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8화 황궁 안에 있는 범씨 집안 아가씨 (2)
황제 폐하의 살기등등한 눈빛을 받은 요 태감은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미 8일이 지났지만, 어서방 안에서 진평평과 황제 폐하가 싸웠을 때 황제 폐하가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비록 생명이 위험한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황제의 몸은 짦은 시간에 회복되기 힘든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게다가 그날 진평평에게 심장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독설을 들은 황제 폐하의 정신 상태는 결코 좋지 못했다.
그래서 요 태감은 바퀴 달린 의자를 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황제 폐하는 바퀴 달린 의자를 보고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황제 폐하가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하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진짜 몸 상태를 알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고, 다음은 바퀴 달린 의자가 황제 폐하에게 견디기 힘든 분노와 고통을 준 진평평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요 태감은 오늘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다행스러운 점은 단순한 실수일 뿐 죄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황제 폐하가 자신의 가족보다 노비들에게 더 관용적인 사람이라서 단순히 화가 났다는 이유만으로 죄를 묻지 않는다는 점도 다행이었다. 이에 요 태감은 자신의 목숨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요 태감이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태감과 궁녀들을 데리고 조용히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조용히 따라가며 앞에서 범씨 집안 아가씨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는 황제 폐하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두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 * *
황궁 복도에 걸려 있는 등불은 별로 밝지 않았지만, 발아래 청색 돌길을 어렴풋하게나 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이전에는 일단 밤이 되면 귀인들은 황궁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 태감과 궁녀들만 긴 복도를 조용히 지날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평상시와 다르게 살짝 어두운 등불 아래서 황제 폐하와 범약약이 걸어가고 있었고, 그 뒤에는 길고 짧은 그림자들이 드리워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가던 태감과 궁녀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면서 재빨리 길옆에 무릎을 꿇었다.
요 태감의 추측대로 방금 전 어서방 앞에서 바퀴 달린 의자를 본 황제 폐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바퀴 달린 의자를 본 뒤로 황제 폐하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지난 수십 년 동안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채 생활했던 늙은 검은 개가 떠올랐다. 지금처럼 깊은 밤에 황제 폐하는 그와 나란히 걸으면서 일상적인 일들을 이야기하듯이 천하의 대세를 의논하거나 황가의 싸움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자신들이 세운 계획을 실행할 때 죽을 사람들의 숫자를 계산하고는 했다.
황제 폐하도 사람이었기에 그때의 모습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평평의 배신으로 인해서 아름답게 추억되어야 할 기억들이 의심스럽고 기만적인 장면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그리움보다는 분노가 더 컸다.
사실 그의 마음속에는 그리움이나 분노 외에도 다른 복잡한 감정들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수년 전에 현공 사당에서 일어난 습격 사건으로 범한은 중상을 입어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상태가 좀 나아지자 범한은 겨울 눈 내리는 날에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채 입궁을 했었다. 그리고 그때도 황제 폐하는 그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었다.
그날 대화는 황제 폐하와 범한이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비록 그때는 작은 전각 안에서 만났을 때처럼 서로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고 만난 건 아니었지만, 경제에게는 아주 중요한 만남이었다.
오늘 밤에 요 태감이 가져온 바퀴 달린 의자를 본 황제 폐하는 자연스럽게 진평평이 생각나고, 이어서 상처를 입었던 범한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
“짐이 그 늙은 개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 한 이유는 그가 한없이 음흉하고 위선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범약약은 옆에서 황제의 팔을 잡고 부축하고 있었지만, 간격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간 그 말에 부축하고 있던 황제 폐하의 말이 태산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황제가 신하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명령하면 신하는 목숨을 내놓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더욱이 진 원장은 대역죄를 저지른 게 너무나도 명백해서 범한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황제 폐하의 명령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물론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황제는 무엇도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최근 며칠 동안 황제 폐하는 자발적으로 범한에게 뭘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황제 폐하가 초가을 밤에 범약약에게 먼저 진평평을 죽인 이유를 말한 것이었다.
‘나보고 들으라고 하신 말인가? 아니면 내 입을 통해서 오라버니에게 들려주라고 하신 말인가?’
황제 폐하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범약약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이런 생각을 하며 재빨리 황제의 의도를 추측하려 애썼다.
“그 늙은 개는 마지막까지도 짐의 손에서 죽으려고 발악을 했다. 안지가 짐을 미워하고 원망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지. 이런 악독한 놈을 어찌 편히 죽게 내버려 둘 수 있겠느냐?”
살짝 피곤해하는 목소리로 이 말을 하며 황제 폐하는 고개를 돌려 범약약을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조용하고 어두운 황궁을 바라보았다.
“짐은 내일 안지에게 입궁해 문안을 올리라는 교지를 내릴 것이다.”
범약약이 몸을 살짝 움츠리더니 한 손으로는 황제 폐하의 팔을 부축한 채 몸을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황제 폐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 싸움에서 자신이 먼저 한 발짝 양보한 일로 관리 집안 여식에게 감사 인사를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오히려 황제 폐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이후 범씨 집안 아가씨의 모습이었다. 감사 인사를 한 뒤 그녀는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은 채 묵묵히 황제 폐하를 부축하며 황궁 안을 걸어갈 뿐이었다. 자신이 언제 황궁에서 나갈 수 있는지 궁금할 것인데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너도…… 다른 사람들과 다른 구석이 있구나.”
황제가 고개를 돌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범약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전에 짐이 종종 신아를 데리고 궁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지. 그 애가 큰 뒤에는 좀처럼 그럴 기회가 없었지만, 그 애는 너보다 훨씬 장난기가 많았고, 유순했단다.”
“저는 새언니보다 한참 부족합니다.”
범약약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황제가 아무 말 없이 웃었다. 황제는 속으로 옆에서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범약약이 정말 단아하면서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한 편으로는 자신의 한 말에 슬픈 감정이 들었다. 임완아가 성인이 된 뒤로는 ‘진정으로’ 황제를 따르며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자신들에게 관심도 주지 않은 탓에 살아 있는 황자들이나 죽은 황자들이나 부황을…… 진짜 아버지처럼 따르지 않았다.
반면 범약약의 마음속에는 의문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며칠 동안 옆에서 황제 폐하를 지켜보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낯설고 지엄한 황제 폐하가 신단 위에서 걸어 내려와 자신의 금빛 찬란한 외투를 벗어 던지고는 평범한 일반 중년 남자로 변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중상을 입은 뒤 점점 노쇠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 * *
깊은 밤 조용한 황궁 안에서 범씨 집안 아가씨가 황제 폐하를 부축하며 산책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 들어갔다. 게다가 황제 폐하가 범씨 집안 아가씨에게 특별 대우를 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황궁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어서방에서 다친 황제 폐하를 범씨 집안 아가씨가 입궁해 치료해준 뒤로 황제 폐하가 범씨 집안 아가씨를 특별하게 대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에 눈치가 있고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들은 모두들 범씨 집안 아가씨가 인질로 황궁에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사실 인질이라 하기에는 대우가 너무 특별했다. 황궁 안에서 범씨 집안 아가씨는 과거 신 군주의 생활 규칙에 따라 생활했다. 그녀는 밤에 궁에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걸 제외하면 하루 종일 어서방에서 머물며 황제 폐하를 보필했다. 심지어 황제 폐하는 중차대한 나랏일을 의논할 때도 그녀가 옆에서 듣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문하중서의 대학사들도 이 모습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지만, 모두들 신분이 있고 지위가 높은 점잖은 사람들이었기에 함부로 밖에다가 말을 퍼뜨리지는 않았다. 물론 하 대학사만은 종종 어서방 안에서 범씨 집안 아가씨를 볼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황궁 안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보는 눈도 많았고 떠드는 입도 많았기에 소문이 끊이지를 않았다. 사람이 원래 잘 잊어버리는 동물이라서 그런 것인지 황궁 안에 있는 태감과 궁녀들은 경력 7년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던 그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과거 유언비어로 황궁 안에 피바람이 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다시 추문을 일으키는 데 열중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쩌면 3년 전 그날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일 수도 있었다. 사실 지금 황궁에 있는 궁녀와 태감 중 대부분이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이들은 황가의 어진 모습 뒤에 숨겨진 칼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아니면 범씨 집안 아가씨에 대한 황제 폐하의 태도가 너무 모호해서 어서방과 관련된 소문이 점점 황궁 전체에 퍼지는 건지도 몰랐다.
여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명군인 황제 폐하는 과거 주색에 빠져 방탕하게 생활했던 군주들과는 달랐다. 몇 년 동안 황궁 안에 들인 여자들이라고는 기껏해야 십여 명 정도에 불과했고, 자식도 겨우 네 명뿐이었다. 그러니 황제 폐하의 이러한 성향을 가늠해 보면 황궁 안에서 떠도는 소문의 내용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가 범씨 집안 아가씨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대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최근 이틀 동안 황궁에서 발생한 또 다른 큰 사건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그건 바로 뛰어난 황궁에 들일 만큼 자질이 뛰어난 여자를 선발하는 일이었다. 3일 전부터 자질이 뛰어난 여자를 선발하기 시작하면서 경국 황궁에서 십여 년 동안 중단되었던 수녀 선발 작업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누구도 어째서 지금 갑자기 이 일을 시작하는 건이 알지 못했다. 황제 폐하가 갑자기 중년의 위기를 맞아 다시금 젊음을 발산하고 싶은 마음에 후궁에 여자를 채우려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알 수가 없었다.
3일 전부터 태상사가 주관을 하고 궁정과 예부가 협력해서 황궁에 들일 여자를 선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국은 오랜 시간 황궁에 들일 여자를 선발해오지 않았던 탓에 모두들 당황해 허둥대기 일쑤였다. 예부마저도 절차를 잘 몰라서 혼란스러워하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경국 7로와 주와 군은 아직 교지가 도착하지 않아서 운 좋게 수녀(秀女)로 선발되어 황궁에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의 소문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가장 먼지 움직인 곳은 소문이 가장 먼저 퍼진 경도였다.
이건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였다. 경도 안에서 오랜 시간 칩거해 있던 왕공 귀족과 대신과 명사들은 이번 기회를 반드시 잡고 싶었다. 그래서 절차가 혼란스러웠어도 그저께 밤에 이미 나이가 맞는 관리 집안 여식들은 궁에 들어와 있었다.
오랜 시간 조용하던 황궁에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들어오자 순식간에 싱그러운 봄날처럼 활력이 넘쳤고, 밤이 되어도 수녀들이 머무르는 궁 안에서는 맑고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생기와 활력이 넘치는 봄기운이 초가을 황궁 안에 가득해졌다. 이에 황궁 사람들은 더욱 의문 가득한 시선으로 어서방을 바라보았다. 만일 황제 폐하에게 정말 여자를 들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거라면, 지금 황제 폐하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범씨 집안 아가씨는 어떻게 되는 걸까?
“모두 멍청이들입니다.”
눈꺼풀을 살짝 내려뜨린 의 귀빈이 3 황자의 손을 살며시 잡아당기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어떤 분이시고, 또 저하의 스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도대체 어쩌다가 황궁 안에서 이런 터무니 없는 소문이 돌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황궁 안에 사람들은 대부분 아둔하고 멍청합니다. 게다가 대부분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라서 지난 일들을 모르고 있을 겁니다.”
3 황자 이승평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소년인 3 황자의 미소는 살짝 억지스러웠고, 날이 갈수록 맑고 밝아지는 눈동자에도 어렴풋하게 걱정하는 기색이 보였다.
자기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의 귀빈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폐하는 명군이시니 터무니없는 일을 추진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이번에 수녀를 뽑아 황궁에 들이는 일은 어서방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부황께서는…… 단지…….”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승평이 고개를 번쩍 들고는 걱정과 우울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부황께서 스승님에게 입궁하라 명령하실 거란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수녀를 선발한다고 하니…… 아마 부황께서는 이전처럼 스승님을 믿지는 못하실 겁니다.”