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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27화 (1,027/1,108)

1027화 대전 앞에서 행복을 다 누렸으니 이제는 창자가 끊어져야 할 때 (2)

범한은 그를 쫓지 않았다. 단지 동정과 비웃음이 섞인 눈빛으로 그의 행동을 그리고 사람들 뒤에 숨은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미 금군과 호위병들은 하종위가 고함을 치기 전부터 황궁 앞쪽에 자리 잡은 문하 중서에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십여 명의 호위병과 세 명의 금군 장수가 문하 중서 방 안으로 들어와 허리에 두르고 있던 패도(佩刀)를 꺼내 경계하며 범한의 주위를 에워쌌다.

범한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자신을 포위한 궁정 호위병들을 순식간에 죽여 버릴 수는 없었다. 이에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대신들은 살짝 안심했다. 하종위의 낯빛도 아까보다는 살짝 좋아져 창백했던 얼굴에 살짝 붉은 기가 돌았다. 그런 하종위가 뒤쪽에서 매섭게 소리쳤다.

“저 흉악한자를 속히 잡아들이거라!”

사람이라면 이름이 있고, 나무라면 그림자를 드리우듯 모두 오늘 경도에서 흐른 그 선혈이 작은 범 대인의 명령 때문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어찌 범한을 잡아들일 수 있겠는가? 특히나 범한이 먼저 공격하지도 않았는데, 금군 장수와 궁정 호위병 몇몇이 어찌 감히 범한을 덮칠 수 있을까?

황성 아래에서 허둥대며 병사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순식간이라 할 만큼 짧은 시간 안에 문하 중서가 자리 잡은 방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많은 금군이 몰려와 포위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커다란 방은 겹겹이 포위되어 경국 조정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대신들과 범한은 이 방 안에 갇혀버렸다.

그러니 범한은 등에서 갑자기 날개가 솟는다고 해도 날아 도망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범한은 도망갈 생각이 없는지 사람들 뒤에 숨어 있는 하종위만 조용히 바라보며 앞으로 대충 한 걸음만 옮길 뿐이었다.

딱 한 걸음이었건만. 관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랐고, 방안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범한을 둘러싸고 있던 호위병들은 범한을 더 압박했다.

범한이 발걸음을 멈추고 사람들 너머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하종위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말처럼 당신은 유능한 관리일지도 모르겠군요. 청사에 기록될 만큼 훌륭한 관리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클 수도 있고 말이지요.”

말을 마친 범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어 갔다.

“하나 나는 당신에게 기회라든가, 계속 살아갈 여지를 주지 않을 생각인데. 말하자면 좀 이상하기는 하나, 나도 내가 왜 당신을 이렇게나 증오하는지 모르겠소. 이 증오란 게 아무 이유가 없으니 참……. 당신은 공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언제나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려 하더군요. 한데 나는 그런 행태를 제일 싫어한답니다.”

“아무리 싫어도 당신에게는 기껏해야 주먹질 두어 번 해주고 끝내려 했지요. 한데 당신은 자신의 전 인생을 걸고 내게 대항하는 일에 뛰어들다니, 그건 생각도 못 한 일이었어요.”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안타깝군요. 당신의 그 일이란 게 광명정대한 게 아니어서 내가 당신을 죽여야 하는 이유만 더 늘어나다니.”

범한은 온화하게 웃고 있었지만 방 안에 있는 사람들 눈에는 그것이 음험하다 못해 살의가 가득해 공포감을 주는 것이었다. 한데 아직은 범한이 공격할 의사를 내비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에 범한을 포위하고 있던 금군과 호위병들은 이 큰 인물이 자극을 받으면 발광해 되는대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으므로 감히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한편 범한의 마지막 말을 들은 하종위는 눈에서 예리한 빛이 번뜩이며 싸늘하게 몇 마디 꾸짖어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후벼 파듯 아파져 왔다. 너무나도 선명하고 끔찍한 통증에 하종위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은 공리에만 열중해 어떤 대가를 치르든 위로 올라가려고만 하는 소인배입니다. 하여 황제 폐하와 조정 백관, 심지어는 천하 만민을 속였다고 해서 나까지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나요?”

범한이 냉담한 눈빛으로 느긋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 깨끗해 보이는 손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를 묻혔으며, 그 관복 위에 얼마나 많은 원혼이 깃들어 있는지 당신은 똑똑히 알고 있겠지요. 물론 나 역시 똑똑히 알고 있고요.”

“하여 내가 오늘 당신과 당신 파벌의 관원들을 죽인 건 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하고, 황제 폐하를 위해 지척에 있는 간신을 몰아낸 것입니다.”

범한은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종위의 창백한 얼굴을 비웃듯 바라보며 입도 뻥끗하지 못하는 하종위를 무시해주고 있었다.

“당신이 왜 이렇게 대가 불문하고 내 부하들의 시신을 밟아가며 위로 올라가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 나중에 이유를 알게 되었지요. 도찰원과 감찰원 사이에 있는 태생적인 적대적 관계 때문도, 내가 나의 누이를 당신에게 시집보내지 않으려 한 것 때문도, 또한 더더욱 황제 폐하께서 당신에게 무언가 명을 내려서도 아니더군요.”

범한이 불쌍하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전부 당신이 나를 질투하였기 때문이지요. 문장력, 무공 실력, 명성, 권력, 어느 하나 나보다 나은 게 없었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힘 좋은 검둥개를 키워도 이번 생에는 나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까.”

“당신 입장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요. 나에게 이리 좋은 아버님과 어머님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하나 천명이란 게 있는데 당신은 뭐가 그리 못마땅했던 건가요?”

콩알만 한 땀방울이 하얗게 질려 있는 하종위 이마에서 몇 방울 떨어졌다. 하종위는 원망에 찬 독기 어린 눈으로 범한을 노려보며 화를 내며 꾸짖어주려 했지만 입을 열 힘조차 없었다. 오히려 서 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비틀거리며 온돌바닥 옆에 털썩 주저앉기나 했다.

“불평 때문일 거요. 당신의 불평이 우리 대경국에 내란이 이는 근원이 되었고 말이지요.”

범한이 온돌 옆에 주저앉아 있는 하종위를 노려보며 매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한데 불평이 지나쳐도 배알이 뒤틀려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거늘. 하여 내가 오늘 당신에게 창자가 끊어지는 결말을 하사한 것이오.”

범한이 내뱉는 모든 단어는 칼이 되어 하종위의 두 귀를 찔렀다. 하종위는 듣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하종위파 관원들은 오늘 몽땅 죽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범한은 암암리에 후수(後手)까지 생각해 두었을 게 뻔했다. 이에 하종위는 범한이 왜 많은 관원 앞에서 이리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뿐이었다.

하종위는 자신을 따르는 관원들이 죽었어도 자신만 살아남으면 황제 폐하의 은총으로 다시 힘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범한이 한 말들은 귀로 들어왔는데 배에서 날뛰는 걸까? 그리고 왜 그 칼들은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창자를 끊어 놓는 듯한 고통을 주는 걸까?

* * *

‘창자가 끊어지는 결말을 하사한 것이오!’라는 말이 떨어지자 황성 아래쪽 방안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관원들이 이리저리 피하기 시작했다. 범한이 이제 곧 폭풍우처럼 미쳐 날뛰며 공격을 퍼부을지도 몰라서였다. 한편 금군들은 계속해서 방안으로 밀려 들어와 무수히 많은 열을 지으며 하종위 앞을 막아섰다.

온통 갑옷으로 무장한 금군이 들어와 대열을 이루고 서자 널따란 문하 중서 방안이 유난히 비좁아졌다. 물론 금군들은 긴장한 모습으로 범한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문하 중서와 맞닿아 있는 황궁 담벼락 쪽 정원에서 스산하고 황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멈추시오!”

온통 눈을 뒤집어쓴 호 대학사가 황궁 쪽에서 뛰어 들어왔다. 그는 오늘 오전에 태학에서 범한의 말을 들은 후 오늘 경도에서 큰일이 발생하리란 걸 직감했다. 이에 곧장 황궁으로 달려온다고는 했지만 도중에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황제 폐하께 짧게 몇 마디 말만 전하고는 태감이 황제께 전하는 보고 내용을 연달아 듣게 되었다. 바로 경도 각처에서 조정 관원이 기이하게 죽어 나가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과, 범한이 문하 중서를 공격하러 들어갔다는 속보였다.

그 누구도 감히 호 대학사를 막지 못했다. 긴장되는 순간이다 보니 그 누구도 호 대학사의 진입을 신경 쓰지 않아서였다. 그를 신경 써준 이는 기껏해야 문하 중서에 있는 관원 몇몇뿐이었다. 하지만 호 대학사가 범한 곁으로 다가가는 걸 지켜보며 정신 나간 범한에게 다치지는 않을까 염려되어 깜짝 놀라 소리친 게 다였다.

그런데 호 대학사가 그런 소리 따위 신경이나 쓸 사람이던가. 그는 곧장 범한 뒤로 가 범한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늙은 몸으로 사력을 다해 범한을 뒤로 끌고 가며 황급히 고함쳤다.

“미쳤습니까!”

오늘 발생한 일을 지켜본 사람들에게 작은 범 대인은, 그러니까 세상을 놀라게 한 시재(詩才)를 지닌 그는 분명 미쳐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조정의 존엄을 이리 쉽게 짓밟고,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무도한 짓을 저지를 리 없는 거였다. 그리고 오늘 경도에서 일어난 일이 역모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

호 대학사는 경도에서 관원들을 찔러 죽인 일만으로도 범한은 황제 폐하의 격노를 사 하옥되어 절대 석방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호 대학사는 사력을 다해 범한을 끌어안고 그가 공격에 나서지 못하도록 막았다. 문하 중서에서 현 조정의 대학사를 죽이는 건 대전 앞에서 살인하는 것과 같아서였다.

이번 일은 경도뿐만 아니라 온 천하에서 일어난 적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 실제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무척이나 해학적이고 웃겼지만, 그래도 누구 하나 웃지 않았다. 이에 황성 아래쪽은 고요함 뿐이었다. 모두 공포에 질려 늙고 연약한 몸의 호 대학사가 목숨을 걸고 범한을 끌어안고 있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호 대학사가 어찌 범한을 끌어낼 수 있으며, 더군다나 계속 안고 있을 수 있겠는가.

* * *

범한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자신의 심장에 갑자기 온기가 느껴져 피식 웃었다. 이에 고개를 숙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손 놓으시지요. 이미 늦으셨습니다.”

범한 뒤에 있던 호 대학사가 몸이 빳빳하게 굳더니 부들부들 떨며 손을 풀었다. 그런 후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범한을 잠시 바라보았다.

바로 이때, 줄곧 사람들 뒤에 숨어 공포에 질려 온돌 옆에 주저앉아 있던 하종위 대학사가 갑자기 헛구역질을 두 번 했다. 그런 후 ‘풉!’ 하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피를 잔뜩 토해냈다.

핏물이 앞에 있는 관원들의 관복에 튀었다. 관복으로 스며든 핏물은 시커머니 보기 안 좋았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소리쳤다. 몇몇 관원들은 서둘러 하종위를 부축했고, 목청껏 어의를 불러 오라 소리쳤는데…….

하종위는 점점 동공이 풀리고, 청력도 감퇴해 옆에 있는 동료가 소리를 치는데도 그것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에게 선명히 느껴지는 건 뱃속에서 올라오는 통증뿐이었다. 뜨거운 피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던 창자를 작은 칼이 토막 내고 있는 느낌뿐이었다.

너무나도 아팠다. 그야말로 창자가 마디마디 잘려 나가는 듯한 통증이었다. 하종위는 이제 자신은 틀렸다는 것만 알뿐 범한이 대체 언제 자신을 중독시켰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작은 침 자국이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오로지 이 상황이 싫을 뿐이었다. 자신은 천하와 조정을 위해 열정을 바쳤고, 청렴한 명성과 정의 구현을 위해 푸른 피를 뿌리고자 했을 뿐인데. 왜 마지막에 시커먼 피를 토해내게 된 것인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종위의 초점 없는 눈빛이 범한의 냉랭한 얼굴을 찾았다. 하종위는 불평으로 가득 차 있었고, 지금 이 상황이 싫었다. 관리로 황제 폐하를 대신해, 조정을 대신해 일했건만. 대체 무엇이 틀렸단 말인가?! 사람들을 죽이고 사람들을 배반해서? 하나 천년이란 시간 동안 관료사회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모두 이리하지 않았던가?! 설마 범한 너는 무고한 사람을 죽인 적 없단 말이냐? 한데 너는 누군가를 배신할 필요가 없지 않더냐. 왜냐하면 너는 태어날 때부터 주인의 자리에 있었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노비였으니까…….

하종위가 분노에 차 범한에게 질문을 던지려 했다. 네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말이다. 너는 전체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기호에 따라 일 처리나 하는 신분 높은 집안 자제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이 질문들을 꺼내지 못했다. 입에서 쉼 없이 쏟아지는 시커먼 피가 그가 하려는 말을 막고, 종국에는 그의 호흡까지 멎게 해서였다.

이에 어의가 도착하기 전, 조정 대학사이자 집필 어사 대부이며, 3년 동안 경국 조정에서 제일가는 인물인 하종위는, 황성 아래 문하 중서성 방 안에서 창자가 끊어져 피를 토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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