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1020화 (1,020/1,108)

1020화 강남에 불어닥친 변화 (2)

범한이 양손을 가볍게 비비고는 정중하게 책상 옆을 가리키며 해당타타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그리고는 식은 차로 목을 축이고 혀로 입술을 적신 뒤 진지하게 말을 시작했다.

“제 친누이가 지금 황궁 안에 있고, 경도 안에 있는 제 가문 사람들은 모두 제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또 제 부하들도 이 나라 어둠 속에서 숨어 저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진 힘만으로는 조정의 근간을 흔들기 힘들 뿐만 아니라 저는 조정의 근간을 흔들어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걸 원치도 않습니다. 제가 상대해야 하는 사람은 강력한 힘과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경국에서 절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에게 충성을 하고 있지요……. 한가지 놀라운 점은 초가을 비가 온 날 이후 황궁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그 사람이 신단에서 천천히 내려와 평범한 사람처럼 감성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그가 냉혈하고 강한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제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지키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전에는 죽는 걸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죽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길게 말을 이어가던 범한이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 제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죽는 건 두렵습니다. 낭자께서 저를 도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습니까?”

해당타타는 오래 고민해보지도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불가능합니다.”

범한이 눈을 치켜뜨고는 긴 탄식을 토해내며 말했다.

“이 세상에 저를 도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은 없는 것 같군요.”

“그런데, 그가 신단에서 내려왔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해당타타는 이 말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면서도 범한이 경제를 이렇게 판단한 이유가 뭔지는 알지 못했다.

범한이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이 있는 위치에 내려놓으면서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부자는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작은 변화를 다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해도 저는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는 제가 이 집안에 갇혀 일을 계획을 세우게 만든 뒤 그것들이 하나하나 실패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군왕의 강대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일이긴 하지만, 이런 방식이 무척이나 힘들고 귀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가 손쉽게 이 모든 걸 완전히 없애버릴 방법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저에게 화를 내고 진평평에게 화를 내고 제 어머니에게 화를 내고 싶어서 것입니다.”

“무정하고 냉혈한 사람이 화를 내는 방법을 배운 겁니다. 낭자가 보기에는 그가 점점 일반 사람을 닮아 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범한이 떫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절름발이 노인이 자기 죽음으로 만들어내고 싶었던 결과이지요.”

“하지만 대인에게는 여전히 상황을 바꿀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등받이 의자에 앉은 해당타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대인은 최근 몇 달 동안 한가하게 경도에 머무르면서 혼란의 씨앗을 천하 각지에 뿌려 두셨지요. 대인의 방법은 사실 아주 단순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맑은 눈동자로 범한의 충혈된 눈을 바라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도 진평평이 복수를 위해 계획한 부분이겠지요. 먼저 천하 전체를 흔들어 어지러운 상황을 이용해 황실을 압박한 뒤 강력한 일격을 던지는 것……. 다만 대인이 진평평에 상상했던 것처럼 경제의 신임을 받지 못한 이유는 대인이 형편없는 허영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대인이 천하를 상대로 잔인한 수단을 쓸 수 없는 이유는 대인이 형편없는 가식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인도 인정하셔야 합니다. 대인의 성격이 겉으로 보기에는 매정하고 냉혈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요. 대인은 사실 강한 야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며,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인물도 아닙니다.”

해당타타가 눈을 치켜뜨고는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차가운 눈빛으로 냉정하게 말했다.

“대인이 지금 하는 모든 일은 천진난만하고 유치한 짓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에…… 대인은 정면으로 그 사람에게 대항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던 범한이 말했다.

“누가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까? 최근 몇 달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그에게 경고해서 잠시나마 지금의 상황을 유지해 제 주변 사람들을 지키는 것뿐이었습니다……. 만약 황제 폐하가 제가 모든 걸 포기하고 경국을 혼란에 빠뜨리려 한다고 생각했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양만리, 성가림, 그리고 1처 사람들이 살 수 있었을 것 같습니까?”

그가 고개를 들어 해당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반드시 제가 가진 힘을 증명해야만, 사람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습니다. 맞아요. 가장 마지막에는 폐하와 정면으로 대결을 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용기가 없기에…… 그 사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님 대사 말이군요.”

해당타타는 묻지 않고 마치 마력을 가진 단어인 듯 직접 말했다.

“대인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사람들에게만, 희망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대인의 어머니나 진평평 대인이나 범 상서 대인 모두 이미 대인을 위해 너무 많은 걸 해주었습니다.”

범한을 바라보던 해당타타는 순간 연민이 들었다.

“만약 장님 대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대인이 경도 안에서 이렇게 버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해당타타가 진지한 목소리로 간곡하게 말했다.

“세상에는 자신의 힘 만으로만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대인이 자신이 있든 없든 상황은 이미 대인에게 나서라 말하고 있습니다. 대인이 친어머니의 죽음과 진평평 대인의 죽음을 무심하게 대하지 못한다면 대인은 이제 더는 그 사람 앞에서 충성스러운 신하인 척 효심 가득한 아들인 척 연기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말이 귀에 거슬린 범한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손을 들어 해당의 말을 막았다. 그가 힘없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낭자는 직접 그의 강대함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감이니 용기이니 하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겁니다.”

해당타타가 한숨을 쉬며 타일렀다.

“하지만 이렇게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습니까? 대인과 저희 폐하께서 창주성에서 한 일들을 그 사람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직접 군대를 서쪽으로 보내 그곳에 골칫거리가 될 만한 것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지요. 이어서 강남이나 동이성도…… 아니, 아마 그 사람은 동이성 상황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북벌을 진행할 겁니다. 일단 상황이 그렇게까지 진행된다면 대인은 정말 모든 힘을 잃은 채 한량처럼 경도에 갇혀 있게 되겠지요. 아무 힘도 없이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최정상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가 대인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영혼을 향해 비웃음을 던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할 겁니다. 그 상황에서 대인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는 강남을 건들지 못합니다. 만약 그곳을 건들려 한다면 반드시 저를 건드려야 할 겁니다. 그리고 저를 건든다면 경국 전체에 큰 고통을 불러오겠지요.”

“저는 대인이 황실 금고에 대해 무슨 계획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경제가 자신의 마음속 집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떤 손실로 개의치 않을 사람이라는 건 확실합니다.”

해당타타가 말했다.

이때 서재 어둠 속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 그 잡놈은 애초부터 사람이 아니니 고통이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모를 겁니다.”

어둠 속에서 말한 사람은 그림자였다. 그는 최근 몇 개월 동안 정말 말 그대로 그림자처럼 경도 어둠 속을 떠돌고 있었다. 이어서 또 다른 침착한 목소리가 마치 범한을 설득하고 싶은 듯 말했다.

“자신감과 같은 것에 대해서 저는 잘 알지 못하지만, 만약 반드시 검을 뽑아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저는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 겁니다.”

이 말은 왕 십삼랑이 한 말이었다. 사고검의 마지막 제자인 그는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대동산에서는 깊이를 예측할 수 없는 대종사인 경제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침착한 모습을 보였었다.

범한이 이전에 분석했던 것처럼 황제 폐하나 경국의 가진 가장 큰 약점은 무공이 최정상에 오른 고수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과거 경국의 고수들은 내란 과정에서 하나하나 목숨을 잃은 데다가 지금 천하 9품 고수들 중 거의 대부분은 범한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니 경제도 범한의 세력을 함부로 얕볼 수는 없었다.

만약 늙은 홍 내관이나 진씨 집안 부자나 연소을과 같은 고수들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면, 경국은 지금보다 훨씬 강했을 거였다.

범한은 직접 서재 안에 있는 절대 강자 세 명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는 여러분이 그의 손아귀에서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일은 어쨌거나 제 일입니다.”

* * *

경력 10년 깊은 겨울날 범한은 거센 눈보라가 갇힌 야수처럼 집안에 갇힌 채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우울해했다. 그는 강력한 황제 폐하가 자신이 용의주도하게 세운 계획을 간파해 내고 자신의 수족들을 잘라내는 모습을 두 눈을 뜨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경국 조정이 천하통일이라는 대업을 실현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경제 앞에서 감쪽같이 자신의 원래 모습을 감춰오던 범한은 처음으로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눈앞에 있는 강대한 인물을 쓰러뜨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렸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다. 범한은 기다리는 사람이 언제 돌아올지도, 과연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 채 마냥 기다렸다. 기다릴 시간을 벌기 위해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해야만 했다.

하지만 경국은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평온했다. 포월루가 아주 힘겹게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과거 2 황자의 측근이었고, 지금은 하 대학사의 저택에서 책사로 있는 범무구는 습격을 받아 다친 뒤 행적이 묘연했다. 하지만 하종위는 이 일과 연루되지 않았다. 범한은 약간 실망하면서 마침내 호 대학사는 여우같이 교활해서 이용하기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범한이 더욱 좌절하게 만든 것은 강남에서 마침내 온 소식이었다. 그 소식은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안 좋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지금 시대는 정보 전달 속도가 울화통이 터질 만큼 느렸기에 범한이 소식을 받은 섣달에는 이미 사건이 일어난 지 1달이 지난 뒤였다.

황실 금고 전운사는 황궁의 밀지를 받고 계획에 따라 내년 봄에 공개입찰을 할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황실 금고 공개입찰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만큼의 변화가 생겼다. 바로 이전 가격 경쟁을 했던 방식을 버리고, 이번부터는 조정이 평가 보고서를 검토해 입찰 대상이 정하도록 바뀐 것이었다. 기존에는 높은 금액을 부른 상인이 황실 금고와 거래를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상인들이 조정과 협상을 벌인 뒤 조정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년 황실 금고 공개입찰은 조정이 어느 집안에게 낙찰되었다고 말하면 그 집안이 낙찰되는 식이었다.

그러니 하서비가 이끄는 명씨 집안은 초상전장과 태평전장의 은밀한 지원을 받고 있음에도 계속 이전과 같은 좋은 상황을 유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오히려 범한 쪽 세력으로 알려진 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게 뻔했다.

황실 금고 공개입찰의 규정은 3대 작업장이 건설된 이후 한 번도 변하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다. 과거 섭가나 이후 황실 금고나 어느 쪽도 이 규정을 쉽게 건들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겨울 그런 법칙에 변화가 생겼다. 심지어 이건 너무나도 치욕적인 퇴보였다. 모두가 황제 폐하의 이번 교지가 강남 상업 활동 전체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강남 거상들은 똘똘 뭉쳐 터무니없는 명령에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남 웅씨 집안과 천주 손씨 집안은 침묵을 지켰고, 몇몇 염상 집안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입찰을 받으려 안달이 났다. 모두들 염상 집안 자제들 중 일부가 과거 춘시 사건에 연루되어 작은 범 대인의 손에 죽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