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화 황제와 신하가 만나 무슨 말을 해야 할까? (1)
3 황자의 말을 들은 의 귀빈이 유감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가늘은 손가락을 들어 인상을 쓰고 있는 아들의 미간을 쓰다듬어줬다. 그녀는 아들 이승평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기에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황제 폐하의 첩인 그녀는 천진난만한 성격임에도 온갖 계략과 위험이 난무하는 황궁 안에서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황궁에 들어갈 당시 유씨가 해주었던 침착이라는 두 글자를 항상 마음속에 상기하고 있었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터졌을 때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황궁 상황은 3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황태후가 죽고 황후가 죽고 장 공주가 죽고, 숙 귀비는 냉궁 안에 갇혀 있었다. 이승평의 친어머니인 의 귀빈과 1 황자의 친어머니인 영 재인은 경도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자발적으로든 피동적으로든 범한과 1 황자를 따라 황제 폐하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반란이 진압된 뒤 두 사람은 순풍을 맞은 돛 단 배처럼 입지가 더욱 굳어졌다. 이에 영 재인은 지위가 올라 영 귀비가 되었지만, 의 귀빈은 여전히 귀빈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나이가 되면 분명 귀비로 지위가 올라갈 것이었다.
이로써 황궁 안에서 일들은 자연스럽게 의 귀빈과 영 귀비가 도맡게 되었다. 의 귀빈은 성격이 유들유들하고 밝았고, 영 귀비는 자질구레한 일에 관여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황궁 안의 분위기도 편안해져서 지난 3년 동안은 줄곧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8일 전에 어서방에서 굉음이 들린 뒤 조용하고 평화로운 날들도 끝나고 말았다.
영 귀비는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용감히 황제 폐하 앞에서 진 원장을 용서해달라 간청했다가 숙 귀비처럼 냉궁에 갇힌 처지가 되고 말았다. 다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영 귀비에게 훌륭한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황제 폐하는 분노에 차 직접 영 귀비에게 사약을 내렸을 것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서 의 귀빈은 지금 궁 안에 남아 있는 유일한 여주인이었다. 이에 3일 전에 시작된 황궁에 들일 수녀를 선발하는 일을 도맡아 처리하게 되었고, 난데없이 갑자기 시작된 이 일의 배후에 숨겨진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경도에서 반란이 일어난 이후 황제 폐하에게는 두 명의 아들과 반쪽짜리 아들만 남았다. 두 명의 아들이란 지금 멀리 동이성에 있는 1 황자와 황궁에 있는 3 황자 이승평을 말하는 거였고, 반쪽짜리 아들은 당연하게도 범한을 가리키는 거였다. 진평평의 역모로 인해서 황제 폐하와 범한은 결국 사이가 틀어져 버렸고, 앞으로 이 일이 어떻게 수습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황제 폐하의 남은 두 아들과 반쪽짜리 아들은 모두 과거 황태자와 2 황자의 상황에서 교훈을 얻어 서로 사이가 아주 돈독했다. 1 황자와 범한은 과거 반란이 일어났을 때 함께 싸웠기에 감정이 깊었고, 3 황자와 범한은 스승과 제자로써 서로를 신뢰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관계가 이처럼 돈독해질 거라고는 황제 폐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경력 7년 이후 범한이 입궁하는 횟수는 날이 갈수록 많아졌지만, 3 황자와 만나는 횟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3 황자가 황태자가 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범한이 일부로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려고 만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둘째로는 범한이 3 황자에게 계속 영향을 끼치는 걸 우려한 황제 폐하가 두 사람의 관계를 떨어뜨려 놓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범한은 아무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게 했고, 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와 가까웠던 감찰원 관리들이나 범문사자들이나 포월루 안에 직계 부하들이 변한 모습을 보면 범한의 사람을 감화시키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범한의 제자인 3 황자는 비록 강남에서 돌아온 뒤 스승과 거의 만나지 않았지만, 범한이 몽둥이로 가르친 교훈을 잊지 않고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 이에 과거 불량하고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던 소년은 내성적이고 침착한 황자로 변모했다.
만약 이전이었다면 황제의 아들들이 서로 배척하고 시기하지 않는 모습을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을 거였다. 더구나 3년 전에 경도에서 반란이 일어난 걸 계기로 황제 폐하는 지난날 자신이 한 일을 반성하고 더는 아들들의 사이가 갈라지도록 몰아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진평평의 역모를 계기로 황제 폐하는 더는 세 아들의 관계가 돈독한 걸 아름답게 보지 않았다.
의 귀빈은 이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만약 황제 폐하가 더는 범한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아들들이 똘똘 뭉쳐서 무언가를 저지를 수도 있다고 경계하고 있을 거였다. 설사 세 아들들이 똘똘 뭉쳐서 뭘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황제 폐하가 정말 범한을 공격한다면 다른 아들들에게도 반감을 살 수 있었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3 황자 이승평이 계속 성장해간다면 앞으로 황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겠는가?
이게 바로 황제 폐하가 황궁에 들일 수녀를 선발하는 이유였다. 황궁에서 젊은 여자들을 들여서 자신의 아들들을 늘리고 싶은 거였다.
아들인 3 황자를 바라보던 의 귀빈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승평은 한숨을 쉬지 않은 채 그저 어머니의 손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위로할 뿐이었다. 온갖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는 황궁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자신의 두 형님이 용상이 앉기 위해 한 행동들을 직접 목격했다.
두 형님은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에 그가 죽기를 바랐고, 심지어 부황이 죽기를 바랐다. 이후 다른 두 형님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그는 황궁 안이 계속 평화로울 수 있다면 자신의 인생도 훨씬 순조로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 평화롭던 황궁 안에 다시 풍파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부황께서 더는 범한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범씨 집안과 돈독한 관계인 자신에게 천하를 물려주려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에 황궁에 들일 수녀를 선발하는 건 부황이 아들을 더 가지고 싶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그건 3 황자를 경계하기 위해서인 걸까? 아니면 범한을 경계하기 위해서인 걸까?
“내일 스승님께서 입궁해 문안 인사를 오신다면 아마도 일이 나쁘게만 흘러가지는 않을 겁니다.”
이승평이 억지로 웃으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고집이 센 작은 범 대인이 내일 입궁해서 무슨 일을 벌일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의 귀빈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황제 폐하가 설사 아들을 더 낳아 수방궁과 범한에게 경고하고 싶어 한들 이루어지려면 시간이 한참 걸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경국 조정은 이미 이승평을 미래의 경국 황제로 보고 있었고, 심지어 그의 지위는 과거 황태자보다도 굳건했다. 그러니 황제 폐하가 범씨 집안을 더는 믿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오랜 시간 계획해온 미래까지 쉽게 바꾸지는 못할 거였다.
다만 그녀는 황제 폐하와 범한 사이에 진짜 문제가 무엇이며, 진 원장의 죽음에 다른 어떤 문제가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건 내일 입궁한 범한이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인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거였다. 범한이 한발 물러서기만 한다면 경도 안에서 계속 살면서 권력과 지위를 천천히 회복할 수 있을 거였고, 그렇게 된다면 수방궁도 대신들과 왕공 귀족들이 황궁에 딸을 보내는 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였다.
이런 생각을 하던 의 귀빈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평소와는 다르게 차갑게 빛났다.
“황궁에 들어온 여자아이들이 본분을 지키면 좋겠군요. 만약 집안이 가진 힘을 믿고 황궁에서 무슨 짓을 벌이려 한다면 본궁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3년 동안 황궁의 여주인 역할을 해온 의 귀빈은 이번 수녀를 선발하는 일도 주관해야 했다. 게다가 황궁 안에서 지내면서 그녀의 천진난만한 성격도 이미 많이 달려져서 말이나 행동에서 위엄이 드러났다.
“어제 입궁한 수녀 중 세 명을 어마마마께서 내쫓았다고 들었습니다.”
의 귀빈의 말을 들은 이승평이 간곡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어쨌든 부황의 뜻이 이러하시지 않습니까. 어마마마께서 지나치게 행동하시면 부황께서 언짢게 생각하실 겁니다.”
“부황께서도 자초지종을 아시면 오히려 기뻐하실 겁니다. 그런 눈치 없는 애들은…….”
의 귀빈이 차갑게 웃으며 계속 말했다.
“조정도 수녀를 선발하지 않은 지 오래돼서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태상사나 예부나 기준도 제대로 정하지 않은 채 귀족 집안 여식이면 그냥 황궁에 보내고 있습니다. 그 여자애들은 집안에서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황궁에 들어오자마자 은전을 이곳저곳에 뿌려댔습니다. 아마 오랫동안 은전 맛을 보지 못한 궁녀나 유모들을 꿰어내려고 그런 것이겠지요.”
그녀가 3 황자를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수녀들은 입궁하자마자 궁 안의 상황을 수소문했습니다. 물론 수소문한 내용을 가지고 각 궁에 있는 주인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어서방에 계시는 그분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습니다……. 조정 대신 집안사람이 아닌 영세한 왕공이나 관직에서 물러난 옛 대신 집안의 경우에는 범씨 집안과 유씨 집안이 어떤 내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단순히 범씨 집안이 정말 세력을 잃었다고 생각할 텐데 만일 그분이 어서방 안에서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걸 알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분에 대해서 온갖 말들을 해댈 텐데…… 저는 그런 말은 듣기 싫습니다.”
“제가 이번에 수녀 세 명을 황궁에서 내쫓은 것은 다른 남은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고 그녀들 집안을 지켜주기 위해서입니다.”
의 귀빈이 귀밑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게다가 폐하께서 그런 소문을 들으신다면 얼마나 화를 내시겠습니까. 또 그런 소문이 작은 범 대인의 귀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이 진정된 뒤 어느 날 그 수녀 집안의 사람들이 비참한 사건을 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이승평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만약 최근의 사태가 정말 진정이 되려면 어마마마께서도 스승님의 화를 돋우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의 귀빈이 눈꼬리를 올려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군요. 제가 어디 그럴 사람입니까.”
이승평이 머리를 긁적이며 뭐라 말을 하려다가 생각을 고쳐 잡고는 말했다.
“하지만 부황께서 범씨 집안 아가씨를 어서방에 계속 머물게 하는 건 규범에 맞지 않습니다.”
의 귀빈은 3 황자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은은한 미소만 지었다. 그녀는 자신을 여자로 만들어준 남자가 범씨 집안 아가씨를 옆에 두려 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과 권력을 가진 남자는 외로워서 그러는 것이었다. 황궁 안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 그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지만 황궁과 아무 관련 없는 범씨 집안 아가씨는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옆에 두고 싶어 하는 거였다.
황제 폐하가 범씨 집안 아가씨를 항상 옆에 두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에게 바라거나 요구하는 게 없어서였다. 이런 생각을 하던 의 귀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녀가 옆에 있는 이승평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하도 냉궁에 가는 횟수를 줄이셔야 합니다. 폐하가 아신다면 불쾌해하실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냉궁에 계시는 숙 귀비는 둘째 형님의 친어머니이십니다. 순수하게 둘째 형님이 과거 소자에게 잘해주셨던 걸 보답하고자 찾아가는 것이지 둘째 형님이 하셨던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이승평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 영 이모께서도 냉궁에 계셔서 잘 지내고 계시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의 귀빈은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도 3 황자가 냉궁에 자주 찾아가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황궁 안에서 관용이 넘치고 인자한 황자라는 소문이 나게 해서 황제 폐하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것이자…… 범한이 한 당부를 따르기 위해서였다. 3년 전 경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범한은 죽음을 앞둔 2 황자에게 숙 귀비를 돌봐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