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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21화 (1,021/1,108)

1021화 경도와 강남에 뿌려진 피 (1)

살기 쉬운 곳이 아닌 강남은 눈이 내려도 얼마 쌓이지 않았다. 경국 조정의 계속되는 밀지는 강남 전체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눈이 많이 내리지도 않는데도 수많은 백성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모든 거상과 부호들이 경도에서 전해지는 압력과 살기를 느꼈다. 영남 웅씨 집안과 천주 손씨 집안은 줄곧 범한 쪽과 잘 지내 왔음에도 조정의 이러한 압력에 겁을 먹고 함부로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항상 조정 권문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며 변두리에서 호시탐탐 천하의 재물을 얻을 기회를 엿보던 염생들은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황실 금고의 공개입찰 방식이 변한 건 강남에서 범한의 지지기반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더욱이 강남에서 범한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있는 명씨 집안의 주인 하서비는 눈앞에 심각한 위험이 닥쳤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강남에서 명씨 집안의 영향력을 믿었고, 더욱이 명씨 집안의 존망이 강남 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만큼 조정도 이점을 고려해서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최소한 조정도 경력 11년에 명씨 집안은 당장 망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명씨 집안이 망하는 게 조정에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니 말이다.

다만 명씨 집안의 쇠락은 이미 정해진 흐름이었다. 상황이 변하지 않은 채 계속 이대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몇 년도 되지 않아 명씨 집안은 주류에서 밀려나 조정에서 지원해서는 강남 다른 십여 곳의 상인들에게 점점 먹힐 것이었다. 하서비는 자신이 수만 명의 생사를 책임지고 있는 만큼 자신도 모르게 경계심이 들고 신중해졌다. 그리고 강남 총독 대인 설청은 그날 밤 그와 긴 대화를 나누면서 조정의 요구를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그날 밤 이후 하서비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는 이제 작은 범 대인과 조정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오랜 시간 머리를 싸매며 고민하던 그는 계년조를 통해서 통지를 받은 뒤 곧장 경도로 가서 범한을 만나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범한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 변한 건 아니었다. 다만 강남의 상황이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하서비는 자신의 충성심을 드러내기 위해 경도까지 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범한에게 친필 서신을 보내 자신이 이전과 변함없다는 걸 알렸다.

만약 다른 상인이었다면 이미 세력을 잃어버린 범한과 조정 사이에서 한쪽을 선택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상인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상황을 바꿀 힘이 없다면, 그들은 반드시 자발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더 세력이 강한 쪽에 투항했다. 이것은 상인들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천성인 만큼 지금 하서비가 범한을 버리고 조정을 선택한다고 해도 의외라고 생각하거나 후안무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였다.

하지만 하서비는 일반 상인들과는 달랐다. 이것도 과거 범한이 그를 강남에서 자신의 대리인으로 선택한 원인이었다. 명씨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난 하서비는 범한과 아주 비슷한 인생 궤적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세상을 떠돌며 성장하다가 강남 수채의 두목이 된 하서비는 물론 천부적으로 상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보다 강호 사람들의 의리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서비는 작은 범 대인이 없었다면, 자신은 영원히 명씨 집안에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며 명씨 집안의 주인이 될 수도, 어머니의 복수를 할 수도 없었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서비는 자신이 입은 은혜를 잊을 수도 없었고, 더욱이 범한을 배신하고 싶지도 않았다.

강남에서 아주 오랫동안 경영을 해온 명씨 집안은 강남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범한이 강남에 왔을 때도 명씨 집안 때문에 상당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만일 지금 명씨 집안을 이끄는 하서비가 저항하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어떻게 될까? 강남 총독 관아의 압력에 저항하고, 경도에서 오는 밀지를 따르지 않는다면, 강남 전체가 순식간에 혼란 상황에 빠질 것이었다.

이런 기미를 미리 눈치챈 것인지 과거 범한과 찰떡같은 호흡을 보였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못했던 강남 총독 설청이 전면에 나섰다. 경국 조정의 지방 고관인 그는 인정사정없이 명씨 집안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명씨 집안의 넷째 어르신이 다시 무대에 등장했다.

사실 이건 원래 범한이 과거에 사용한 적 있었던 방법으로, 설청은 그대로 껍데기만 모방해 사용했음에도 아주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명원 내부는 원래 몇 가지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다. 명씨 집안 어르신은 비록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명원 내부의 갈등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면서 범한을 대신해서 강남의 이익을 지키려 했던 하서비의 계획에 심각한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하서비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초상전장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 금전을 힘으로 강남 관료 사회 전체에 침투했고, 모든 대가를 아끼지 않고 조정의 교지가 실현되는 걸 막았다. 명씨 집안 주인인 하서비도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저 작은 범 대인이 경도에서 뭘 기다리고 있던 자신들은 최선을 다해 그의 힘을 보호해 줘서 그가 경도에서 계속 기다릴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있는 힘을 다해 버티는 걸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였다. 강남 사인들에 대한 경국 조정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늦겨울에 황실 금고 전운사에서 차모임을 열었고, 하서비는 그곳에서 황실 금고 공개입찰의 새로운 규정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그리고 3일 뒤 명씨 집안 주인 하서비는 소주성 밖에서 자객을 만났다.

하서비를 공격한 검은 색 옷을 입은 자객의 수는 오백 명이 넘었다. 누구도 이처럼 많은 자객이 어떻게 경국의 삼엄한 관문을 통과해서 소주성 밖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알지 못했고, 더욱이 군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나운 검법을 사용하는 자객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도 알지 못했다. 하서비가 자객들을 만났을 때 소주부와 강남 총독의 반응이 유독 느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강남로에 있는 수만 명의 주군은 어째서 이후에 자객들을 잡지 못한 것일까?

5백 명의 검은색 옷을 입은 흉포한 폭도들은 파도처럼 단숨에 하서비의 마차 대열을 삼켰다. 강남 수채의 우두머리인 하서비은 자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울 부하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부하들은 머리가 잘리거나 피를 여기저기 흩뿌리며 쓰려졌고, 결국 방어선이 뚫리고 말았다.

강남 수채에 새로 부임한 공봉이 전력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고, 소주로 돌아와 사무를 처리하는 걸 도와주고 있던 관무미도 자객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리고 하서비 역시 공격을 받아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되었다. 이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에 줄곧 눈에 띄지 않았던 명씨 집안 종이 중상을 입은 하서비를 등에 업고는 손에 검을 들고 두꺼운 포위망을 가까스로 뚫고 명씨 집안 저택으로 돌아왔다.

이후 명원은 모든 문이 굳게 닫혔고, 3일 동안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주군이 서둘러 암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명씨 집안 종들과 호위병들의 시체만 나뒹굴고 있었다. 다른 건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검은 옷을 입은 자객 무리의 시체는 한 구도 찾을 수 없었다. 이들은 조금의 흔적도 남겨두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날 강남 총독부 안에서 총독 설청과 두 책사는 손에 들린 정보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조정이 천하가 경악하든 말든 강경한 수단을 써서 단숨에 일을 끝내려 했으니 모든 힘을 끌어모아 최후의 승부를 보아야 했다. 경도에 있는 황제 폐하는 더는 쓸데없이 범한과 시간만 끄는 놀이를 계속할 생각이 없었다. 인내심이 바닥이 나서 맹렬하고 잔혹한 방법을 사용해 단숨에 일을 끝내고 싶어했다. 하지만 공격을 받은 하서비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설청은 약간은 실망감을 느꼈다. 지금 명원은 이미 굳게 닫혀 있어 조정도 횃불과 무기를 들고 강남 명씨 집안 저택을 강제로 부수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보고를 읽어본 설청은 다친 하서비를 업고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했다는 종에게 상당한 관심이 생겼다. 수백 명의 경국 정예 병사들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을 정도의 무공을 가졌다면 9품 강자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천하에 9품 강자는 많지 않았다. 게다가 줄곧 하서비 옆에 잠복해 있다가 마지막 가장 중요한 순간이 나선 것을 보면 아마도 그 검수는…… 범한이 보낸 검려 제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컸다.

강남에서의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명씨 집안 주인이 자객의 공격을 받은 건 앞으로 일어날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명원이 대문이 굳게 닫힌 뒤 강남 수채 사주 본부에서는 고수를 선발해 소주를 지원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명씨 집안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부대가 절반쯤 이동했을 때 조정의 주군이 등장해 이들의 길을 막았다.

사주에 주둔해 있는 강남 수군은 강남 수채 내부가 비어 있는 틈을 타서 가장 잔혹한 살육 작전을 시작했고, 호수에 둘러싸여 있는 강남 수채는 전부 불타버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불길은 자그마치 3일 밤낮 꺼지지 않고 타올랐고, 그 모습은 마치 제단에 꽂혀 있는 긴 향처럼 호수 한가운데 커다란 향이 켜져 있는 것 같았다.

조정이 강남 수채를 말끔히 소탕해야 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설청이 실망을 느낀 이유는 강남 수군의 방식이 너무 잔인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도중에 길이 막혀 전진할 수 없게 된 수채 부대 사람들은 강경하게 맞서다 죽거나 다쳤고, 포로로 잡힌 사람들도 완강하게 버티며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명씨 집안과 강남 도적들을 엮으려 했던 시도는 어쩔 수 없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명원의 대문이 굳게 닫힌 지 3일째 되는 날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이 우물 속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양심의 가책을 심하게 느껴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했다고 했다. 이어서 명씨 집안 넷째 어르신 쪽 사람들이 하나둘씩 목숨을 잃었다. 아끼는 심복들 대부분을 잃은 하서비의 인정사정없는 반격이 시작된 거였다. 최소한 지금 명원은 하서비의 냉혈한 반격과 동이성 강자의 도움 덕분에 점차 안정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 * *

조정이 강남 거상인 명씨 집안을 상대로 한 이러한 수단들은 엄청난 반향을 초래했다. 일단 강남이 민심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고, 다른 강남의 상인들도 조정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잊으면 안 되는 것이 하서비는 관리 신분이었다. 그의 감찰원 주강남로 순찰사 감사 신분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고, 이에 총독부는 이번 일과 관부의 관계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명씨 집안에서 분노에 찬 질책을 하고, 경도 감찰원 본부에서도 미적지근하지만 약간의 불만을 제기하자 강남 총독부를 필두로 한 몇몇 관부에서 하서비 자객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조사가 영원히 그 어떠한 결론도 내지 못하리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이상했던 점은 관부과 명씨 집안 모두 불길 속에서 사라져 버린 강남 수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치 과거 강남에서 엄청난 세력을 떨쳤던 수채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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