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화 눈꽃에 가려진 진심 (1)
순간 땅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크지 않은 진동이었고, 기세도 놀랄 만큼은 아니었다. 멀리 눈 덮인 언덕에서 검은 선이 그려지더니 점점 창주 방향으로 접근해 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창주성 관병들의 눈에 빼곡하게 모인 검은 선이 보였다. 마치 먹구름처럼 가로로 길게 이어진 검은 선은 곧이어 군대 대열로 바뀌었고, 이윽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들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검과 창을 든 채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북제 사병들이었다. 창주성 관병들은 심지어 자신들의 눈에 북제 사람의 눈썹에 내려앉은 눈송이나 창을 쥔 창백한 손까지 또렷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된 분위기가 순식간에 창주선 전체에 퍼졌다. 이윽고 교관들의 초조한 외침 소리가 들리고, 기령을 든 전령관들이 성벽 십여 곳의 각루에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황실 금고에서 생산한 단안 망원경으로 상황을 살피던 창주 수비 장군이 중얼거렸다.
“북제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성벽 위는 기온이 무척 낮아서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나오는 입김이 안개처럼 그의 얼굴을 가렸다. 수비 장군은 북제 군사들이 왜 갑자기 창주성 밖을 빼곡하게 감싼 것인지 그 이유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수비 장군이 천천히 허리춤에 찬 검집을 쥐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멀리 눈 덮인 언덕 아래서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북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상대방의 진짜 의도가 뭔지를 눈으로 파악해 내려는 것처럼 말이다.
‘설마 정말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려는 것인가?’
수비 장군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일대 맹장 상삼호가 절대 이런 어리석은 상황을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출귀몰한 용병술을 부리는 북제 맹장이라도 늦가을 추운 날씨 속에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경국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이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방법이었다.
‘성을 공격하려는 건가?’
경국 군인들은 이것 역시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창주성 밖에 등장한 북제 대군의 기세는 엄청났고, 수는 대략 4만 명 정도였지만, 야전군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성을 공격하는 데 사용한 공성 무기가 없었으니 창주성을 공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창주성 안에는 족히 2만 명의 정예병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 * *
“장군, 북제 사람이 이미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창주 수비 장군 옆으로 다가가 말하는 교관의 눈썹이 위아래로 두 번 씰룩였다. 사실 창주 지역 군인들은 모두 부글부글 끓는 분노를 애써 참고 있었다. 두 눈을 뜨고 북제 군대가 영토 안으로 들어오는 데도 정북 진영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으니 말이다. 이건 경국이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굴욕이었다.
창주 수비 장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틀 동안 이어진 일련의 사태가 거만하고 혈기 왕성한 경국 고위 장군들의 분노를 자극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상삼호라는 걸 잊지 않았다. 더욱이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불어 닥치는 눈발처럼 북제 군대가 아무런 징조 없이 대대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사실에 수비 장군은 더욱 경계했다. 그는 도무지 북제 사람들이 뭘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남침을 한 북제 군대는 세 길로 나뉘어 아주 빠른 속도로 양국 사이의 국경선을 돌파해 경국 정북 진영이 통제하는 범위 안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북제 사람들이 20년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과감한 군사 행동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때 감찰원 4처는 물론이고 군대가 자체적으로 보유한 정보 체계에도 조금의 이상 징후도 포착해 내지 못했다.
북제 10만 대군이 막무가내로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모습은 위풍당당했지만, 곧장 돌격해 공격하거나 하는 군사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상삼호는 무슨 목적을 위해서 양국의 평화를 완전히 깨뜨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행동을 한 것일까?
창주성 안에는 2만 명의 수비군이 있었고, 강력한 힘을 가진 정북 진영은 창주를 중심으로 4개의 군영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성에서 멀리 보이는 기세등등한 4만 명의 북제 군대를 바라보는 수비 장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병력을 나누어 경국 영토 안까지 깊숙이 들어오다니. 정북 진영 네 곳에서 군대를 동원해 포위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은 것인가?’
깊은 가을이라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추워졌다. 북제 군대가 경국 영토 안까지 깊숙이 들어왔으니 후방 보급에 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창주성에서 성문을 굳게 잠근 채 상삼호에게 공격을 유도하고, 동시에 정북 진영 4개의 군영에서 조심스럽게 창주성 앞에 있는 북제 군대를 포위한다면, 4만 명의 북제 군대는 퇴로를 잃고 이곳에 갇히게 될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상삼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북제는 이 무모한 침입으로 어떤 이점도 얻을 수 없을 거였다. 도대체 상삼호는 무슨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 엄청난 군량미와 힘을 소모하면서까지 영토를 침범한 것일까?
창주 수비 장군이 인상을 잔뜩 구기고는 성 밖을 주시했다. 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북제 사람들이 막사를 세우고 주둔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비 장군은 너무 깊이 생각에 빠져서 부하 고위 장군들이 옆에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 *
5일째 되는 날이었다. 북제가 20년 만에 가장 큰 군사 행동을 일으켰지만, 예상외로 경국의 군대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대응을 자제했다. 창주 수비 장군은 성을 굳게 잠그고 나오지 않았고, 정북 진영의 각 군영에서는 전투태세를 갖춘 뒤 상황을 주시했다. 북제의 군대가 자신의 국토 안에 있는 걸 뻔히 보면서도 과격한 반응은 하지 않았다.
이것은 거만하고 혈기 왕성한 경국 군대의 모습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이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경국 영토 안으로 침입한 북제 군대였다. 경국 군대와 언제든지 피가 사방에 뿌려지고 이곳저곳에서 탄내가 진동하는 싸움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고 준비한 북제 군대는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북제 군대는 이번에 양국의 국경에서 60리 정도 떨어진 작은 성안에 군사 행동의 본거지를 세웠다. 북제 군대가 빼앗은 성안에 위치한 민가 안에서 난로가 이글이글 열기를 뿜언 냈고, 안에 공기는 밖과는 다르게 봄처럼 따뜻했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북제 고위 장군들은 난로 주변에서 불을 쬐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긴 탁자에 둘러서서 근심 가득한 얼굴로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남쪽 군사 지도를 바라보았다. 이들이 가끔씩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상삼호는 등받이 의자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건지 아니면 살짝 잠이 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갑자기 그가 두 눈을 천천히 뜨며 물었다.
“세 길을 통해 경국 영토 안으로 진입한 지도 이미 5일이 되었네. 창주 쪽에서는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건가?”
북제 제일 명장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낮고 힘이 있었다.
“대원수, 그렇습니다. 창주성에서 여전히 문을 굳게 잠근 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고위 장군 중 한 명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대원수의 군령에 따라 세 길로 진입한 군대 중에서 창주 쪽을 제외한 군대는 깊이 진입하지 않았습니다.”
“예상외로 경국의 인내심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군.”
상삼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나 긴 탁자 옆으로 걸어왔다. 그가 지도 위 어느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경국 사람들은 거만하고 뽐내기를 좋아하지. 게다가 지금 상황은 속임수를 쓸 수도 없는 상황이야. 그러니 창주 수비 장군은 기껏해야 앞으로 2일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경도의 뜻이 도착하면 반드시 나와서 싸워야 할 테니까……. 경국 조정은 영토를 침입한 적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싸우지 않았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거다.”
“만약 저들이 계속 성문을 걸어 잠근 채 나오지 않으며 어떻게 합니까?”
상삼호의 심복 고위 장군이 걱정하는 말투로 물었다.
“저희가 이번 일에 전력을 쏟지 않았습니까. 만약 앞으로 2일 동안 창주성에서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채 정북 진영 4곳의 군영에서 저희의 다른 두 곳의 상황을 파악해 직접 포위를 시작한다면 저희는 대응도 못 하고…… 속수무책으로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될 겁니다.”
북제 군대의 갑작스러운 군사 행동을 정북 진영의 고위 장군들만 예측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이번 출병은 북제 사람들까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출병이었다. 게다가 추위가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에서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적국의 영토 안에 깊숙이 침입한다는 건 무척이나 무모한 행동이었다. 물론 이번 일은 진짜 공격을 위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군인으로서 실질적인 전과는 거두어야 했다. 수천 심지어는 수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상대방의 영토 안에서 위세를 잠시 뽐내는 걸로 끝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북제 안에서도 군대가 갑자기 경국 영토를 침입한 진짜 이유를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아마도 북제 상경성 황궁 안에 있는 황제 폐하와 지금 침묵하고 있는 상삼호 대장뿐일 거였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누가 감히 이 두 사람에게 이유를 물을 수 있겠는가?
“몇 년 동안 우리가 수세에 몰려 있었던 건 사실이나 자네들이 경국 군대를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하네.”
상삼호가 침착하게 손바닥을 지도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경국 정북 진영은 창주를 기반으로 하고 있네. 하지만 5일이 지나도록 정북 진영 4곳의 군영에서 어떠한 원조도 오지 않았어. 그것은 정북 진영에서 우리의 다른 두 경로에 있는 군대를 경계하느라 과감한 행동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정북 진영 안에 상황을 제빨리 판단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핵심 인물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상삼호가 재미있다는 듯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경국은 장비와 군력면에서 우리 북제보다 훨씬 뛰어나네. 게다가 만약…… 연소을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5일 전에 이미 다른 두 곳은 버리고 창주성 앞에 있는 4만 명의 북제 군을 포위하라고 명령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 정북 진영에는 이런 과감한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네.”
“연소을이 죽고 나서 온 사비 장군은 연 대도독만큼 뛰어나지는 않지만 절대 얕볼 수 없는 인물이었지. 하지만 경국 황제가 자기 주변을 안심하지 못해 그를 경도로 불러들여 수비사를 맡겼지 않은가.”
상삼호가 냉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과거 정북 진영이 반란에 참여한 일 때문에 경제의 의심이 많아진 상황이니 지금 정북 대영을 책임지고 있는 장군은 연소을만큼 과감하게 행동하지 못할 거네. 그렇지 않은가?”
“몇 년 동안 경국은 국력을 모으고 우리 북제를 공격하려고 준비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사실은 스스로 국력을 손상하고 있었네. 더욱이 정북 진영은…… 경제는 대단한 인물이지만, 그의 밑에 있는 뛰어난 인물들은 하나하나 연달아 죽어 나갔지.”
상삼호가 재미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탄식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10만 대군이 영토를 침범한들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는 건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이자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선택이지만 우리에게는 최악의 선택이네……. 다만 창주 수비 장군이 얼마나 영리한들 공격하고 싶어 하는 정북 진영의 욕망을 오래 억누르지는 못할 거야.”
“그래서 2일 뒤에는 상황이 달라질 거라는 거네.”
상삼호가 말을 멈추고는 방을 나갔다. 방 안에 남아 있는 고위 장군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건물 밖에서는 눈보라가 일어 크지 않은 눈송이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사람들의 얼굴을 덮쳤다. 상삼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성안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군사와 부지런한 관리들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순간 아주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그는 상경성 황궁 안에 있는 황제 폐하를 떠올렸다. 며칠 전 황제 폐하는 급히 그를 불러서는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군대를 출병시켜 동이성이 안정될 수 있게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북제 군대의 칼날은 정북 대영을 향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연경성에 있는 연경 대영의 지원을 끌어내서 동이성이 받는 압박을 잠시나마 줄여주는 것이었다. 상삼호가 눈동자를 차갑게 번뜩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남쪽에 있는 그 권신과 경제의 사이가 틀어지기 위해서 북제가 이렇게 많은 대가를 치를 필요가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