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7화 경도에서 한량으로 사는 법 (2)
“궁전은 이미 정주에 도착했을 겁니다.”
석청아가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이 말했다.
범한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 아버지의 반응이 이렇게까지 신속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더구나 금군 대통령을 직접 보내서 정주를 진압하려 하는 것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비록 정왕세자 이홍성이 정주에서 수년간 군대를 이끌고 있기는 했지만, 기반이 약했다. 반면 궁전은 정주 출신이었고, 경력도 오래되고 쌓은 공적도 훨씬 많았다. 그러니 이홍성은 어쩔 수 없이 조정의 부름에 따라 경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홍성을 정주에 남겨둘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가 가진 힘을 이용해 서량로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을 거였다.
범한은 모든 일이 이미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이제 기다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초원으로 보내는 사람이 되도록 빨리 호가와 연락을 취해 초원의 이민족들이 예전과는 달리 초겨울에 공격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리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처럼 복잡한 일을 추진하고 있었기에 범한은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전혀 한가롭지 못했다. 그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석청아를 향해 물었다.
“공부의 비리 사건은 어떻게 되었는가?”
“양 대인의…….”
석청아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범한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죄는 어제 이미 확정이 되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대리사에서 판결이 나올 거라 합니다.”
석청아는 이전에 2 황자의 사람이었지만 몇 년 동안 범한의 밑에서 일하면서 이제 더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게 되었다. 더욱이 기생 출신인 그녀는 눈앞에 있는 젊은 청년이 경도 안에 있는 다른 귀족집 자제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제2의 상문이 되고 싶었지, 제2의 원몽이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작은 범 대인이 가진 힘과 권력이 조정에 의해서 갈기갈기 찢기는 모습을 보자 그녀는 약간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범한이 호수에 비친 햇살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오후라. 그럼 내가 가서 그를 만나봐야겠군.”
* * *
공부 하도사 원외랑 양만리의 비리 사건은 고발이 되고 나서 형부에서 대리사로 사건이 이전되기까지 겨우 십여 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와 같은 빠른 사건 진행은 경국 역사에서 좀처럼 없는 일이었기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에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패한 관리들을 정리하겠다는 폐하의 뜻이 경력 10년에 갑자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내막을 아는 관료 사회 사람들은 지금 상황을 보면서 남몰래 탄식하고 두려워했다. 이들은 양만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양만리는 과거 2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해서 큰강 제방을 쌓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유능하고 청렴한 관리였다.
범문사자 중 한 명인 양만리는 작은 범 대인이 남몰래 마련한 은전이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하운총독 관아를 거쳐서 큰강 제방을 쌓는 데 투입되도록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큰강 제방을 쌓는 데 투입된 범한의 거금은 전부 그의 손을 거쳐 갔다. 그러니 양만리가 정말 탐욕스러운 관리라면 몇천 냥이나 되는 은전이…… 자신의 손을 거쳐 가는 데도 어째서 먹지 않았겠는가? 그가 정말 탐욕스러운 관리라면 눈앞에 있는 거금은 그대로 둔 채 공부 관아에서 받는 자잘한 뇌물에만 욕심을 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더욱이 관리들이라면 누구나 범한이 자신 아래 사람들을 엄격하게 관리하면서 후하게 대접해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찰원 관리들은 조정 관리들보다 몇 배는 많은 봉록을 받고 있었고, 경국 각지에서 재직하고 있는 세 명의 제자들도 매년 범씨 집안에서 몇천 냥에 달하는 은전을 지원받고 있었다. 천하 모두가 알고 있듯이 범씨 집안은 천하에서 제일가는 재력가인데, 양만리가 뭐가 아쉬워서 비리를 저지르겠는가?
하지만 이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관리들은 또 양만리가 재판을 받는 게 황궁의 뜻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문하중서 하 대학사의 지휘 아래 심리 과정은 아주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오늘 대리사에서 판결을 내릴 예정이었다. 대리사 안에서 들리는 소식은 결코 좋지 않았다. 만약 호 대학사가 양만리의 무고함과 재능을 생각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사건에 개입하려 한다면, 양만리는 더없이 참혹한 말로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대리사 관아 앞에 홀로 외로이 서서 판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리사 대청 밖을 지키고 있던 아역들은 범한의 등장을 알아채고는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안에 있는 대인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범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행이었던 점은 범한이 함부로 날뛰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양만리가 안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대리사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감찰원 1처 관리들은 원장 대인을 보고는 관아 앞에 나와 애써 흥분을 감추며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다.
1처는 범한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과거 범한은 기풍 바로 잡기 운동을 통해서 1처에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많이 만들어내었다. 그렇기에 그날 사형장에서 소란이 일어났을 때 1처 관리들은 범한이 성을 나갈 수 있도록 호송했던 거였다. 비록 지금 목철이 감찰원에서 쫓겨났지만, 몇몇 관리들은 여전히 범한을 원장이라 생각했고 언빙운의 사람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다만 경국 법률과 감찰원 조례가 엄격했기 때문에 관리들은 멀리서 범한이 외로이 서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속으로 응원할 뿐이었다.
범한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감찰원 관리들을 보지 않았다. 대리사 대문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 안심하는 미소가 지어졌다.
대리사 안에서 위풍당당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얼마 뒤 이전에 감찰원에서 소송대리인으로 일했으며, 경도 부유한 주둥이라는 별명을 가진 송세인이 대리사 대문을 조용히 걸어 나왔다. 하지만 송세인의 얼굴은 기뻐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이 음울해 보였다.
범한이 감찰원 원장직을 박탈당하자 원래 감찰원 소속이 아니던 송세인도 더는 감찰원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고, 이에 직접 범한을 찾아갔다. 범한은 부유한 주둥이라는 별명을 가진 송세인이 은혜에 보답하려는 모습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적지 않게 놀라면서 그에게 자신의 장점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임무를 주었다. 마침 조정에서 범한 쪽 사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정은 범한의 체면을 생각해서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모든 건 경국 법률에 따라 진행되어야 했으므로 범한은 송세인을 보내 자신의 부하들이 되도록 공평한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왔다.
송세인의 표정을 본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내가 지금 관아에 들어갈 수가 없어 자네에게 부탁한 거네……. 하지만 우리 둘 다 사건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았는가.”
“조정에서 증거와 증인 모두 준비해 두고 있어 방법이 없습니다.”
송세인이 한숨을 쉬다가 범한을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대인께서 강남에서 명씨 집안을 처리하셨을 때 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셨지요?”
마음이 움찔한 범한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사납게 말했다.
“나도 만리가 죄를 벗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네. 그러니 내가 말한 이긴다는 건 최소한…… 내가 지금 그를 데리고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거네!”
“3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합니다.”
송세인이 시무룩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 작은 범 대인을 대신해서 변론에 나서기는 했지만, 이번 소송은 조정 전체와 싸우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의 실력이 대단하다 한들 결국에는 질 수밖에 없었다.
“왜 감옥에 갇힌단 말인가?”
범한이 버럭 화를 내며 물었다.
“기껏해야 3천 냥이지 않은가. 경국 법률에 비리를 저질러도 착복한 돈을 전부 반환하며 죄를 물을 수 없다고 나와 있지 않은가? 자네는 도대체 소송을 어떻게 한 건가?”
송세인이 뭐라 말하려 하다가 말을 멈추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경국 법률에 분명 그렇게 쓰여 있지요. 그래서 착복한 돈을 모두 반환할 테니 죄를 줄여달라고 말이 다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하 대학사가 와서는 이미 결정된 사항을 뒤엎고 감옥에 투옥하는 걸로 바꾸었습니다.”
“하종위가 그랬단 말인가?”
범한은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아무 말 없이 품고 있던 은표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담담히 말했다.
“자네는 다시 들어가서 이 은표를 대리사 정경에게 전해주면서 경국 법률을 어떻게 배운 거냐고 물어보게. 그리고 만일 이대로 끝난다면 내가 직접 그와 소송을 벌이겠다고 말하게.”
은표를 받은 송세인은 위에 적힌 3만 냥이란 숫자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결연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대리사 대청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송세인은 한편으로 범한이 나선다고 해도 조정의 결정을 뒤엎을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범한이 이처럼 절박하게 나서는 이유는 양만리의 목숨을 지키고 싶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범한이 체면까지 구겨가면서 대리사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대리사 관리들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송세인이 안으로 들어가 뭐라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잠시 뒤에 관리 한 명이 마른기침하며 돌계단을 내려와 범한의 귓가에 대고 뭐라 속삭였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관리가 난처해하며 다시 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송세인이 양만리를 부축하며 대리사 대문을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은 양만리가 심문 과정에서 고문을 받았다는 걸 알아채고는 순간 마음속에 불길이 일렁였다. 범한이 숨을 깊이 들이쉬며 애써 일렁이는 불길을 잠재우고는 사람을 불러 양만리를 마차에 태우게 했다.
양만리가 범한을 스쳐 지나갈 때 나이가 비슷하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인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범한은 양만리의 눈동자에서 이글대는 슬픔, 분노, 억울함을 볼 수 있었다.
순간 범한은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는 양만리가 비통해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오로지 조정을 위해 온 마음을 바쳐 노력해온 관리가 조정과 황궁에서 꾸민 일 때문에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저지르지도 않은 죄 때문에 관직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고문까지 받고 명성까지 더럽혀지고 말았다. 일평생 청렴한 관리로 살기 위해 노력해온 양만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범한이 떠날 준비를 하는데 문하중서 대학사 하종위가 몇몇 관리들이 이끌고 천천히 대리사 대문을 걸어 나왔다. 범한을 본 하종위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범 공자께서는 참 품위가 있으십니다.”
범한이 하종위를 보고도 본체만체하자 하종위 옆에 있던 관리들이 발끈했다. 지금 경도 상황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하종위는 조정에서 가장 잘나가는 관리였고, 범한은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한량이었다. 아무 관직도 없는 사람이 관리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반면 하종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반응하며 계속 물었다.
“본관이 궁금해서 그럽니다. 도대체 대인께서 무슨 말씀을 전하셨기에 대리사 정경이 갑자기 생각이 바꾼 것입니까?”
하종위는 정말 이 점이 궁금했다. 그는 항상 입궁을 하기 때문에 황제 폐하와 작은 범 대인 사이에 메워질 수 없는 틈이 생겼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종위는 이제 이전처럼 범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심사에 참여한 하종위는 암암리에 수를 써서 범문사자 중 한 명인 양만리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무너뜨리려 했다. 하지만 모든 게 순조로울 것 같았던 일이 마지막 순간에 달라지고 말았다.
황제 폐하의 총애도 잃고 관직과 세력도 모두 잃어버린 범한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대리사 관리들이 겁을 먹고 생각을 바꾼 것일까? 하종위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범한에게 도대체 무슨 마력이 있길래 관리들이 황제 폐하가 은연중에 내비친 지시까지 무시하게 만든단 말인가?
범한이 고개를 돌려 하종위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 대인에게 제가 미쳐 날뛰는 상황을 만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