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여년-1003화 (1,003/1,108)

1003화 한근을 바칩니다

한근에는 독이 전혀 없었다. 홍죽은 황제 폐하의 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몸의 열과 갈증을 해소해주는 효과가 있는 한근을 태의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천하는 걸 볼 때 황제 폐하의 체내의 수분이 손상되어 발생하는 내조(內燥) 증상 있는 건 분명해보였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홍죽이 눈동자를 굴려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 범한의 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작은 범 대인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황제 폐하의 건강을 걱정하고 계시는 건가? 정말 작은 범 대인은 충성심과 효심이 지극한 분이신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은 범 대인은 감정에 충실하신 분이시니 진 원장의 죽음을 쉽게 털어내지는 못하실 테니 다시 황제 폐하의 마음을 얻기는 힘들겠지.’

어서방에서 황궁 정문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다만 범한이 이미 수방궁에 들러 의 귀빈과 3 황자를 만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덕분에 홍죽은 그를 데리고 황궁 안을 한 바퀴 돌았다. 황제 폐하의 교지에 따라 범한은 오늘부터 정말로 아무런 직위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 되어 버렸으므로 앞으로 입궁할 기회도 얻기 힘들 거였다.

수방궁을 향해 걸어가던 범한은 젊은 여자들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했다.

‘황궁이 왜 갑자기 시끌벅적해진 거지?’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홍죽을 바라보며 물었다.

“국공 집안 부인들과 아가씨들이 오늘 문안을 들리러 입궁했는가?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가?”

“모두 선발을 기다리는 수녀들입니다. 각 주와 군에서 다음 달에 참가할 사람들이 더 올 예정이며, 지금은 십여 명의 수녀들이 황궁 안에서 머무르며 대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귀빈 마마께서 그녀들을 불러 황궁 안에서 지켜야 할 교칙을 설명하셨기에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홍죽이 작은 목소리로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한 범한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수녀를 황궁에 들인다는 소문이 경도 안에 파다하게 퍼졌지만, 범한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범씨 집안 저택 안에 감금되어 있던 데다가 이후에는 남들의 시선을 피해 은밀히 계획을 추진하느라 소문에 귀를 기울일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에야 황제 아버지가 새로 아내를 들일 준비를 하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고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의 귀빈과 3 황자와 마찬가지로 범한 역시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단숨에 수녀를 황궁에 들이는 이유를 눈치챘다. 자신이 움직이는 동안 황제 아버지 역시 움직이고 있었다는 걸 알게된 범한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게다가 황제 아버지는 이 일을 통해서 범한에게 아주 살벌한 경고를 하고 있었다.

범한은 순간 망연자실해지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미안해하는 대상은 수방궁 안에 있는 두 모자였다. 이 세상에서 두 모자처럼 자신을 진심으로 믿고 도와주려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두 모자는 자신을 믿었다는 이유로 지금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이에 범한은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워졌다.

범한이 수방궁 앞에서 멍하니 섰다. 그 모습을 본 홍죽은 속으로 범한이 수녀들이 안에 있는 상황에서 수방궁에 들어가 의 귀빈과 3 황자를 만나는 게 규범에 맞지 않아 망설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가 잠시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노비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대인, 나중에 다시 오시겠습니까?”

그러자 범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찌 들어가지 않는단 말인가? 규범에 부합하지 않아서? 나는 규범 같은 걸 지키는 사람이 아니네. 폐하께서 허락하셨으니 들어가서 두 분을 만나 뵐 거네. 오늘 만나 뵙지 않으면…… 언제 다시 입궁해 뵐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 말을 하면서 범한은 이미 수방궁 안을 향해 성큼성큼 들어가고 있었다. 반면 궁 문 앞에는 수녀들을 안내하는 태감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범한이 누구인지는 모르는 이들은 수수한 색상의 솜 두루마리를 입은 젊은 남자가 서슴없이 수방궁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이들은 범한을 알지 못하면서도 황궁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무시해서는 안 되는 신분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함부로 나서서 길을 막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에 한 사람은 재빨리 범한 뒤로 달려가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올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기 위해 수방궁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태감이 수방궁에 들어가자 작은 목소리로 당황해 중얼거리는 말소리와 이어서 옷을 정돈하는 소리가 들렸고 호기심에 찬 눈동자들이 보였다.

성큼성큼 빠른 발걸음으로 이동한 범한은 먼저 안에 들어간 태감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궁 안에 있는 수녀들이 준비할 새도 없이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범한이 안에 들어오자 수많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지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경국은 풍속이 비교적 개방적이었지만, 황궁 안에서는 남녀의 규율을 지키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갑자기 젊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에 수녀들이 낮은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기는 했지만, 수치심에 죽으려 하거나 울음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범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정중앙에 앉아 있는 의 귀빈을 향해 인사를 했다.

“이모님, 오늘은 이곳이 참 떠들썩하군요.”

의 귀비를 이모님이라 부르는 건 예의에 상당히 어긋나는 짓이었지만, 범한은 개의치 않았다. 오늘 이미 어서방 안에서 황제 폐하와 정식으로 사이가 틀어져 버린 데다가 황제에게 급소를 잡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약간의 자포자기한 상태가 된 범한은 더는 무엇도 숨기거나 감추고 싶지 않았고, 이에 자기도 모르게 솔직하게 본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의 귀빈은 유씨의 여동생이었다. 게다가 범한이 처음 입궁했을 때부터 그녀는 얼굴이 하얗고 잘생긴 소년인 범한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범한은 이제 성인이 되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져 있었다. 그래서 의 귀빈은 사적으로 만날 때마다 범한에게 자신을 이모라고 부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 수방궁 안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가운데서 범한이 자신을 이모라고 부를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의 귀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나이를 먹어도 제멋대로인 건 여전하군요.”

불쾌해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사실을 범한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범한이 그녀를 향해 웃으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가로 흔들자 의 귀빈의 눈가에 근심이 어렸다. 범한의 오늘 행동이 평소와는 많이 다른 것이 아무래도 어서방 안에서 최악의 상황은 생기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상황이 좋아질 가능성도 없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의 귀빈은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오늘 무슨 일로 입궁하신 겁니까?”

황궁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범한이 오늘 입궁한 목적을 모두가 알고 있었으므로 이 말은 인사말에 불과했다. 이에 범한에 짧게 대답하는데 성아가 재빨리 도자기 걸상을 가지고 왔다. 과거 어린 궁녀였던 그녀는 이미 수방궁안에서 경력이 가장 오래되고 입감이 가장 센 궁녀가 되어 있었다. 형식적인 인사말을 하던 범한이 그녀의 예쁜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진짜 본론을 꺼냈다.

“오늘 황제 폐하를 뵈었는데, 폐하께서 3 황자 저하의 공부를 봐달라 지시하셨습니다.”

그 말에 눈가에 걱정하는 기색이 더욱 짙어진 의 귀빈이 속으로 생각했다.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건 아니겠지? 범씨 집안 아가씨가 황궁 안에 갇혀 있는 데다가 범씨 집안과 국공 집안사람들 수백 명이 경도 안에 있는 이상 범한이…… 떠날 수는 없을 텐데?’

순간 그녀는 범한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수녀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라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의 귀빈은 당장이라도 수녀들을 내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의 귀비의 안색이 급격하게 변하는 걸 보고 착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저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건 이곳을 장소를 벗어나기 위한 핑계였다. 지금 이곳에는 앞으로 황제 아버지의 어린 아내이자 자신의 계모가 될 여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범한은 수녀를 선발하는 일에 숨겨진 의미를 알고 싶어 하면서도 이곳에 머물고 싶지는 않았다.

“평아는 뒤쪽에 있으니 직접 찾아가 보도록 하게.”

살짝 머리가 아파진 의 귀빈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궁녀 성아가 범한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는 뒤쪽으로 안내를 했다. 그라자 황제 폐하에게 범한을 미행하며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은 홍죽도 곧장 범한의 뒤를 따랐다.

범한이 안내를 받아 뒤쪽으로 걸어가자 숨이 막힐 듯 무겁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편안하게 바뀌었다. 범한이 들어온 순간부터 안에 있던 수십 명의 수녀는 당황하면서도 애써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애를 썼고, 의 귀빈 앞에서 귀족 자녀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평상시 집 밖으로 좀처럼 나가지 못했던 열네다섯 살에 불과한 소녀들의 앞에 갑자기 잘생긴 데다가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 등장했는데, 어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수녀들이 살짝 넋이 나가서 멍해진 눈빛으로 범한이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

그녀들은 평민 복장을 한 청년이 어떻게 삼엄한 황궁 안을 자유롭게 쏘다닐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물론 그중에서도 눈치가 빠른 수녀들은 청년과 의 귀빈이 나눈 대화를 듣고는 청년이 작은 범 대인이라는 걸 눈치챘다.

좀처럼 보기 힘든 평범치 않은 외모에 수녀들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떠나는 범한의 얼굴을 대담한 성격의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바라봤고, 소심한 성격의 사람들도 곁눈질로 힐끔힐끔 바라봤다.

범한이 완전히 눈에서 사라지자 국공 집안 출신 수녀 중 담이 큰 사람이 물었다.

“마마, 저분이 작은 범 대인이십니까?”

의 귀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녀들이 참지 못하고 뭐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아직 철모르는 소녀들이었고, 궁 안에서 며칠 동안 답답하게 있는 와중에 전설적인 작은 범 대인을 만나자 흥분되는 마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입궁하기 전에 집안에서 들었던 교훈과 황궁 안에서 교습 유모에게 들었던 당부도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다만 몇몇 영리한 수녀들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조용히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오늘 범한의 모습에서 수상쩍은 기색을 보았고, 게다가 항상 어서방 안에 있는 범씨 집안 아가씨를 가장 큰 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오늘 작은 범 대인을 보고도 감동하거나 흥분하기는커녕 오히려 적대감을 느꼈다.

* * *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기에 폐하께서 상공을 수방궁에 보내신 걸 거예요…….”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마차 안에서 임완아는 피곤한 얼굴로 옆에 앉아 있는 범한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봤을 때 폐하께서 갑작스럽게 수녀를 선발하게 한 건 상공에게 경고를 하고 싶어 그러시는 것 같아요. 상공이 셋째에게 아무런 의견도 없다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두 사람만 있을 때 범한은 항상 황제 폐하를 황제 아버지라고 불렀고, 임완아는 어렸을 때부터 안아주었던 황제 폐하를 황제 삼촌이라 불렀다. 어찌 보면 대역무도한 호칭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의 정이 느껴지는 호칭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임완아는 평소와는 달리 황제 폐하라는 호칭만 사용했고, 범한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임완아는 남편의 기분이 아주 안 좋다는 걸 알고 그러는 것이었다.

“조정 문무백관들에게 경고하는 것이기도 하죠. 미래 경국을 맡을 사람이 셋째일 거라고 단정 짓지 말라고요.”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나이가 이미 많긴 하시지만, 야망을 아직도 가지고 계십니다. 다만 위풍이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군요.”

“승평이에게는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임완아가 마차 창문을 가린 발을 살짝 걷고는 초가을 경도 거리 풍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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