아들은 외려 짐의 아들이 되려 하지 않다니. 게다가 지금은 짐 곁에 서서 짐의 권위에 도전하고, 과거 일을 들먹이며 공평함이란 걸 찾아야겠다는 말이나 해대고 있으니 원.”

황제가 고개를 떨구고 냉담하게 범한을 바라보았다.

“너와 나는 부자 사이니 승부 같은 건 없다. 또한 지금까지의 일을 세세히 따져보니, 그래도 진평평이 이긴 것 같구나.”

범한은 황제가 한 말의 뜻을 알아들은 터라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 * *

“너는 자신이 천하를 생각하는 어질고 의로운 사람은 아니라고 했다. 또한 공공의 의를 위해서가 아닌 사적인 원한을 해결하려 한다고 말했다. 하여 짐은 오늘 너의 선택이 명확히 이해되지는 않는구나.”

황제는 범한에게 자신이 가족임을 더 상기시키기보다는 곧바로 냉랭하게 질문이나 던졌다.

범한은 단순히 사적인 복수를 위해, 그리고 단순히 통쾌하게 공정함을 찾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아까 눈밭을 천하 삼아 황제에게 이런저런 사실을 늘어놓으며 도리에 대해 논하고, 많은 패를 던지고, 전장을 황성 안으로 국한시키고, 적대적인 관계의 당사자를 부자 사이로만 한정시키려 한 걸까? 그건 복수를 위해서라면 애당초 인(仁)이나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러므로 범한은 경국이며 천하를 모두 자신의 이기(利器)로 쓸 수 있는 거였다.

한동안 조용히 있던 범한이 입을 열었다.

“저택에서 이레 동안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범한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어 갔다.

“폐관(閉關) 수련이니 하는 말은 다 거짓이더군요. 이레 밤낮을 방안에만 박혀 지내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하여 저는 음식도 먹고 산책하며 바람도 쐬었습니다.”

범한의 표정이 점점 온화하고 차분해졌다.

“밤이 깊어 완아도 잠이 들면, 저는 몰래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한 벌로 된 옷 하나 걸치고 떠돌이 유령처럼 저택 안 정원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때 경도에서는 계속 눈이 내렸고 밤에는 엄청나게 추웠습니다. 하여 정원을 지켜보던 어멈들도 모두 쪽방에 들어가 술이나 마시느라 저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녔습니다.”

범한이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는 대단히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때서야 범씨 가문 저택의 정원이 크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에는 정무를 돌보느라, 아귀다툼하느라 바빠서 제집 정원이 어찌 생겼는지도 잊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그 이레 동안 집에서 지내며 정원의 크기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하여 알고 보니, 범씨 가문 저택의 정원은 강남의 화원(華園)보다 훨씬 더 넓었습니다.”

“성 남쪽으로 뻗은 거리 옆에는 수많은 저택이 수도 없이 많은 땅을 점하고 들어서 있었습니다.”

범한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또한 평소 자주 쓰는 물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곳, 그리고 제가 보기에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사물들이 실은 평민들이 봤을 때는 지극히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거였습니다.”

범한이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고 있는 황궁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물론, 최고로 큰 정원은 그래도 황궁에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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