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2화 경도와 강남에 뿌려진 피 (2)
창주성 밖에서 일어난 영문을 알 수 없는 전투나 홍산 입구에서 일어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청주 대첩과 비교하면 강남의 혼란과 학살은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 죽은 사람의 숫자도 다른 두 곳과 비교하면 많지 않았고, 영향력도 다른 두 곳과 비교하면 별로 크지 않았다. 경도에 있는 권문귀족들과 시민들도 강남에 살고 있는 돈 많은 친척들에게 어렴풋하게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다. 이에 이들은 최근 강남 상황이 이전만큼 좋지 않다고만 알고 있을 뿐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강남은 경국에서 어느 곳보다 중요한 곳이었다. 강남은 경국 전지역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곳이었고, 경국 백성 중 3분의 1이 삶의 터전으로 생각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강남은 줄곧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누려온 곳이었다. 그래서 과거 범한도 강남에 내려왔을 때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통제가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비록 강남 서생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기는 했지만, 강남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강남이 처음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만약 하서비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살아난 하서비가 더 잔혹한 방법으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강남은 이미 조정의 통제 아래 놓여 있을 것이었다. 이런 점을 보면 범한의 이번 생애는 확실히 운이 좋았다. 그가 선택한 심복이 그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복수를 실현했으니 말이다.
황제 폐하와 범한 사이의 냉전은 천하에서 중요한 세 곳을 전쟁터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이 세 곳을 제외한 영주성 밖에서도 사건이 발생했다. 다만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조정에서 관직을 박탈당하고 경도에서 심문을 받기 위해 압송되던 감찰원 관리 겸 황실 금고 전운사 주관 소문무가 영주를 경유하고 있을 때였다. 죄수를 호송하는 수레가 영주성을 막 나왔을 때 산적 무리의 습격을 받았다. 그날 호송을 책임진 형부 관리들 중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고, 소문무는 한쪽 팔이 잘렸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도 묘연했다.
* * *
“과거 영주의 산적은 관무미였습니다……. 그 해에 제가 배를 타고 강남으로 내려왔을 때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그녀였지요. 이후에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서 명칠 공자를 알게 되었는데 데 그 사람이 바로 하서비입니다.”
경력 10년 섣달 28일 강남의 상황이 마침내 포월루를 통해서 범씨 집안에 전해졌다. 아무 말 없이 손에 들린 정보를 바라보던 범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전부터 단속해서 강남 수채는 더는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또 항주회가 줄곧 영주에서 활동해서 큰 강 제방이 터진 뒤 참혹한 모습은 이미 많이 사라졌지요. 지금 영주 지주는 제가 직접 뽑은 청렴한 관리가 맡고 있으니 이렇게 많은 산적이 어디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범한이 웃음을 지었지만, 서글퍼하는 기색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임완아를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당신과 제가 오랜 시간 힘들게 노력했음에도 폐하의 억지스럽고 잔인한 수단을 이겨내지는 못하는군요.”
과거 범한은 강남로를 지나던 중 영주에서 백성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후 황실 금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데 성공한 범한은 조정 국고를 채우고 황실 금고의 생산량을 증가시킨 뒤 임완아에게 항주회를 주도하게 해 큰 강 양쪽 연안에 있는 가난한 주와 군에 은전을 지원했다. 그 당시 범한과 신 군주의 명성과 감찰원의 삼엄한 감시에 관리들은 은전을 함부로 착복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덕분에 은전은 모두 민생을 위해 쓰여 지금 강남 민생은 이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검려에서 총 여섯 명을 강남에 내려 보냈습니다. 황실 금고 안에 세 명을 남겨둔 이유는 그곳이 너무나도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하서비와 소문무의 안전을 책임지도록 했습니다. 저는 저를 따르는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범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이렇게 했지만, 여전히 큰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소문무가 살 수 있으면 좋겠군요.”
옆에서 조용히 범한을 바라보는 임완아는 남편이 견디기 힘든 압력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범한이 고개를 숙인 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 안에서 마치 불꽃이 일어나는 듯 번쩍였다. 이 불꽃은 호수 안에서 3일 밤낮으로 타오른 불길과 닮아 있었다. 마치 불길 속에서 무수히 많은 원귀들의 비명과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경도 안의 상황은 폭풍우가 치는 것과 같았다. 언빙운은 여전히 정주에서 청주 대첩의 일을 처리하고 있었고, 설사 이미 정주를 떠났다고 하더라도 길 위에서 시간을 허비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 며칠을 기회로 삼아 도찰원은 감찰원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지금 감찰원은 선후 두 원장이 연이어 죽거나 쫓겨났고, 언빙운은 감찰원 관리들의 마음에서 우러난 복종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감찰원은 지금 한마디로 이끌어 줄 우두머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황제 폐하의 묵인과 문하중서의 협력을 받아 도찰원 어사들은 하종위의 인솔 하에 감찰원에 가장 잔혹한 숙청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은 건 1처였다. 단 3일 만에 30여 명의 감찰원 관리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거나 대리사에 잡혀갔다. 비교적 온화해 보이는 문관들은 모처럼 감찰원을 건들 기회를 얻게 되자 체면 가리지 않고 감옥 안에 있는 각종 고문 기구들을 모두 동원했다.
* * *
패배였다. 범한의 패배. 그는 연거푸 계속 패배하며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범한은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는 대동산 같았다. 그가 천하 이곳저곳에서 풍파를 만들어내도 대동산처럼 우뚝 솟은 황제 폐하는 쓰러지지 않을 것이었고, 경국 조정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황궁 안에서 아주 은밀한 정보가 새어 나왔는데, 그건 범한의 마음속에 마지막 기대를 버리고 당장 선택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바로 선발되어 궁에 들어갔던 수녀가 용종을 임신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냉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한근으로 정력을 못 쓰게 만들려 했던 계획이 대종사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강남에 있는 하서비가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만약 다시 나서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테니 저를 지지해주지도 못하겠지요.”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
“제가 가진 힘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폐하의 수단은 더욱 거칠고 잔인해질 겁니다. 폐하가 조금씩 움직일수록 제가 반역할 힘이 줄어들 것이고, 그럼 폐하가 망설일 이유가 줄어들게 되니 방법은 더욱 거칠고 잔인해지는 겁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저는 모든 걸 잃고 외롭게 홀로 남게 되겠지요.”
“조정이 이번에 강남에 내린 조치들을 보면…… 매우 어리석은 조치들이었어요.”
임완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명씨 집안이 힘든 상황에 부닥친 이유를 알고 있을 겁니다. 조정의 이번 태도는 너무 노골적인데다가 사용한 방법도 너무 거칠고 잔인했어요. 아마 강남 상인들도 이번 일을 계기로 마음이 떠나기 시작했을 거예요.”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멍청하기 짝이 없는 조치들이었지요. 하지만 폐하는 분명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으실 겁니다. 폐하의 머릿속에는 제가 어떤 요행도 부리지 못하도록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저를 철저하게 무너뜨려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을 테니까요.”
범한을 바라보던 임완아의 가슴이 살짝 떨렸다. 명확하게 말을 하지 않아도 임완아는 눈빛만으로 남편이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았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가 겉으로 드러내는 표정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려주고 있었다.
두 줄기의 맑은 눈물이 임완아의 눈에서 떨어졌다. 그녀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범한을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상공에게 방법이 있겠어요?”
범한이 한참 침묵한 뒤 가볍게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는 아이를 안듯이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주며 말했다.
“지금껏 계속 패배를 당하면서, 알고 싶은 사실 하나는 확인했어요. 바로 폐하가 연로해지셨다는 거죠. 과거 폐하는 상대방이 어떤 반격도 할 수 없도록 모든 가능성을 계산하고 침착하게 일을 진행하셨어요. 하지만 이제는 연로해져서 인내심이나 침착함이 부족해지신 것 같아요.”
범한이 고개를 숙여 아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용포를 벗기면 폐하도 평범한 사람과 다를 게 없어요. 이게…… 아마 제게는 마지막 기회가 될 거예요.”
* * *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는 만큼 범한도 더는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오죽이 얼음으로 뒤덮인 설원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었다. 만약 범한이 정말 계속 기다리기만 한다면, 설사 황제 폐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죽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설사 오죽이 정말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그때는 이미 그가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전부 죽고 없을 것이었다. 강남의 수채 사람들처럼, 관무미처럼, 소문무처럼, 감찰원의 관리들처럼 모두 이 세상에 없을 거였다.
그러니 범한은 이제 반드시 반격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의 손에는 황제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쥐어져 있었다. 다만 그는 자신이 황실 금고를 가지고 반격한다면 자신과 황궁에 있는 그 사람은 절대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고, 경국은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만약 범한이 다시 패배한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전부 죽게 될 거였다.
범한은 황제 아버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용감히 앞으로 나서기 전에 반드시 지키고 싶은 가족과 사람들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둬야 했다. 가을비가 내리던 그 날 이후로 그는 자신의 목숨은 신경 쓰지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다.
범한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느라 섣달 28일 이후 범씨 집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집안의 분위기 때문에 아이들도 아버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눈치챈 것인지 큰 소리로 떠들거나 소리치지 않았다.
설 명절은 조용하고 재미없게 흘러갔다. 새해 첫날 만두를 대충 먹은 범한은 이후 자신의 서재 안에 틀어박혔다. 무려 7일 동안 말이다. 초이레 날이 될 때야 비로소 서재에서 나왔다.
온 집안 식구들이 서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임완아는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고, 사사는 인삼탕을 그의 손에 쥐여줬다.
범한이 인삼탕을 단숨에 마시고는 웃으며 말했다.
“담주 여종들 중에서 네가 끓인 탕이 가장 맛있어.”
순간 불길한 조짐을 느낀 사사는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지만 입술을 꽉 깨물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덧 성인이 된 도련님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므로 지난 20여 년의 세월처럼 지금도 상황이 얼마나 어렵든 쉽게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오늘은 초이레 날로 태학에서 수업을 시작하는 날이었으므로 범한은 나가기 위해 세수하고 양치를 했다. 범한에게 옷을 입혀 준 뒤 저택 대문 앞까지 배웅하는 임완아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