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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10화 (1,010/1,108)

1010화 북쪽에서 일어난 변수 (2)

이 관도는 우두산 부근을 거쳐 황금색과 붉은색으로 물든 가을 산을 통과해 동해 해변 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 길을 따라서 가기만 하면 대군은 곧장 동이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까맣게 모인 군대가 이곳에 집결했다. 깃발은 바람에 따라 펄럭였고, 가벼운 갑옷으로 무장한 기병들은 살기 등등한 모습이었다. 여기 모인 군대의 숫자는 이미 만 명을 넘었고, 기세도 하늘을 찌를 듯이 맹렬했다.

하지만 맹렬한 기세로 행진하던 경국 변방군은 우두산 아래서 단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산 아래 관도 입구에 검은색 갑옷을 입은 기병이 세 줄로 서서 이들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세줄, 총 백여 명에 불과한 흑기였지만,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음산한 살기를 내뿜으며 관도 정 중앙을 막고 서 있었다. 그리고 양쪽에 완만하게 비탈진 산허리에는 짙은 검은색 줄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들 또한 흑기였다.

연경 대도독 왕지곤은 황제 폐하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희생을 각오하고 1만 명의 변방군을 파견했다. 물론 대도독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지는 않았고, 군대를 이끄는 심복이 고위 장군의 손에 밀령도 전해주었다.

멀리 관도에 서 있는 검은 기병을 바라본 고위 장군은 순간 마음에 한기가 들었다. 경국 군대는 감찰원 6처 흑기의 명성을 오래 들어 왔고, 또 오래 질투해왔다. 흑기는 가장 좋은 장비와 가장 좋은 전투마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무장한 경갑은 전부 황실 금고 3대 작업장에서 제작한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흑기는 금칠을 해서 만든 최상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군대 내부에는 항상 흑기의 병력은 천 명을 넘지 않으며, 만일 천명을 넘게 된다면 대적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이 돌았다. 이런 말이 생긴 이유는 수십 년 동안 몇 차례 협력을 통해서 경국 고위 장군들이 흑기의 위력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데다가, 경국 법률과 제도가 흑기의 숫자를 천명 이하로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흑기의 위력을 직접 본 적이 없는 고위 장군들은 이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천하에서 경국 정예병의 명성도 대단했으니 말이다. 정주의 기병이나 정북 진영의 궁수들이나 모두 상당히 유명했기에 감찰원의 부속 기병의 위력을 살짝 얕잡아보았다.

하지만 3년 전 경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범한은 5백 명의 흑기를 이끌고 경도 안으로 잠입했고, 정양문 아래서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그곳에서 흑기는 마치 저승에서 온 살신 같았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흑기가 반란군 기병 대열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심지어 반란군은 진씨 집안의 정예병이었다. 게다가 진항은 흑기의 공격이 목숨을 잃었다. 이와 같은 명백한 사실로 인해서 경국 군대는 흑기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고, 더는 상대를 얕잡아보지 않았다. 심지어 경국 군대는 겉으로는 절대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흑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던 연경 고위 장군의 눈에 흑기들 앞에 홀로 서 있는 말 한 마리가 보였다. 은색 가면을 쓴 모습에 고위 장군은 곧장 상대방의 신분을 알아챘다. 바로 감찰원 6처 흑기 통령인 은색 가면 형과였다.

연경 고위 장군이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왜냐하면 맞은편에 있는 흑기 통령이 바로 진항을 죽인 맹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연경 고위 장군이 친위병 몇 명을 이끌고 흑기 방어선 가까이 다가갔다.

“형 통령.”

연경 고위 장군이 부하에게 추밀원 병력 이동 명령서를 건네라고 명령하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쪽이 길을 양보해 주시지요.”

형과가 아무 말 없이 추밀원 명령서를 받아 살펴보고는 입을 열었다.

“저희는 감찰원 관할이라 지금껏 추밀원 명령서는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명령에 따르지 않는 걸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 황자가 이끄는 1만 정예병은 사실 우두산에서 멀지 않은 송나라 경내에 주둔해 있었다. 다만 조정의 명령으로 이동하는 병력을 1 황자가 직접 나서서 저지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흑기에게 임무를 맡긴 것이었다.

형과의 얼굴에 쓴 은색 가면에 차가운 빛을 번쩍였다. 앞에 빼곡하게 모여 있는 연경 군대를 보며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동이성을 수비하며 관련 없는 자들은 들이지 말고, 만약 누구든 함부로 들어오려 한다면……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형과가 정중한 말투로 한 말의 의미는 너무나도 분명해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동이성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니? 누가 명령을 내렸다는 걸까? 범한의 명령을 받은 걸까? 하지만 범한은 이제 더는 감찰원 원장이 아니었으니 흑기에게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게다가 흑기가 감찰원의 지시만 받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궤변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언빙운이 감찰원 관리를 보내서 흑기에게 병력을 이동하라 명령한다고 해도 흑기는 감찰원 관리의 목을 베고 명령서를 불태워 버릴 테니 말이다.

이 말에 연경 고위 장군은 겁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그가 납득할 수 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이건 조정의 뜻입니다. 설마 조정의 뜻을 거스르려는 겁니까?”

해야 할 대화를 마친 형과는 그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은 채 경고를 던졌다.

“길을 돌아서 동이성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과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그가 말고삐를 잡아당겨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흑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말을 돌리자 그의 안장 옆에 꽂혀 있는 창에서 차가운 빛이 번쩍였다.

연경 고위 장군이 숨을 깊이 들이마셔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분노를 억눌렀다. 눈동자를 굴려 바로 앞에 있는 흑기 기병들을 살펴보던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장비가 자신보다 좋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흑기 한 명이 가진 전투력이나 전투마의 능력 모두 연경 대영 고위 장군들보다 우위였다…….

겨우 1천 명에 불과했지만, 전부가 사람의 목을 풀을 베듯이 벨 수 있는 사신들이었다. 유혈 사태를 최소한으로 하면서 1천 명의 사신을 상대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 * *

연경 대영과 흑기의 대치를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자 대도독이 변수가 일어날 기한으로 정한 5일 중 마지막 날이었다. 이날 양측에 우연히 작은 충돌이 발생하면서, 연경 대영에서는 전의와 분노가 불타오르게 되었다. 반면 흑기 쪽은 비록 인원은 적었지만, 여전히 흥분하지 않고 차갑게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싸울 것처럼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자 왕 대도독은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으니 흑기와 싸움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폐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5일 동안 기다렸으면, 범한과 1 황자에게 대응할 시간을 이미 충분히 준 셈이었다. 이대로 연경 쪽에서 대치 상황을 계속 이어가며 동이성이 진입하지 못한다면 경도에 있는 황제 폐하가 분노할 수도 있었다.

왕지곤은 우두산 부근에 억지로 진입해 흑기와 결전을 치를 준비를 하라는 군령을 발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손에 군보를 든 고위 장군 한 명이 긴장한 얼굴로 대도독 저택에 뛰어 들어왔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전보에 적힌 내용을 읽던 왕지곤은 마음속에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범한이 정말 경국 북쪽 상황을 변화시킬 변수를 만들어 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 변수는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왕지곤의 군대는 이제 철수할 수 있게 되었다. 폐하의 뜻을 거역하지도 않고 자신의 관할 범위 안에서 내전이 일어나는 상황도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원하던 상황이 이뤄졌음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왕지군의 눈동자는 기쁨이 아니라 근심으로 가득했다.

군보는 창주 정북 진영에서 온 것이었다. 군보에는 북제 상경성에서 한가롭게 노년을 보내고 있던 상삼호가 갑자기 병력을 이끌고 국경선을 침입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상삼호가 이끄는 10만 정예병은 경국 국경선 안으로 침범한 것도 모자라 창주 이북 70리 토지를 점령했다.

* * *

짙은 가을날 북쪽에서 일어난 바람이 차가운 공기를 타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불어왔다. 차가운 바람은 황량한 북부 대지를 스쳐 몇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는 북해 대호를 지나 창주 북쪽에 이르렀다. 창주 지역은 경국의 최북단으로 북제와 거리가 가장 가까운 성지였다. 만약 단순히 환경에서만 본다면 상경성 동남쪽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년 차가운 바람이 하늘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기에 창주는 상경성보다 훨씬 날씨가 추웠다.

창주 주변 가을 나무들은 이미 잎사귀가 모두 떨어진 상태였고, 성 주변 밭들은 늦여름에만 수확을 하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것도 심겨 있지 않은 채 서리만 깔려 있었다.

이미 몇 차례 눈이 내려 경국 둔전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산등성이에도 하얀 눈이 덮여 있었고, 주변에는 적막하고 스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더욱이 설원에는 어렴풋하게 여러 검은 점들과 눈발에 휘날리는 북제군의 깃발을 볼 수 있었다.

창주성의 고위 장군이 눈을 찌푸리며 그쪽을 바라봤다. 척후병에게 이미 소식을 보고 받은 상태였다. 이번에 남침을 한 북제 군대들은 하늘을 가리고 땅을 덮을 정도로 수가 많아서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북제가 남쪽에 주둔해 있던 병력을 전부 동원한 것 같았다.

북제 사람이 국경선을 넘어 왔다. 하지만 창주성 수비군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비록 적의 세력이 대단하기는 했지만, 창주성 수비군은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20년 동안 양측은 이미 무수히 많은 싸움을 벌여왔고, 북제 사람들은 지금껏 한 번도 이익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에 원래 북문 천관을 지키고 있던 북제의 맹장 상삼호를 북제 황제가 남쪽으로 보냈지만, 경국 군대의 삼엄한 수비망을 뚫을 수는 없었다.

창주 고위 장군이 유일하게 걱정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상삼호라 불리는 남자였다. 20년 전부터 경제가 직접 병력을 이끌지 않게 된 뒤 천하에서 군신이라 불릴 인물은 상삼호 대장뿐이었다. 이것은 상삼호가 북부 이민족들과 여러 해 혈전을 계속한 끝에 얻어낸 명성이었다.

몇 년 동안 북제 군대의 사기나 장비가 경국 군대보다 훨씬 떨어지는데도 창주 일대에서 균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상삼호라 불리는 사람 때문이었다.

신출귀몰한 용병술을 부리고 적은 허점을 포착해 돌격하는 기술이 뛰어난 상삼호는 지금껏 전력을 다한 적이 없었음에도 경국 두 로의 변방군의 힘을 이곳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몇 년 동안 지속된 작은 충돌과 마찰은 양쪽이 국경 방어를 삼엄하게 하도록 만들었지만, 진정으로 큰 군사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국 군대는 전쟁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양식을 충분히 모으고 무기가 갖추어지면 황제 폐하가 마지막으로 군대 출동 명령을 내릴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경국 선봉 군대는 황제 폐하가 조정을 안정적으로 수습하기를 기다릴 뿐 자신들이 공격하기 전에 북제가 먼저 공격해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상삼호 대장은 매년 상경성으로 불려가면 그곳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런데 올해는 어째서 갑자기 남쪽 국경선으로 내려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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