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1005화 (1,005/1,108)

1005화 봐라, 저 위에 오를 수 있다면 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단다 (2)

석양이 비추는 장원 대문에서 사사가 범량이를 안고 있었고, 숙녕이는 큰 꽃무늬가 그려진 농가 옷을 입고 사사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마차에서 내리는 부모를 바라보았다. 이미 세 살이 된 숙녕이는 사람을 알아보고 기억할 줄 알았다.

범한이 사사의 손에서 범량이를 넘겨받아 안은 뒤 숙녕이의 귀에다 작게 뭐라 말을 했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대문 앞에 서 있는 가족들에게 그만 가보라고 한 뒤 숙녕이의 작은 손을 잡고 안채로 들어갔다.

“소화야, 말 잘 듣고 있었니?”

안채로 들어오자 숙녕이가 아버지의 손을 놓고는 임완아 품에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사사가 미소를 지으며 잠자리를 준비하러 갔다. 범한은 장원 안을 살펴보다가 눈을 돌려 안채 안에 서 있는 태감을 바라봤다.

범한이 태감을 향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겁에 질린 태감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장원을 떠났다.

지팡이를 짚으며 밖으로 나온 등자경이 떠나는 태감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태감이 장원 대문에서 사라지자 그가 태감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침을 뱉었다.

“위생에 신경을 쓰게.”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경력 4년 등자경은 자객의 공격에서 그를 보호하다가 허벅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비록 이후 치료를 잘해서 건강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거동이 살짝 불편해 집안에서 있을 때는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등자경이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부하가 무능해서 아가씨와 도련님을 담주로 보낼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가 주변을 살펴본 뒤 목소리를 잔뜩 낮춰서 계속 말했다.

“저 태감을 죽일까도 생각을 해봤으나 도련님에게 폐를 끼치게 될 것 같아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 사람을 단순히 어린 태감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되네. 폐하를 대신해 온 사람을 자네가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범한이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말하고는 숙녕이가 입고 있는 꽃무늬 옷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정말 예쁘군.”

뜨거운 차를 가지고 나오던 등 대가의 아내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셋째 형수의 막내딸 옷입니다. 원래는 아가씨에게 입혀서는 안 되는 건데…….”

등자경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추가로 설명했다.

“며칠 동안 집안의 소식을 알 방법이 없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집안 어르신들과 함께 어린 태감을 속일 방법을 의논했습니다. 아무래도 태감을 속이기도 쉽지 않고 내려가다가 조정에서 심어둔 매복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가씨와 도련님을 시골 아이로 변장시킬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이 생겼을 때 몰래 빼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범한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집안사람들은 그동안 두 아이를 안전하게 빼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유정강 태평 별궁에서 살인사건이 떠오르면서 그날 범약약의 친어머니와 등 대가의 아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얼굴이 어두워진 범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게. 이런 짓으로 누구를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죄 없는 남의 집 아이를 희생시키려 하다니. 그런 짓은 해서는 안 되네.”

범한의 말에 등자경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대충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 모습이 못마땅한 범한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꾸짖었다.

“집안 노인들이 멍청한 말을 한다고 그걸 그대로 따른단 말인가?”

오늘 성을 나올 수 있게 되어 급히 이곳에 온 게 다행이었다. 범한은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굳이 더 말을 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아까 장원 앞에서 자신을 맞이해 주었던 가문 사람들을 떠올린 범한은 그들의 노력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민스러웠다.

천하에 책임지거나 지켜야 할 사람 없이 혼자만 있다면 주저할 것도 없을 거였다. 그러니 복수를 위해서 서슴없이 뜨거운 피를 쏟고 은혜를 갚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온몸을 내던질 수 있을 거였다.

진평평은 진원에 있는 여자들을 동이성에 보냈다. 하지만 범한은 자기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 중 몇 명이나 보낼 수 있을까? 후회 없는 인생을 사는 건 정말이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범한 가족들은 장원 안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 날 가족 다섯 명은 장원을 떠나 경도로 돌아왔다. 황제가 어서방에서 말했던 것처럼 장 공주가 어느 날 모사에게 말했던 것처럼 범한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약점에 잡혀 있는 이상 양어깨에 날개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는 아무데도 갈 수 없을 것이었다. 도망갈 수 있다고 한들 그는 도망갈 수가 없었다.

이처럼 도망칠 수 없다면 얼마나 높든 얼마나 춥든 거대한 설산을 마주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딸아이를 안은 채 싱글벙글 웃으며 마차 안에 앉아 있는 범한이 창밖 새벽빛을 받아 하얀빛은 내뿜어내는 창산으로 향했다. 창산은 경도 서쪽에 있어 지금 달리고 있는 관도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며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서 있는 창산은 아직 초가을 날씨인데도 정산에 이미 눈이 덮여 추운 한기를 풍기고 있었다.

“창산에서 겨울을 보냈던 때를 기억해요?”

범한이 갑자기 물었다.

그 말에 임완아와 사사가 추억이 떠오른 듯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범한 가족은 두 번 창산에서 겨울을 보냈었다. 그중에 첫 번째 때는 범한이 사사를 일부러 경도 저택에 남겨두었지만, 두 번째 때는 같이 창산에 갔었다. 범씨 집안 젊은이들은 눈부실 정도로 하얀 창산 눈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을 수 있었다. 그곳은 경도와는 완전히 분리된 아름다운 작은 세계였다. 그곳에서 범한은 마음대로 이 세계와는 다른 감정과 기분을 드러낼 수 있었다.

마작하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눈이 내리는 날 온돌에서 추위를 피했던 것들 모두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마차 안이 점점 조용해지더니 임완아가 가끔 창산에 놀러 왔던 섭령아와 유가 군주를 떠올렸다. 최근 며칠 동안 범씨 집안 저택이 포위를 당했을 때 섭령아는 밖에서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리고 유가 군주는 범씨 집안뿐만 아니라 황궁에 갇혀 있는 정왕야 때문에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왕야는 어떻게 되신 겁니까?”

임완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의 화가 풀리셨으니 저택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저에게 죄를 묻지 않으셨으니, 형제인 정왕야께도 죄를 묻지는 않으시겠지요.”

범한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순간 머릿속에 아우 범사철이 생각난 범한은 경도에서 일어난 일들로 인해서 북쪽에 있는 범사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했다.

범한 옆에 앉아 있던 숙녕이 갑자기 창산 정상을 덮고 있는 눈을 보고는 작은 입술을 오므리며 젖내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청 높다.”

‘그래, 엄청 높아서 오르기가 힘들지.’

범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눈 덮인 창산을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저 설산 안에는 경국에서 그의 가장 아름다운 추억들이 깃들어 있었다. 오죽 아저씨가 자신을 데리고 산을 올랐을 때 기진맥진해서 눈 위에 벌렁 누운 그는 이 설산의 정상에 오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되었다.

시력이 좋은 그의 눈에 참매 몇 마리가 창산 주위를 빙빙 돌며 눈이 덮인 정상 위를 날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이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산 정상을 가리키며 숙녕에게 말했다.

“봐라, 저 위에 오를 수 있다면 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단다.”

* * *

봄에 아주 많은 옥수수를 심었다면, 가을에 얼마나 수확을 해야 맞는 걸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노력한 만큼 수확을 얻는 것이야말로 영원히 변치 않는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담주에서 자란 범한은 경도에 온 뒤로 경국 조정을 위해서 목숨을 내걸고 많은 일들을 했고, 백성들을 위해 여러 공적을 쌓았다. 비록 그는 어진 성품을 가지거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대의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발적으로든 수동적으로든 그동안 적지 않은 씨앗을 심어왔다. 하지만 이렇게 노력했음에도 경력 10년 가을에 그는 어떠한 결실도 거둘 수 없었다.

모든 관직이 박탈당하고 모든 권력을 몰수당했다. 아끼는 가족과 친지들은 순식간에 인질 신세가 되어 버렸고, 그는 아무 관직 없는 말 그대로 한인(閑人)이 되어 버렸다. 경도 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할 일 없이 민간 노래를 듣고, 포월루에 가서 노는 것 말고는 없었다.

게다가 그를 대신해서 불공평한 처사에 대해 항의하거나 황제 폐하에게 인정을 호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관리와 시민들은 모두 담담하게 이 모든 걸 바라보았고, 심지어는 마음이 편안해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공을 쌓고 보답을 바라라지 않는다? 범한은 과연 이처럼 드높은 정신 경지를 가진 사람일까?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그들의 눈에 작은 범 대인…… 아니 소공야는, 아니 범한은 부유한 한량의 역할에 완벽하게 적응한 것 같았다. 하루 종일 경도 거리를 쏘다니거나 포월루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집안에서 아이들을 돌보거나 집안 여자들과 한담을 나누거나 담박서국에 새로 나온 소설을 보았다.

그리고 담박서국 맞은편에 있는 주인 없는 유간의관도 문을 열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범약약을 대신해 태의원 의정들이 환자들을 치료해주었는데, 이게 황궁에 있는 얼음처럼 차가운 여자가 황제 폐하에게 제시한 조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범씨 집안 아가씨는 줄곧 깊은 황궁 안에서 머물고 있었다. 범한은 황궁에 들어가서 누이를 만날 방법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대신 입궁해서 만나보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달 넘게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이에 경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범씨 집안의 일은 점점 지워졌고, 범한도 더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범한을 절대 잊을 수 없는 곳도 있었다. 바로 태학이었다. 황제 폐하는 범한의 모든 관직을 박탈하면서 태학 교습이라는 한직만은 가지게 해주었다. 집안에서 한가롭게 노는 생황이 지루해진 것인지 대략 20일 전부터 범한은 화류계 생활을 청산하고 태학에서 수업하기 시작했다.

길가에 우뚝 솟은 고목이 있는 태학은 평상시처럼 조용했다. 범한이 태학에 강의를 하러 온다는 소식에 태학 학생들은 잔뜩 흥분했다. 청심지(清心池) 앞 공터에는 종종 수백 명의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범한은 주로 청심지 앞에 돌계단에서 학생들에게 강연을 진행했다. 이유는 그의 강의를 듣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은 탓에 태학에서 적당한 장소를 마련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범한이 차라리 야외에서 강연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의견을 제시했고, 다른 방법이 없는 태학은 어쩔 수 없이 야외 강연을 허락했다. 이에 사람들은 범한의 강연을 막을 건 연달아 내리는 가을비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