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화 평민, 단검, 그리고 조천자(朝天子) (4)
황제는 범한의 방자한 행동을 눈감아 주었다. 서늘한 눈빛을 하고는 그게 좀 보기 싫다는 듯 손을 잠시 휘휘 내젓기만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면 황제의 행동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범한은 달랐다. 그는 곧바로 몸을 곧게 펴고 차분한 낯으로 돌아와 정신을 가다듬었다. 오늘 일과 관련한 결정에 조금 차질이 생길 걸 알아차려서였다. 그리고 죄명 상으로는 차이가 조금 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조정에서 대놓고 체포하는 것과 몰래 공격하는 건 엄청난 차이였다.
처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키 큰 풀에 쌓여 있던 눈이 회오리처럼 날아올라 두 사람 등으로 떨어지며 추위와 냉혹함을 가중시켰다. 만약 죽은 하종위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친 황제 폐하와 자신을 죽인 범한이 단 한 차례의 대화로 본인의 죽음을 더럽히려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면, 아마도 더 강하게 원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봉건 왕조 시대로 한 가문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니 이 파렴치한 부자가 입장에서는, 하종위라는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했던 대신보다는 경국 황제와 범한의 명성이 관료사회와 민간에서 훨씬 더 힘을 발휘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 처리가 대신들에게 실망감을 안길지는 훗날 황궁에서 구체적으로 손보기에 달린 거였다.
눈은 여전히 천천히 음침하고 차갑게 내리고 있었다. 황제가 천천히 몸의 방향을 틀어 자신만큼 키가 큰 범한을 한동안 조용히 바라보았다. 황제 앞에서 범한은 매번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굽히거나 고개를 숙였지만, 오늘만큼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서 있었다. 이에 황제는 지금에서야 아들이 자신과 키가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순간 무서운 한기와 위압감이 밝은 황색 용포를 입은 남자 몸에서 뿜어져 나와 범한을 눈 내린 초지 위에 고정시켜 버렸다. 황제가 일부러 기세를 발산시킨 건 아니었다. 단순히 심경의 변화에 따라 웅장하고 힘찬 기세가 움직여 뜻밖에도 주변 환경에 영향을 미친 것뿐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눈송이가 날리는 공기를 평온하고 진지하게 들이마시고 내뱉기만 했다. 긴 대화를 마친 부자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음을 깨달았다. 하종위 일을 해결했으니, 자연스레 두 사람 간의 일을 처리해야 할 때가 온 거였다.
“네가 오늘 혼자 입궁해 짐과 대면 중인데, 대체 뭘 믿고 이러는 건지 궁금하구나.”
황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의 얼굴에는 조롱과 무시의 태도가 한껏 드러나 있었다.
“저에게 믿을 게 어디 있겠습니까.”
말을 마친 범한이 천천히 두 눈을 감고 한동안 침묵한 후 한 차례 심호흡했다. 그런 후 용감하게 눈을 떠 심오한 실력자인 군왕을 똑바로 바라보며 평범하지만 무미건조한 어투로 자그마하게 말했다.
“저는…… 단지 황제 폐하와 공평하게 싸우고 싶을 뿐입니다.”
공평하게 싸우고 싶을 뿐이라고? 황제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에 황당함을 가득 실은 중후한 웃음소리가 한겨울 황궁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런데 그건 겨울잠을 자는 수많은 작은 생명체들을 놀라 깨도록 할 것만 같은 소리였다.
황제가 눈을 살짝 가느다랗게 떴다. 그리고 눈언저리에서 괴이한 웃음이 번뜩이더니 살짝 갈라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짐에게 공평함 따위를 논할 자격이 있다고 보느냐?”
그렇다. 황제 폐하 앞에서 범한이 어찌 공평함을 논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의 누이는 아직 황궁에, 그의 가족은 여전히 경도에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은 오늘 제대로 방자한 짓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황제가 보기에는 대세를 뒤집을 수도 없는 땅강아지나 개미일 뿐이었다.
또한 황제 폐하는 마음만 먹으면 그 즉시 군대를 모아, 갖고 있는 권력으로 범한을 저항할 수 없게 압사시켜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경도 소란이 일었는데도 황제 폐하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건 모두 그가 강한 자신감을 지닌 덕분이었다.
그러니 ‘공평하게 붙고 싶다’란 말은 그야말로 시건방지고 용감하고…… 유치한 행동인 거였다. 그리고 천자가 사는 황궁이 민초들이 날뛰는 강호도 아니거늘. 또한 범한은 싸우고 싶다고 했는데 군왕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면 뭘 또 어쩌려고 그러는지 원!
범한이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차분하고 의연하게 황제 폐하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매 글자를 똑똑히 말하기 시작했다.
“자격은 실력에서 나옵니다. 하여 저에게는 죽여달라고 통쾌하게 요청할만한 실력이 있다고 봅니다.”
범한의 말에 황제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그윽한 눈빛이 자연스럽게 범한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 궁이 모여 있는 동남쪽으로 향했다. 원래는 떠들썩해야 하는 곳이지만 오늘은 눈 때문에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큰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지도 않았고, 이상한 움직임도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쪽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속으로 움찔했다. 왜냐하면 범한이 오늘 혼자 입궁해 통쾌하게 피의 복수를 했다는 건 그가 일찌감치 퇴로를 마련 놓고, 자격이란 패를 내보일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천하가 장기판이라면, 이 부자 사이에 있는 판에는 7로로 이루어진 강토, 세 개의 세력, 무수히 많은 주군(州郡)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장기말 역할은 억 만에 이르는 백성, 무궁무진한 재화, 민심, 세상사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범한의 오늘 행동은 ‘용맹’이란 두 글자만 남겨 두고 천하의 모든 장기말을 거둬들인 후 그 판을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황궁 내 차가운 땅으로 국한시키는 거였다. 즉, 장기판에서 다른 장기말은 모두 없애고 자신과 경국 황제 두 사람만 남긴 거였다. 이는 범한이 배수진을 친 심정으로 자신을 모질게 몰아붙이는 동시에 황제 폐하에게 결연한 태도를 보인 거였다.
그런데 황제 폐하에게 천하라는 장기판을 버리고, 그 장기말들의 안위를 보장하도록 하려면, 범한에게는 상대를 설득할만한 충분한 패가 있어야 했다. 그건 하종위의 죽음도 포함한 거였다. 그러니 범한이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증명해 보이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그 말을 할 자격조차 없는 거였다.
범한이 내놓은 첫 번째 패는 바로 불이었다. 그것도 겨울날 불이었다. 그 불은 지금 황궁의 고요하고 삼엄한 모처 방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애당초 다른 데는 관심을 끄고 그 방에 있는 물건만 지키던 궁정 고수들은 창문 밖으로 갈수록 거세게 쏟아져 나오는 불길을 ‘나는 이제 죽었다!’라는 심정으로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방에서 일었던 불길이 잡혔다. 하지만 안에 있던 서책들은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몽땅 타버렸다.
* * *
황제의 눈은 동남쪽에 있는 전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후 검은 연기가 일었고, 검은 연기는 다시 눈송이 속으로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황제의 눈동자가 결국에는 싸늘하고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황실 금고의 제품 제작 공정 필사본이 어디에 있는지는 황궁 안에서도 아는 이가 몇 안 된다.”
황제가 범한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
“그걸 찾아내고 또 불살라 버리다니. 그야말로 짐을 깜짝 놀라게 하였구나.”
그러자 범한이 옆으로 가 말했다.
“황실 금고의 제품 제작 공정을 기록한 건 천하에 딱 두 개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민북에 다른 하나는 황실 안에 있지요. 황궁 안에 있는 걸 제가 불태워버렸으니, 저는 민북에 있는 것도 불살라버릴 수 있습니다……. 소문무의 사망 여부를 떠나, 폐하께서는 제가 강남에서 그리고 황실 금고에서 그 모든 걸 할 수 있으리란 걸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을 마친 범한은 전혀 동요 없는 황제 폐하의 표정 때문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황실 금고는 경국의 근간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 근간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도 황제 폐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차분했다. 이건 그야말로 범인이 아닌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른 기개였다. 그렇다면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어찌 맞설 수 있을까, 범한은 의구심이 일었다.
* * *
겨울이 되면 사람들은 가격이 저렴한 따뜻한 솜옷을 입고 온돌 위에 앉아 독한 청주를 마셨다.
봄이 되면 강남 물의 고장에서는 수차가 천천히 운행을 시작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수리 시설이 조용히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여름이 되면 커다란 엽선(葉扇: 부채)이 부잣집에서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고, 각 작업장에서 나온 상품은 각양각색의 마차와 선박에 실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보내졌다.
경국의 들과 논밭에 분포된 기초 수리 시설, 집마다 가지고 있는 유리기와, 매 공간에 퍼져 있는 향기. 이는 모두 황실 금고와 관련 있었다. 그러니 황실 금고는 민북에 있는 3대 작업장에만 국한된 게 아닌 경국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거였다. 예를 들어, 서산 서방과 같은 주변 산업도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런 작은 물건들이 바다를 넘고, 사람들에게 퍼져나간 건 별것 아닌 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누가 봐도 깜짝 놀랄만한 재화와 부가 경국에 성공적으로 축적되도록 하고 있었다.
황실 금고에서는 경국의 강력한 군대에 필요한 장비와 군사 설비, 3대 수사의 전함도 만들었다. 그리고 계속 흘러들어오는 재화와 부로 경국 국경에서 영토 확장에 필요한 군량과 자금도 지원했다. 더 중요한 건 황실 금고가 이 거대한 영토를 통치하는 경국 황제를 위해 재화와 부를 제공함으로써 민생을 안정시키고, 관료 사회 체계가 지속적이고 효과적으로 운행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경국의 모든 백성은 자신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온 황실 금고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가 된 탓에 중요성을 점점 잊고 과소평가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경국 황제는 그럴 수 없었다. 그건 경국의 머리 좋은 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줄곧 황실 금고에 군침을 흘리는 북제 조정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경국이 민북에 정예병을 집중적으로 배치해 3대 작업장을 경도보다 더 삼엄하게 지키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건 황실 금고의 기술력이 외부로 새어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오늘 황궁에서 난 불은 경국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명확히 선포한 거였다. 일단 경국 최대의 비밀이 범한에게는 비밀이 아니며, 심지어 그의 손에 있는 이상은 언제든 가지고 놀 수 있는 패라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황실 금고의 제품 제작 공정이 모두 사라지고, 장인들이 죽고, 3대 작업장이 파괴되면 경국의 근간은 괴멸적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거였다.
* * *
그런데 황제의 냉담한 표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범한이 황실 금고를 훼손했는데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황제가 알고 있는 범한은 황실 금고를 중요하게 여기고, 인간 세상의 이 진귀한 보물을 쉽게 파괴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황제는 당장 강남에 손을 써 황실 금고의 제품 제작 공정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범한의 말도 믿었다. 하지만 또 황제는 범한이 일을 저지르기 전에 분명 필사본을 만들어 두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니 쓸모 있는 물건이나 담판의 패가 될 수 있는 법이다. 경국 황제가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곳에서 시선을 거둔 후 범한을 쓱 보았다.
“과연 정신이 나가서 미쳐 날뛰는구나. 경국 사람으로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그러자 범한이 한동안 침묵하다가 대꾸했다.
“이번 일이 결국에는 폐하와 저 사이의 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이번 일 때문에 화가 천하로까지 번지는 건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