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1008화 (1,008/1,108)

1008화 경도에서 한량으로 사는 법 (3)

“대인께서는 제가 법률을 위반하게 하고 싶으신 겁니까?”

범한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하종위의 검은 얼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도 하나 알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제가 지금 거리에서 조정 관리를 때려 눕히면 저를 체포할 수나 있으십니까?”

이 말이 나오자 하종위 곁에 있던 관리들은 비로소 범한의 위력은 관직이나 권력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관리들이 놀라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하종위는 여전히 침착하게 범한의 앞에 서서 한숨을 쉬었다. 범한의 이런 말을 한 이유를 알고 있는 그는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겼다. 관직과 관력에서 그는 범한을 이길 수는 있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랄한 짓을 하는 면에 있어서 그는 범한을 영원히 이길 수 없었다. 그는 범한처럼 거만하게 미쳐 날뛸 수 없었다.

“기생을 능멸했다는 혐의를 받는 소주 지주 성가림이 경도로 와서 자기 변론을 하고 있으니 아마 며칠 뒤에 대리사로 오게 될 겁니다.”

하종위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도에서 가장 부유한 한량이신 분께서 한가롭게 지내시지는 못하시겠습니다.”

범한이 눈꺼풀을 살짝 내리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황제 폐하의 개 노릇이나 하는 대인께서는 이곳저곳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겠지만, 저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미워도 상대방의 체면은 봐주어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지금껏 단 한 번도 하종위의 체면을 봐준 적이 없었다. 과거 하종위의 얼굴을 때렸던 범한은 오늘 관아 대문 앞에서 하종위를 황제의 개라고 욕하며 다시 한번 창피를 줬다. 지금 하종위는 이전의 변변치 않은 어사가 아니라 조정 1등 대신이었다.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창피를 당한 하종위가 검은 얼굴이 붉히며 버럭 화를 냈다.

“대신이 폐하의 개가 되는 건 당연한 겁니다. 본관이 보기에 범 공자도 폐하의 개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의 체면도 세우면서 범한의 반격도 막을 수 있는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하며 하종위가 속으로 흡족해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범한이 갑자기 박장대소를 하면서 물었다.

“제가 개라면 폐하는 뭐란 말입니까?”

범한이 하종위를 가리키며 한참을 웃다가 몸을 돌려 마차에 올랐다.

자신이 실언했다는 걸 깨달은 하종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제야 범한이 대리사 관리들의 결정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범한은 모든 관직과 권력을 잃었어도…… 여전히 황제 폐하의 아들이었다. 이 점만으로도 천하 백성 누구도 그와 맞설 수 없었던 것이다. 순간 마음이 울적해진 하종위가 속으로 인생은 항상 이렇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 * *

경도 안에서 범한은 전혀 한가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 폐하가 연달아 날리는 주먹을 가까스로 막기에도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반격을 할 힘이나 여력도 없었다. 그와 황제 아버지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할 큰 싸움은 이제 시작되고 있었다. 이 싸움은 관중도 없고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겠지만, 정말이지 중요한 싸움이었다. 왜냐하면 여기서 범한은 충분한 실력을 발휘해 황제 아버지가 놓는 바둑돌에 가장 단호한 반격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량로 정주성 안에서 이홍성과 직무를 인계받으러 온 궁전 사이에 어떤 갈등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편 경국과 동이성을 연결하는 도로에서는 양쪽의 대열이 서로 대치하고 서서 서로 조금도 양보를 하려 하지 않고 있었다. 겨울 훈련을 한다는 핑계로 이동한 연경 대영 3천 명의 관병들은 국경선 앞에서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대치는 벌써 3일째 이어지고 있었다.

“폐하의 뜻에 따라 저희가 동이성에 들어가 1 황자 저하가 난리를 평정하시는 걸 도우려 했으나 1 황자께서 직접 군령을 내려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1만 정예병으로 충분히 진압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연경 대영 주사 왕지곤이 막사 안에 있는 측근들을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1만 정예병으로 작은 소량국의 반란을 평정하는 거야 쉽겠지. 하지만 경국 병사들이 동이성으로 진입하는 걸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왕지곤은 결국 분노가 폭발해 투덜거렸다. 이번 일은 사실 조정에서 동이성 쪽의 상황을 탐문하기 위한 것인 만큼 모든 건 계획에 따라 진행되어야 했다. 만약 갑작스럽게 길이 막히지 않았다면, 정예병 3천 명이 선봉으로 나서고, 이후 연경 대영 2만 명의 병력이 준비된 길을 따라 진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예상치도 못하게 선봉으로 나선 3천 명의 정예병이 국경선에 가로 막혀서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왕지곤이 아래 장군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천명이다! 겨우 천명을 보고 놀라서 겁을 먹은 것이냐? 상대방도 우리 경국의 군사인데, 그들이 정말 조정에서 보낸 우리 군대에 공격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냐?”

“길을 막고 있는 건 흑기입니다.”

장군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평평이 죽은 뒤 작은 범 대인은 경도에 갇혀 있는 상황이니 흑기가 정말 마음먹고…… 칼을 뽑아 공격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왕지곤의 눈꼬리가 부르르 떨렸지만 더는 화를 내지 않았다. 이번에 암암리에 군대를 움직인 건 명의상 추밀원에서 겨울 훈련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지만, 사실 그는 황궁에서 전해진 황제 폐하의 밀지를 받은 상태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건 탐문에 불과했다. 용상에 앉아 있는 황제 폐하는 멀리 동이성에 있는 첫째 아들을 탐문하고 싶어 했다.

경도에서 큰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이미 연경성 안에도 전해졌기에 왕지곤은 비로소 그날 소공야가 흑기들을 이끌고 경도로 달려온 이유가 진 원장을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연경 대원수인 그는 진 원장이 무엇 때문에 갑자기 황제 폐하에게 숙청을 당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 역시 진 평평의 죽음이 안타까웠지만, 경국의 군인으로서 그는 반드시 황제 폐하의 뜻을 따라야만 했다.

경도에서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뒤 1 황자는 갑자기 군사 보고를 발송해 동이성 안에 의군 일어나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어 도저히 자리를 비우고 경도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고했다. 그리고는 경도에서 그를 부를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차단해버렸다.

이에 왕지곤은 1 황자가 경도로 돌아오기 싫어서…… 일부러 황제의 명을 받지 않는 거라고 확신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1만 명의 정예병을 성공적으로 통제한 1 황자가 경도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황제 폐하에게 마음이 떠나버렸다는 의미였다.

1 황자의 이런 태도에도 황제 폐하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하게 교지를 동이성에 보냈고, 1 황자를 도와 동이성 반란을 평정하라는 핑계로 연경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자 1 황자는 왕지곤이 예상했던 데로 연경 대영에서 파견한 군대의 요구를 강력하게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틀 동안 연경군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다. 하지만 길을 막은 게 1 황자 사람이 아니니 조정에서 죄를 묻기도 어려웠다.

“흑기라…….”

왕지곤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숫자는 많지 않지만, 흑기는 경국에서도 손꼽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기병이었다. 길을 막고 있는 흑기를 떠올리던 그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경도에서 할 일 없이 한가롭게 있는 그 사람이 떠올랐다.

* **

‘반드시 가야 한다.’

왕지곤은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그저 막사 안에 있는 장군들을 차갑게 노려본 뒤 책상을 치며 소리쳤다.

“본 도독은 흑기든 뭐든 신경 쓰지 않네. 내가 신경 쓰는 건 추밀원에서 겨울 훈련 지령을 내린 이상 연경 대영의 3천 명의 기병은 동이성에 들어가야 하며, 누구도 그걸 막아서는 안 된다는 거네!”

연경 대영의 3천 명의 정예병은 탐색을 위한 선봉 부대에 불과했다. 이를 통해 조정은 한 걸음씩 1 황자를 압박하며 태도를 밝히라 강요할 거였다. 부릅뜬 왕지곤의 눈동자에서 차가운 한기가 점점 짙어졌고, 목소리에도 위엄이 가득했다.

“뭐라 말하든 1 황자 저하께서 이끄는 1만 명의 군대는 우리 경국의 백성들이네. 그러니 1 황자 저하께서도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혐의를 받을 위험까지 무릅쓰며 군대를 막지는 못할 것이네. 지금 문제는 우두산 일대에 포진해 있는 1천 명의 흑기들이야. 나중에 다시 추밀원에서 이동 명령을 내렸는데도 길을 비키려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들이 더는 우리 경국의 군대가 아니라는 의미겠지.”

“하지만…… 폐하께서 작은 범 대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가 확실치 않습니다.”

한 장군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연경 대영 군사들이 흑기와 싸우게 된다면 공개적으로 범한 쪽 세력과 갈등이 생기게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경도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흘러가서 연경성 안에 장군들은 황궁에 있는 그분이 범한을 어떻게 처리하고 싶어 하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만약 단순하게 끝날 냉전 상황인데 연경 대영이 그 사실을 모르게 섣불리 병력을 움직여 흑기와 싸움을 벌인다면, 수습할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달을 수 있었다.

연경성 안에 있는 막사는 사실 군대 색채가 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을 뿐 막사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아주 넓은 방 안 이었다. 이때 방 안에 있는 장군들은 왕지곤이 솔직하게 모든 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심복들이었다.

앞에 장군이 말한 걱정을 사실 왕지곤도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가 범한의 모든 관직을 박탈했지만, 진짜 죄를 묻지는 않았다. 그러니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연경성 밖 우두산에서 저승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1천 명의 흑기들은 분명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왕지곤은 20년 동안 군대를 이끈 장수였고, 연경 대영에는 10만 명의 정예병이 있었다. 단순히 사람 수와 장비만 비교해 놓고 본다면 연경 대영은 경국 5로의 군대들 중 최고라 할 만했으니, 1천 명의 흑기가 세운 봉쇄선을 뚫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연경 대영에서 모든 병력을 투입할 수 없다는 거였다. 지금 동이성은 명목적으로는 경국에 귀속되어 있었고, 게다가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전면전을 한다면 경국에서 첫 번째 내전이 터질 수 있었다.

이런 역사적 책임을 왕지곤은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이미 군대 안에서 최고 지위에 올라 있었다. 그러니 전장에서 공로를 더 쌓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섭중 대원수처럼 경도에서 추밀원 정사가 될 뿐이었다. 물론 추밀원 정사는 명예로운 일이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좋은 점은 별로 없었고 이에 연경 대도독으로서는 인생을 걸로 노력해볼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일을 결정하면서 자신의 가족과 심복들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했고, 미래의 상황을 고려해야 했다. 지금 황제 폐하는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이었지만, 점점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만일 지금 그가 흑기를 공격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은 수세에 몰려 있지만, 이번 위기를 잘 견디고 범한이 다시 힘을 모은다면…… 아니 범한이 다시 힘을 모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3 황자가 용상에 오른다면 왕지곤과 연경 대영은 어떻게 되겠는가? 범한과 사이가 돈독한 3 황자는 절대 그와 연경 대영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였다.

왕지곤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군대를 이끄는 대원수인 그는 전장에서 유리한 전략을 세우는 데 정통했지만, 세밀한 동정까지 살피기는 어려웠다. 그는 경도에서 수녀를 선발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황제 폐하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그가 인상을 펴고는 결정을 내렸다.

“다시 움직였는데, 막는다면 상대방의 무기를 몰수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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