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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1000화 (1,000/1,108)

1000화 황제와 신하가 만나 무슨 말을 해야 할까? (2)

수방궁 안에 두 모자는 작은 목소리로 수녀를 선발하는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범씨 집안 아가씨가 어서방 안에 머무는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어서방에 머무는 범씨 집안 아가씨는 아직 상처가 낫지 않은 황제 폐하를 부축해 한 바퀴 산책을 한 뒤 다시 어서방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의 귀빈의 말처럼 황제 폐하가 범씨 집안 아가씨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황당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종사의 경지에 들어간 무예 고수에 남녀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중년 남자인 황제가 수녀를 선발하는 이유 역시 정치적인 고려 때문이었다.

산책을 하는 도중에 황제는 범약약과 수녀를 선발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이 나는 대로 경도에서 최근 8일 동안 비가 내렸던 일이나 범한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대부분은 황제 폐하 혼자서 말하고 범약약은 가만히 듣기만 하는 식이었다. 황제는 범씨 집안 노부인의 손에 자란 만큼 범씨 집안 사람들에게 친근한 감정을 느꼈다. 게다가 황제는 딸이 없는 데다가 임완아가 황궁을 나간 뒤로 더는 좀처럼 이러한 따뜻한 감정을 느낄 수 기회가 없었다.

두 사람이 앞장서서 앞에서 걸어가고 요 태감이 이끄는 궁녀와 태감들은 멀찍이 뒤에서 바짝 긴장을 한 채 따라가고 있었다. 이에 어두운 밤 중에 산책하는 행렬은 모습이 상당히 우스워 보였다.

어서방 앞에 복도에 있는 돌문 옆을 돌아가던 황제 폐하가 발걸음을 멈추고는 돌문 옆에서 몸을 숙이고 있는 태감을 바라보았다. 한참 아무 말 없이 태감을 바라보던 황제 폐하가 나지막이 물었다.

“최근 대 내관을 따라다니며 일을 하던데, 지내기는 어떠한가?”

폐하가 질문한 태감은 바로 과거 어서방에서 가장 잘나갔던 태감인 홍죽이었다. 3년 전 일이 진정되어 냉궁에서 나온 홍죽은 이후 대 내관을 따라 문서 방면의 차사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늘 밤에 우연히 황제를 만난 그는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며 옆으로 비켜서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황제 폐하가 그를 알아보고는 질문까지 하자 홍죽이 재빨리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황제 폐하가 만족해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는 약사 빠른 이 어린 태감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었다. 하지만 어서방에서 자신을 따르게 하지 않고 동궁 수령 태감으로 보냈고, 이에 홍죽은 그 뒤에 터진 일련의 사건들 중심에 서고 말았지만, 다행스럽게도 황제 폐하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마음이 움직인 황제 폐하가 다시 바퀴 달린 의자를 떠올렸다. 그날 눈이 내리던 겨울날에 범한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채로 입궁을 했을 때 바퀴 달린 의자를 밀던 어린 태감은 바로 홍죽이었다…….

황제의 눈동자에서 점점 웃음기가 비치더니 범한이 어린 태감 홍죽을 무척이나 싫어했던 걸 떠올렸다.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홍죽을 바라보던 황제가 나지막이 명령했다.

“내일부터는 어서방으로 돌아오도록 해라.”

갑작스러운 명령이 홍죽이 크게 기뻐하면서 바닥이 엎드렸다. 연신 감사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그를 바라보는 사람 중 아무도 그의 눈동자 안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알아보지 못했다.

황제가 살짝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젓고는 범약약의 부축을 받아 돌문으로 들어갔다. 그러던 중 황제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짐은 즉위한 뒤에 비나 눈이 내리는 날에는 짐을 보아도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을 내렸다. 오늘은 비가 내려 땅이 젖어 있으며 홍죽을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된다.”

황제 폐하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는 범약약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짐이…… 좋은 황제라고 생각하는가?”

어서방을 향해 걸어가던 중 황제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는 침착하면서도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 폐하가 질문을 하면 반드시 누군가는 대답해야 하는 법이었다. 지금 황제 폐하 옆에는 범약약 밖에는 없었으니, 황제는 당연히 범약약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데 없는 질문에 순간 마음속에 두려움이 엄습한 범약이 속으로 나랏일을 주관하는 대학자도 역사를 기술하는 학자도 아닌 자신이 무슨 자격이 있다고 이런 중차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는 발걸음을 멈춘 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범약약은 한참 동안 주저하며 며칠 동안 어서방 안에서 보았던 장면들과 황궁 각지의 자세한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천하를 주유하면서 보았던 주와 군에서 살고 있는 경국 백성들의 생활을 생각했다.

그녀는 도무지 자신의 두 눈과 진심을 속일 수는 없었기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전 제왕들과 비교하면 폐하께서는…… 분명 좋은 황제십니다.”

황제가 아무 말 없이 범약약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는 편안한 얼굴로 크게 웃기 시작했다. 웃음소리가 어서방 앞에 정원과 처마 아래를 넘어 황궁 담장에까지 들렸다.

뒤에서 따라오던 요 태감의 무리가 화들짝 놀랐다. 이들은 범씨 집안 아가씨가 무슨 말을 했길래 황제 폐하가 오랜만에 즐겁게 웃는 건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오랜만에 호탕하게 웃는 황제의 모습을 본 이들은 순간 온갖 감정이 교차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꺼리지 않고 하는 범씨 집안 아가씨의 모습에 감탄했다.

같이 살짝 웃으며 옆에 있는 황제 폐하를 바라보는 범약약의 마음속은 사실 아주 복잡했다. 이때가 돼서야 그는 비로소 황제 폐하가 며칠 동안 자신을 다르게 대한 이유가 뭔지를 이해했다.

의 귀빈이 한 추측이 맞았고, 범약약이 이전에 했던 추측도 맞았다. 범한의 생각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가 범약약을 황궁에 머무르게 하고, 자신의 곁에 머무르게 하고, 어서방 안에 있게 한 진짜 이유는 자신이 중상을 입고도 나라를 능숙하게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황제로서 자신의 영명함과 남들보다 뛰어난 무예를 옆에서 지켜보고 판단할 사람이 필요해서였다…….

어서방 안에서 진평평과 대화를 나눈 뒤 황제 폐하는 자신이 좋은 황제라는 걸 증명하고 인정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게 범약약이었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늙은 검은 개가 뭐라 말하든 짐은 여전히 좋은 황제이다. 그렇지 않은가?’

범약약의 말에 자신이 좋은 황제라고 확신한 황제 폐하가 자신감이 만연한 표정을 지으며 어서방을 향해 걸어갔다.

* * *

“알리옵니다!”

“알리옵니다!”

“태학 교습 범한이 입궁하였음을 알리옵니다!”

호탕하면서 오리 울음소리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해 외쳤다. 오늘은 조회가 없는 정기 휴일이라서 황성은 아주 조용했다. 금군 고위 장군과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고 청색 두루마기를 입은 젊은 청년이 자신들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모두들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실은 무척이나 긴장한 상태였다.

역모를 저지른 감찰원 전임 원장인 진평평이 황궁 앞 사형장에서 능지처참을 당해 죽은지 이제 9일째 되는 날이었다. 당시 사형장에 쳐들어온 작은 범 대인은 황제 폐하의 권위를 멸시함으로써 이 일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후 며칠 동안 황제 폐하와 경국 조정 권신인 작은 범 대인의 갈등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궁정에서 범씨 집안 저택에 파견한 감시자들은 참혹하게 죽어 나가야 했다. 그리고 관료 사회에서 나온 소문에 따르면 어제 외삼리 어느 지점에서 작은 범 대인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오늘 황제 폐하는 범한에게 입궁에 문안을 올리라는 교지를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금 경국은 비록 천하 강국이었지만, 황제와 신하 사이이자 부자 관계인 두 사람의 사이가 계속 악화하여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싸움으로까지 번진다면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볼 수 있었다.

범한은 이미 모든 관직과 권력을 잃은 상태였지만, 조정 관리와 경국 백성들은 여전히 범한이 정말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경국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9일 만에 황제 폐하와 범한이 갈등이 끝나기만 한다면 경국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호 대학사 등 사람들은 황제와 신하 사이이면서 부자 관계인 두 사람 사이에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보기에 두 사람은 그저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서로 고집을 부리며 물러서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중 오늘 먼저 황제 폐하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입궁하라 교지를 내렸으니 범한도 반드시 황제 폐하의 호의에 맞는 화답을 해야 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범한이 묵묵히 요 태감의 뒤를 따랐다. 요 태감은 궁내 수령 태감이 되고 나서도 범한 앞에서 잔뜩 몸을 낮추어 겸손해 행동했지만, 범한은 그 모습을 보고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태학 교습이라고?’

범한이 지금 아무런 관직도 없는 상태였기에 유일하게 불릴 수 있는 공직이 바로 태학 교습이었지만, 여전히 귀에 어색하게 들렸다.

범한은 지금 아무런 관직도 없어 유일하게 불릴 수 있는 공직이 바로 태학 교습이었지만 여전히 귀에 거슬렸다. 범한이 재촉하는 소리를 들으며 어서방에 가니 홍죽이 기다리고 있었다. 홍죽의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등장에 범한을 속으로 놀라면서도 짐짓 아닌 척 고개를 숙이자 홍죽이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이 무언의 눈빛으로 아무도 모르게 말을 주고받았다.

어서방에 들어간 범한은 무탈하게 있는 누이를 확인하고는 살짝 안심이 되었다. 그는 낮은 평상에 앉아 있는 남자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고집스럽게 여전히 입은 열지 않았다.

* * *

홀로 말을 타고 죽기 살기로 내달려 경도로 돌아온 그 날 범한은 직접 진평평의 몸을 끌어안고 사형장을 떠났다. 떠나면서 범한은 그 자리에 있는 황제 폐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실은 황제 폐하와 범한 역시 수개월 만에 만난 것이었다.

황제 폐하가 범한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지금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범한의 모습을 보고도 불쾌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신하들이 자신의 앞에서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다른 마음을 품는 걸 용납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가장 총애하는 아들에게는 달랐다. 황제 폐하는 자신의 앞에서 노골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며 입을 꾹 다물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범한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어서방의 침묵은 오랜 시간 이어지지 않았다. 범약약이 황제에게 공손히 절을 한 뒤 나가겠다고 청한 것이다. 그녀는 오라버니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조용히 어서방을 나갔다. 그녀가 오늘 어서방에 있었던 이유는 황제 폐하가 범한을 안심시키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어서방을 나가 두 사람이 편안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했다.

“짐은 어째서 짐이 줄곧 너에게만은 이리도 너그럽게 대하는 것인지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황제가 범한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인제 보니 짐이 너를 너그럽게 대한 이유가 꼭 네가 경국을 위해서 세운 공로 때문만은 아닌 것 같구나.”

황제가 범한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짐이 보기에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여기 놓여 있는 보고서들을 네가 직접 보도록 해라.”

그동안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서 이미 증명되었듯이 경제와 범한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연기자들이었다. 하지만 오늘 어서방 안에서 경제는 어떤 가식된 연기 없이 자신의 본심을 솔직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아주 간단한 말이었지만, 범한은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챘다. 그는 자신의 앞에 탁자에 놓여 있는 보고서 안에 담긴 내용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현공 사당의 자객 사건, 산골짜기에서 벌어진 습격 사건 등 진평평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자신을 죽이려 했던 걸 뒷받침하는 증거들이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자신이 한 일에 범한이 연루되지 않도록 진평평이 애쓴 노력이었다.

죽은 절름발이 노인의 계획대로 범한은 지금 놀라고 슬퍼하는 모습을 연기한 뒤에 폐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 황제 아버지의 여유가 넘치는 모습을 보니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일었다. 용솟음치는 분노로 마음이 쓰라리고 아파온 범한은 더는 연기를 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든 범한이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가장 익숙하면서 또 가장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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