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화 다시 온 겨울 (2)
대륙 중북부에서 예상치 못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경도에 전해졌을 때는 막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올해 경도의 날씨는 예년과는 달리 가을비가 더 자주 내리는 게 하늘에서 가진 수분을 모두 땅에 떨구는 듯했다.
그리고 입동이 되자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 차가운 바람만 불뿐 눈은 내리지 않았다.
감찰원이나 포월루나 변방에서 일어나는 소식까지 재빨리 파악할 수 없었기에 범한은 북쪽에서 일어난 전쟁 상황을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사실에 거의 근접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전두두의 예측과는 달리 전쟁이 발생했을 때 범한은 화를 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어쨌거나 진짜 성인이 아니라 일반 사람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북쪽에 있는 여황제가 자신을 도와주려 한다는 걸 알았기에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화를 낼 수 없었다. 그저 끝없는 우울함을 느낄 뿐이었다.
그의 미간이 우울함이 드린 이유는 아주 복잡했다. 아마도 자신이 북제 황제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상대방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쥐고 있음에도 군왕인 그녀가 자신만의 생각과 방식으로 일을 추진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이번 일에 있고 난 뒤 경도 황궁의 태도가 그의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이었다,
북제 군대가 갑작스럽게 경도 영토를 침입하고 재빨리 퇴각한 것과 이후 전쟁을 준비하는 것같은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인 건 모두 동이성이 받는 압력을 분담하기 위해서였다. 날카로운 식견을 가진 사람들은 쉽게 이 점을 알아챘고, 자연스럽게 이번 일이 범한이 계획한 일이라는 걸 눈치챘다. 비록 이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많지 않아 경국 민간에까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황궁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건 범한이 예상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경국의 핵심 인물들은 범한의 영향력에 놀랐고, 그가 북제 군대가 움직이는 데 협조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놀란 사람 중에는 유씨의 아버지인 유씨 국공도 있었다. 조정에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과 위엄을 가지고 있는 유씨 국공은 그날 밤 범씨 집안 저택에 찾아와 범한과 밤새도록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유씨 국공은 유씨의 친아버지로 범한에게는 집안 어르신이었다. 범한은 몇 년 동안 경도 국공 집안에 항상 공경심을 표시해 왔고, 이에 유씨 국공도 비록 저택을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항상 범한의 편에 섰다. 그래서 유씨 국공의 간곡한 훈계에 범한은 침묵할 뿐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경국 군인 출신인 유씨 국공은 북쪽에서 일어난 전쟁이 범씨 집안과 관계가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알아챘고, 상당히 놀랐다. 다만 파장을 생각해 이 일을 공개적으로 들출 수는 없기에 범한에게 직접 찾아와서 몇 마디 경고를 하고 설득하려 했다.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 유씨 국공까지도 범한의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두려워하고 경계하는데, 황궁에서는 어째서 이리 조용할 수 있을 것일까? 범한은 황제 아버지가 북제의 침입에 분명 놀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북제가 자신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려 하는 모습을 보고도 황제 아버지가 불쾌해하고 의심을 하지 않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물론, 경국 황제 폐하는 원래부터 전쟁을 원하고 있었으니 북제가 갑작스럽게 영토를 침범한 걸로 겁을 내지는 않을 거였다. 하지만 계속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건 뭔가 이상했다.
날씨가 계속 추워지자 경도에도 마침내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동짓달 초부터 동짓날까지 경도 민가에서는 큰 솥에 만두를 쪘고, 각 골목에서는 양을 잡아 파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큰 대로부터 골목 구석까지 양고기를 삶는 냄새로 가득했다.
경도 안에서 오랫동안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었던 화친 왕부가 오늘은 대문을 활짝 열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찾아온 손님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에 떠들썩한 분위기는 나지 않았다. 화친 왕부 밖을 지키고 있는 금군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의 동정을 살폈다. 오늘 금군이 여기서 맡은 임무는 화친 왕부를 지키고 감시하는 것이었다.
1 황자는 황제 폐하의 뜻을 거스르고 경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일은 공개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조정 몇몇 대신들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군대를 이끌고 나가 있는 황자가 황제 폐하의 명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는 건 그야말로 대역무도한 짓이었다. 다만 조정과 이씨 황족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연경 대영이 동이성이 진입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조정은 잠시 침묵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화친 왕부에 대한 감시까지 풀 수는 없었다.
범한이 숙녕이의 작은 손을 잡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화친 왕부로 들어가서는 왕비와 함께 호수 한가운데 있는 정자로 걸어갔다. 한편 임완아는 저택으로 들어가자마자 섭령아를 잡아끌고 갔는데, 둘이서 무슨 말을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작은 범 대인께서는 정말 매번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을 벌이십니다.”
곱게 화장한 화친 왕비는 위엄은 보이지 않고 소탈하고 초연한 모습이었다. 지금 인질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녀는 평상시에는 저택 문을 굳게 잠그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모처럼 찾아온 동짓날이었기에 경도 안에서 자신처럼 난처한 처지에 놓인 젊은이들을 저택으로 초대했다.
범한 부부와 섭령아, 유가 군주, 그리고 화친 왕비와 측비 왕동아까지 경국 황실 사람 중 대부분이 모였다. 깊은 궁에 있는 3 황자를 제외한 이씨 황족의 젊은이들이 모두 왕부에 모인 것이다. 게다가 지금 이들은 하나 같이 난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큰 공주께서 농담을 잘하시는군요.”
범한이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창주성 밖에 일은 저보다 공주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것 아닙니까. 북쪽에 있는 젊은 황제 폐하는 제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왕비가 복잡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황제 아우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이해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로 설득을 했길래 병력까지 동원해 대인을 도운 겁니까?”
“저는 이 일에 대해서는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번 일이 멀리 동이성에 계시는 1 황자 저하에게는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하지요……. 왕비께서 홀로 경도에 계시니 불편한 일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왕비가 살며시 웃으며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지금의 상황이 워낙에 변화무쌍해서 앞일을 확실하게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과거에 한 잘못을 지금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과 지금 앞에 서 있는 젊은 청년은 하나로 묶여 있었고, 거기에는 동이성이 관련되어 있었다.
“연경 대영의 칼날이 동이성을 향하고 있으니, 왕동아의 집안이 무슨 심정일지 모르겠군요.”
범한이 걸으려 하지 않는 숙녕이를 안아주며 왕비에게 말했다. 어린 딸은 어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호기심 가득한 큰 눈을 굴리며 범한과 왕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동아가 제멋대로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일 뿐입니다. 약간 우울해하고 불만스러워할 때마다 섭씨 집안에 보내 놀다 오게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맞다. 동아가 범씨 집안에 찾아가고 싶어 했는데, 대인도 아시다시피 쉽지 않았습니다.”
“이해합니다.”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왕비를 바라보았다.
“왕비가 저택을 지키고 계시니 왕씨 집안 아가씨에게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 안심했습니다.”
“대인이 이전부터 계획해둔 일이 아니십니까……. 그러고 보니 마색색 낭자는 아직 명분도 얻지 못한 채 나이만 많아졌습니다…….”
왕비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지금 멀리 동이성에 있는 1 황자가 조정과 대립을 하고 있어 그녀는 경도에서 인질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외롭고 서글펐다. 하지만 저택 안에는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측비와 직설적이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이민족 여자밖에 없어 마음을 털어놓을 데도 없었다.
범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은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왕비께서도 제가 태상사 정경일 때 한 일들이 모두 폐하의 뜻을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말이 여기까지 이르자 더는 말할 화제가 없었다. 마침 두 사람은 이미 호수에 놓인 나무다리를 건너 정자로 가고 있었다. 정자는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어 햇볕은 들어오고 바람은 막아주는 데다가 안에 난로도 몇 개 있어 봄 날씨처럼 따뜻했다.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정자 구석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여자 네 명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1년에 한 번 오는 동짓날 때마다 범한은 군주의 부마 신분으로 황궁에 초대되어 황태후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맛도 없는 양고기 탕을 먹어야 했었다. 그리고 그 해에 1 황자가 왕부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이 정자에는 황태자를 제외한 이씨 황족의 모든 젊은이들이 모였고, 2 황자도 왔었다.
지금은 황태후도 죽었고, 2 황자도 죽었고, 황태자도 죽었다. 죽어야 할 사람과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모두 죽고 경도에 갇힌 범한과 멀리 동이성에 있는 1 황자, 그리고 황궁에 숨어 있는 3 황자와 다섯 명의 여인들만 남게 되었다.
‘모든 아들들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황제 아버지는 잘 지내고 있을까?’
자기도 모르게 황궁 안에 있는 황제 폐하가 생각난 범한이 정자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겼다.
화로가 오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다만 각자 속으로 어떤 일을 생각하느라 별다른 대화 없이 조용했다. 유가 군주 옆에 앉은 범한은 다정한 오라버니처럼 양고기를 그릇에 담아주며 살뜰히 챙겼다. 정자 안에 여자들 중에서 유가 군주가 가장 연약하고 여렸다. 비록 황궁 안에서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정왕야는 며칠 뒤면 저택으로 돌아올 걸로 보였다. 하지만 유가 군주가 정왕부에서 홀로 외롭게 지낸 몇 달을 생각하면 범한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정자 안에는 여종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들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이런 자리가 약간 어색하고 낯선 왕동아도 푸대접받는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기에 흥미진진해 하는 눈빛을 지으며 대화를 들었다. 범한이 일어나서 정자 구석에 있는 은탄을 들더니 곁눈질로 섭령아에게 따라오라는 표시를 했다.
“왕동아를 많이 아끼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범한이 일어나 섭령아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왕선아(王蟬兒)의 미래가 어떻게 끝이 날지 섭령아처럼 젊은 나이가 과부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섭령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이제 더는 말을 타고 경도 거리를 마음대로 질주하던 천방지축 소녀가 아니었다.
“사부님, 계속 폐하와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범한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으시겠군요……. 하지만 사실 폐하는 제게 관심이 없으시답니다. 며칠 지나면 서쪽에서 소식이 전해올 겁니다. 저를 대신해서 무슨 소식인지, 추밀원이 은밀히 움직이지는 않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정무에 관해서 아버지는 제가 참견하는 걸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저는 손빈아가 아닙니다.”
섭령아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범한을 째려보고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이어서 말했다.
“스승님께서 뭘 하시려는 건지 모르지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