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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04화 (1,004/1,108)

1004화 봐라, 저 위에 오를 수 있다면 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단다 (1)

범씨 집안 마차는 경도성을 나오는 길을 따라 서성문을 지났다. 이후 관도를 따라 달리자 멀리 황혼 속에 있는 장원이 보였다. 새벽에 입궁을 한 뒤 오후에야 저택으로 돌아온 범한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곧장 임완아와 함께 마차를 타고 교외에 있는 장원으로 향했다.

어젯밤 황궁에서 교지가 나온 뒤 범씨 집안 저택을 감시하던 일이 완전히 끝나자 사람들은 황제 폐하와 범한의 갈등이 마침내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는 다르게 범한이 입궁을 해서 황제 폐하를 만났음에도 황궁에서는 범한이 관직이나 지위를 돌려준다는 소식이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와 비슷한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에 상황을 주시하던 조정 관리들과 각 지역 세력들은 갑작스럽게 범씨 집안 마차가 성문을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마음을 졸여야 했다.

더욱이 의외였던 점은 범씨 집안 마차가 너무나도 쉽게 경도 성문을 통과했다는 사실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검문을 받지도 않고 그냥 통과를 했다. 설마 황제 폐하께서는 작은 범 대인이 이대로 경도를 떠날까 걱정하지 않는 것일까? 비록 황가 안에서 자식이 홧김에 집을 나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지만, 사형장에서의 장면과 며칠 동안의 갈등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범한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범한이 이대로 경도를 떠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것과는 달리 황제 폐하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황제 폐하가 범씨 집안을 감시하던 눈들을 모두 철수시키고 범한에게 자유를 주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누이가 아직 황궁에 있고, 폐하의 뜻도 나왔잖아요. 제게 의지해 살아가는 부하와 가족들이 모두…… 경도에 있는데 제가 어떻게 떠날 수 있겠어요?”

범한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여 붉은 석양에 비춘 경도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소화와 량이를 데리고 와서 집안에서 조용해 지낼 생각이에요.”

그 말에 마음이 살짝 움찔한 임완아는 범한이 진심으로 이 말을 한 건지 아니면 다른 뜻을 가지고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범씨 집안 저택에 머무르며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조용히 살라는 것이 황제 폐하의 뜻이었다. 그리고 임완아는 범한이 황제 폐하의 뜻을 억지로 따르려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 문을 연 범씨 집안 저택에 아주 안 좋은 소식들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날 임완아는 가장 이른 시간 안에 결단을 내려 등자경에게 소화와 량이를 성 밖에 있는 범씨 집안 장원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령한 것은 이후에 어떤 일이 발생할 경우 몰래 두 아이를 담주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늘 장원에서 전해져온 소식에 따르면 두 아이를 태운 마차가 장원에 도착한 뒤로 더는 이동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장원에는 이미 태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등자경이 몰래 소화와 량이를 데리고 담주로 가려 한다면 가는 도중에 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뒤쫓아 온 태감 무리가 두 아이를 가로채 황궁으로 데리고 가버릴 수도 있었다.

범약약처럼 말이다.

범한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폐하의 주도면밀함을 과소평가했어요. 당신이 아이들을 담주로 보내려 한 날은 어서방에서 사건이 일어나 진평평 대인이 감찰원 감옥에 보내졌던 날입니다……. 폐하께서는 중상에 입어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우리 아이들을 잊지 않으셨던 거예요.”

범한이 입꼬리를 올려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황은이 이처럼 망극하니 우리 같은 신하들은 정말 감사해야겠습니다.”

“제 생각이 주도면밀하지 못했어요. 장원에서 상황을 지켜볼 게 아니라 곧장 담주로 애들을 보낼 방법을 생각했어야 해요.”

임완아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황제 삼촌이 이처럼 매정하게 두 아이까지도 놓아주려 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1처와 연락을 해서 아이들을 경도 밖으로 보내는 거였어요. 담주에는 보내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고요.”

범한이 아내의 마른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며 위로했다.

“며칠 동안 마음 졸이며 고생한 거 알아요. 게다가 이번 일은 당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우리 폐하께서는 신묘도 이용할 줄 아는 분이시니 두 아이 통제하는 건 일도 아니지요.”

“황궁에서 승평이와 도대체 무슨 말을 주고받으신 거예요?”

임완아는 한숨을 쉬며 속으로 집안 사람들이 모두 꼼짝없이 경도 안에 갇히게 되었으니 황제 폐하가 위협적인 방법을 사용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런 은밀한 압박만으로도 범한과 임완아는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화제를 바꿔서 아까 물어봤던 질문을 다시 물어왔다. 수녀를 선발하는 일을 이미 알고 있던 임완아는 그 안에 담긴 폐하의 뜻도 이미 추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수방궁 안에 상황이 어떤지가 궁금했다.

“제대로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요?”

범한이 어쩔 방법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홍죽이라는 태감이 계속 바짝 따라오면서 감시를 해서 편하게 말을 할 수 없었어요. 그렇다고 폐하가 황궁을 나가는 길을 안내하라고 명령한 태감을 귀찮다고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이 말에는 숨겨진 다른 의미가 담겨 있었다. 범한은 홍죽의 안전을 위해서 줄곧 그와 홍죽의 관계를 엄격하게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범한과 홍죽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3 황자는 수방궁에서 홍죽을 보자 안색을 굳히며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승평이가 최근 몇 년 동안 아주 잘해왔잖아요. 그러니 폐하께서도 단순히 저와의 관계가 신경 쓰인다는 이유로 조정에 혼란이 생길 결정을 쉽게 내리지는않으실 거예요.”

범한의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계속 말했다.

“홍죽 앞에서 제가 셋째에게 훈계를 한바탕 늘어 놓았어요……. 앞으로 황궁에 들어올 기회를 좀처럼 마련하기 힘들거라는 핑계로 훈계를 장황하게 해서 승평이가 짜증을 내게 만들었죠.”

마차는 덜컹거리며 관도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고, 멀리 서쪽 하늘에는 저녁 해가 붉은색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붉은 꼬리는 가까운 산언덕에도 드리워 있었고, 멀리 어렴풋하게 보이는 창산의 머리 부분에도 드리워 있었다.

“그걸로 누굴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범한의 품에 기댄 임완아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홍죽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들 폐하께서 믿으실 거 같아요?”

“폐하께서 믿으시든 믿지 않으시든 상관없어요. 앞으로 저는 승평이를 보지 않을 거고, 국공 집안과도 왕래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도 앞으로는 입궁을 되도록 하지 말아요.”

범한이 임완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우리의 일에 다른 사람들을 연루시키지 않는 게 가장 좋잖아요.”

임완아가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아 범한을 바라보았다.

“상공은 도대체 폐하가 어떻게 생각하길 바라는 거예요? 승평이와 상공이 정말 갈라섰다고 믿어주기를 바라는 거예요? 하지만 첫째 오라버니가 동이성이 머무르고 있다는 걸 잊으시면 안 돼요. 폐하께서는 세 형제가 똘똘 뭉칠까 봐 불안한 마음에 황궁에 수녀를 들이신 거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갈라져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범한이 아내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셋은 갈라져서 있어야 해요. 설사 제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승평이가 연루되지 않도록 말이에요. 진평평 대인이 이전에 제가 연루되지 않도록 거리를 뒀던 것처럼 저 역시 승평이가 연루되지 않도록 거리를 둘 생각이에요……. 다만 저는 멀리 보는 안목은 없어서 준비가 많이 늦기는 했지만요.”

임완아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상공의 말처럼 폐하가 승평이에게 용상을 물려줄 생각이 있으시다면, 왜 수녀를 황궁에 들이는 거죠?”

“만일에 대비하는 거죠.”

범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임신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 열 달을 배속에 품어서 낳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이번에 입궁한 수녀들은 대략 열네다섯 살 정도이니 아이를 낳으려면 앞으로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할 거예요.”

말을 끝낸 범한은 고개를 숙이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폐하의 정력에 문제가 없을지 생각하며 황제의 나이를 계산해봤다. 대종사의 경지에 있는 몸은 남녀 관계의 일에 큰 문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이가 많아지면 정력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패도 공결의 후유증에 대해 범한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동이성에서 마지막으로 사고검과 나눈 대화를 통해서 범한은 황제 폐하의 체내에 경맥의 상태가 정상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경맥이 정체되지 않는 통로나 용기처럼 변했기 때문에 체내 안에 대량의 패도 정기를 수용할 수 있는 거였고, 그래서 대동산 정산에서 손가락 하나만으로 고하 대사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던 거였다.

패도 정기의 난폭함은 어떤 경우에도 변치 않았다. 왕도의 정기라 불린다고 해서 과연 그 성질까지 변했을까? 이 문제를 고민하는 범한의 눈썹을 씰룩였다. 그는 폐하의 몸이 밖은 차갑고 안은 열이 많은 상태라서 냉향환(冷香丸)을 많이 복용해야 좋아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일 냉향환을 복용하지 않는다면 근채(芹菜: 셀러리), 대산(大蒜: 마늘) 같은 걸 많이 복용해도 도움이 되려나?’

범한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태의원이 내린 진단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대종사의 몸이 일반 사람들의 몸과 다르지 않기를 빌었다.

사실 근채와 대산에는 정력을 없애는 효능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지식은 범한만이 알고 있었다. 태의원도 알지 못했고, 홍죽도 알지 못했으며, 심지어 황제도 알지 못했다. 범한이 속으로 자신이 몰래 한 일들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황제 폐하에게 도움이 될지 아닐지를 계산했다.

만일 황제 폐하가 자식을 더 낳지 못한다면 3 황자의 입지는 더욱 안정될 것이었다. 이게 바로 범한이 바라는 일이었다.

황제 아버지가 더는 자식을 낳지 못하도록 하는 건 아주 악랄한 음모라고 할 수 있었지만, 범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황제 아버지에게는 이미 세 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보다 더 아들이 많아진다면, 훗날 황위 싸움으로 경국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었다.

‘이씨 황족의 대를 끊겠다는 건 아니잖아.’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던 범한은 진평평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변변치 못한 계책을 바칠 마음은 있으나 명군을 만날 인연은 없구나.”

범한이 정말 오랜만에 다시 시를 지어 읊자 임완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범한이 방금 말한 시구의 의미를 곰곰이 음미해보던 그녀는 신하의 애환을 말하는 시라는 걸 알아챘다. 살짝 걱정하는 표정을 지은 그녀가 범한을 가만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상공은 정말 황궁 앞에서 진평평 대인이 능지처참을 당한 일이나 수십 년 전에 태평 별궁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잊고 싶은 건가?’

범한은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 사건들을 임완아에게 전부 말해주었다. 황제 폐하와 섭경미, 진평평, 범건 사이에 일어났던 일 중 자신이 알고 있는 일들 전부를 말이다. 이로써 임완아는 황궁의 어두운 그늘 안에 숨겨진 비정한 선택과 오랜 시간 동안 숨겨왔던 원한과 복수심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범한이 집안에서 조용하게 지내겠다는 말을 지킬 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런 중에 범한에게서 이 시를 들은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아무 말 없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와중에 마차는 범씨 집안 장원에 도착했다. 이미 온다는 소식을 들은 집안사람들이 정원 밖에 나란히 서서 작은 범 대인과 작은 마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비록 이제 범한은 아무런 관직도 없는 한량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범씨 가문의 기둥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증오심에 휩싸인 가운데서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부탁한 가문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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