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화 평민, 단검, 그리고 조천자(朝天子) (1)
그 과정에서 범한은 냉정하고 냉담하게, 심지어는 냉혹하게 하종위를 주시했다. 하종위가 피를 토하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숨을 거두는 걸 지켜본 거였다. 그동안 범한의 얼굴은 시종일관 차분했고,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범한은 하종위가 죽기 직전에 느낀 불평과 싫은 감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경력 11년 정월 초이레 하종위를 포함해 관원들을 죽인 건 사실은 일련의 준비 작업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하종위의 죽음 및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감정과는 무관했다. 범한은 자신이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사람을 위해, 그리고 강남과 서량 및 경도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을 위해 황제 폐하가 자신에게 맞서도록 일부러 키워 놓은 관원을 반드시 죽여야만 한 거였다.
그러니 이번 일은 단지 기계처럼 냉정하게 계산해 놓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범한에게 필요한 건 그의 확실한 죽음뿐이었다. 그렇기에 범한은 속으로 감탄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감탄 같은 건 자신이 죽기 직전에 해도 늦지 않는 거였다.
호 대학사가 멍하니 하종위의 시체를 보고 있다가 심각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분노와 실망, 망연자실함이 담긴 모습으로 범한의 냉랭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얼음장처럼 싸늘한 음성을 짜내다시피 하며 범한을 향해 한마디 했다.
“이 흉악범을 잡아들여라!”
호 대학사는 범한 곁에 서 있었다. 그것도 실망하고 분노한 모습으로 곁에 서서 범한을 잡아들이라는, 심지어는 죽여도 좋다는 명을 내렸다. 범한이 언제든 손을 뻗어 자신을 하종위처럼 죽여 버릴 수 있었지만, 그는 그와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범한이 호 대학사를 죽일 리는 없었다. 범한은 그를 바라보며 겸연쩍게 웃기나 했다.
금군이 들이닥치기 전, 드디어 궁정 수령 태감인 요 태감이 문하 중서성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날카로운 음성에 강력한 정기를 섞어 소리쳤다.
“황제 폐하의 명이오! 역적 범한을 황궁으로 압송하시오!”
드디어 황명이 도착했고, 의심할 여지 없이 죄를 묻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황명의 취지는 결국 범한에게 입궁하라는 거였다. 그러므로 조정 관원들은 황제 폐하와 사생아 사이의 모든 일을 더는 듣거나 볼 수 없게 된 거였다.
방안에서 침묵이 흐르고 수십 쌍의 눈빛이 범한에게 향했다. 범한이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요 태감을 바라보며 물었다.
“묶을 건가?”
그러자 요 태감은 아무 대답이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참다못한 범한이 탄식을 했다. 결박해야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자신을 묶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니. 그리고 단지 황제 폐하의 명만 이 세상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영원히 묶어 둘 끈이 될 뿐이라니.
“내 우산은 문 앞에 뒀는데, 누가 훔쳐 가지 못하게 해주게.”
범한은 말을 마친 후 요 태감을 따라 황궁 깊숙한 곳을 향해 갔다. 한편 그의 뒤에 남겨진 관원들은 하종위의 시신을 둘러싸고 슬피 통곡했다.
* * *
겨울눈은 푸른색 청석판 위로 떨어진 후 재빨리 녹아 쌓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밝은 황색의 유리기와 위로 떨어진 눈은 차가운 바람에 그대로 굳어 버려 마치 무수히 많은 깨진 구름 황금색 아침 햇살 속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범한이 내리는 눈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시선을 거둬들이고는 뒷짐을 졌다. 그리고 요 태감을 따라 황궁 담벼락 사이에 빙 둘려 있는 고즈넉한 길을 차분하게 걸었다. 그렇게 범한은 핏빛 주홍색에 둘러싸여 황궁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두 사람 뒤에서는 십여 명의 호위병들이 조심스레 따라오고 있었다. 황명에 따르면, 범한은 이미 역적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속박되지 않은 터라 호위병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작은 범 대인이 금궁(禁宮) 안에서 갑자기 반항이라도 하면 자신들은 그를 막을 수 없어서였다.
그런데 분명한 건 오늘 경도에서 수많은 관원을 죽게 하고, 더욱이 황성 아래쪽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문하 중서의 대학사를 죽였어도 범한에게는 황궁 안에서 대대적으로 공격을 펼칠 흥미 따위는 없다는 거였다. 이는 어쩌면 범한이 이 고요해 보이는 황궁 안에 고수가 무궁무진하게 숨어 있음을 알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또 어쩌면 황궁에 계신 황제 폐하가 거대한 산임을 잘 알아서일 수도 있었다. 산이 무너지기 전에는 황궁 안에서 제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소용없으니까 말이다.
높은 담벼락 위로 번쩍 들려 있는 태극전 처마 끝과 함께 이동한 범한 일행은 말없이 작은 여닫이문 안으로 들어가 눈 쌓인 매화나무를 지나 어서방 앞에 도착했다.
범한은 차분하게 서재 밖에서 기다렸다. 요 태감이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어서방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홍죽에게 나지막하게 두어 마디 말을 전했다. 그런데 요 태감이 아까와는 살짝 달라진 낯빛으로 돌아와 범한에게 소리를 죽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작은 전각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작은 전각에서 말인가?”
범한은 살짝 놀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홍죽을 바라본다거나,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눈빛으로 물어보는 모험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에 외려 억지웃음을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면 가보세나.”
그러자 요 태감이 손을 휘익 내저어 자신들을 따라오던 십여 명의 궁정 호위병을 둥근 형태의 문밖에 남겨 두고는 범한만 데리고 후궁 쪽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 뒤에 남겨진 호위병들은 긴장과 불안감에 휩싸여 찜찜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편 줄곧 어서방 문 앞에 서 있던 홍죽은…… 황궁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작은 범 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눈동자에 갑자기 슬픈 기색을 드러냈다. 이에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홍죽은 누가 볼세라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의 고개 숙인 모습은 그것마저도 멀리 떠나는 범한을 배웅하는 것처럼 보였다.
* * *
눈 내린 황궁 안은 가끔 깊숙한 곳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오는 걸 빼면 대단히 고요했다. 하지만 청력이 좋은 범한에게는 마작 패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범한은 웃는 얼굴로 ‘오늘 경도에서 벌어진 일들이 아직은 황궁 안까지 전해지지 않아 모두 즐겁게 지내는 것 같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황궁 안이 이렇게나 떠들썩한 건 처음인 것 같아 ‘새로 뽑혀 입궁한 지 수개월이 지났을 텐데, 궁녀들과 비빈들이 청춘을 제대로 즐기느라 이 적막함이 희석되는구나.’라고도 생각했다.
이에 범한은 황궁의 싸늘하고 음침한 면모를 줄여주는 저들의 떠들썩함이 좋았다.
황궁은 범한에게는 집처럼 익숙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 폐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작은 전각이 어디에 있는지도 자연스레 알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옛날에 하던 대로 서생처럼 뒷짐을 지고 서두르지도 느긋하지도 않게 황궁 서북쪽 모퉁이를 향해 나아갔다. 그런데 요 태감은 어느새 범한에게 뒤처져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일이 이쯤 된 거면 서두른다 해도 소용없는 거였다. 그리고 황제 폐하도 느긋하게 기다리고 계실 터. 더군다나 여기는 넓기도 하거니와 공기도 차고, 겨울나무와 작은 호수, 가짜 산에 눈까지 쌓여 있어 겨울을 맞은 황궁 안 다른 어떤 곳보다 풍경이 아름다웠다. 이에 범한은 지금 이 풍경을 더 열심히 봐두었다. 한데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안정적으로 걷고 있는 모습은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요 태감에게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요 태감은 앞서가고 있는 작은 범 대인이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가 보기에 범한은 신체를 주변 환경에 맞추어 가며 자신의 경지를 민감하고 풍부한 단계로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요 태감이 고개를 더 숙였다. 작은 범 대인이 한 걸음 한 걸음 느긋하게 걸어가며 호흡을 가다듬는 이유를 알고 있어서였다.
겨울나무가 있는 정원을 지나, 가짜 산 옆을 돌고, 차가운 호수 위에 세워진 다리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차가운 호수 근처에 있는 눈 쌓인 정자를 지나려 할 때였다. 범한은 예전에 눈 내리던 날 이곳에서 황제 폐하와 길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눈 쌓인 정자 아래에는 몇몇 내관과 궁녀가 귀인 중 하나로 보이는 여인과 함께 눈을 감상하고 있었다. 정자 안에는 난로가 있을 수 있었지만, 귀인으로 보이는 여인은 따뜻하기로 유명한 담비로 된 모피를 입고 있었다. 범한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잠깐 웃고는 정자 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 추운 날 황궁 안에서 뜻밖에 황제의 비빈과 마주치게 되어서였다.
범한은 오늘 입궁 후 굳이 의 귀빈을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냉궁에 있는 영 재인과 숙 귀비도 만나지 않고 일부러 피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차가운 호수 위 다리로 이동한 거였는데, 뜻밖에도 누군가와 마주치게 된 거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범한은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요 태감도 감히 그에게 다른 길로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두 사람이 함께 정자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때에 궁으로 들어온 외부인과 마주쳐서였다. 눈썰미 좋은 궁녀가 범한 뒤에서 몸을 숙이고 있는 요 태감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요 태감 앞에 있는 젊은이의 신분이 무엇인지 대략 예측해보았다.
정자 안으로 들어간 범한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달 사이 황궁 내 궁녀들이 전부 바뀌었나? 왜 나를 못 알아보는 거지?’
범한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중간에 앉아 있는 비(妃)로 보이는 여인에게 시선을 옮기고는 한동안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 비는 맑고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나이는 대략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였다. 다만 비녀며 가락지 등으로 치장하고, 예쁘게 화장하고, 또 화려하고 귀한 의상을 차려입어 그런지 귀티나고 오만해 보였다. 비가 거드름을 피우는 눈빛으로 요 태감을 바라보며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오찬 수라는 잡수셨는가?”
요 태감이 아무 대답 없이 웃으며 속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때에 총애받는 척하다니. 좋은 선택을 한 건 아니군.’
요 태감이 아무 대답도 안 하자 정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특히 젊은 선비의 눈빛을 본 후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대체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라고 생각했다.
범한은 비의 불룩 솟아오른 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두툼한 모피를 외투로 걸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배가 부른 게 확연히 표가 났다. 이에 범한은 지금 이 정자에서 눈을 감상하는 귀인이 현재 가장 총애를 받고 있는 매비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만 지금 용종을 밸 수 있어서였다.
정자 안에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범한은 매비의 하복부를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으로 한동안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황제 폐하의 여인을 이렇게 대놓고 바라보는 건, 특히나 이 정도 위치에 있는 여인을 쳐다보는 건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대체 뭐 하는 놈이기에 그 더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냐?”
나이도 많지 않은 궁녀가 범한을 노려보며 날카로운 소리로 꾸짖었다. 그녀의 행동을 보니 당장이라도 범한에게 따귀를 올려붙일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